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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신학

코로나19 시대의 기독교 신학, 무엇을 말해야 하나 ,“코로나19?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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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기독교 신학은 무엇을 말해야 하나 

 

코로나19의 창조신학

“코로나19?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Ⅰ. 들어가며

 

1) 코로나19의 복기, 필요한 이유

 

세포조차 갖추지 못한 바이러스를 포함한 모든 생물이 하나의 조상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유명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세속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반면, 기독교는 온 세상의 모든 구성 요소와 더불어 생물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성경 계시를 따른다. 이 세속 과학과 기독교의 기원관이 접촉점과 융합이 가능한 부분이 어디까지 인지는 여전히 관련 학자들의 논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세속 과학이든 기독교의 창조 계시든 그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속 과학과 성경적 기독교는 그 본질의 세계관과 전제 아래 충실하게 각자의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렇게 과학과 성경적 기원론은 그동안 적절한 균형과 때로는 역동적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 긴장 관계의 균열이 불현 듯 찾아왔다. 바로 코로나19의 팬데믹은 이 관계의 적절한 긴장과 균형을 무참히 허물어버렸다. 과학과 방역을 내세운 정치와 행정과 의료 통제 앞에 교회는 별다른 도전이나 응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수동의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그런 와중에 교회는 마치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이나 된 듯 일부 언론과 대중들의 질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억울한 부분이 있다. 교회 안에도 전문 의료인들이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관련 전문가들과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적 목소리를 낼 충분한 시간과 기회와 좀 더 주도적 대응 수단은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아더 홈즈(Arther F. Holmes)는 초대 교회부터 기독교는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라 천명해 왔다고 했다. 세상도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세상이다. 따라서 그 창조적 지혜는 모든 진리의 근원이요 규범이기에 불변의 본질 속에 보편적인 것으로 세상에 바른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기독교적 당위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코로나19 앞에 그저 제도권 권력에 순종하고 무기력한 수동의 자세로 당황하는 태도만 보였을 뿐이다. 신학과 신학의 논문이 극소수 신학자들만이 참여하는 책상 학문이 되어가고 있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 코로나19는 신앙과 신학에도 무언가 과제를 주었다. 20세기 신학이 구속 신학의 시대였다면 포스트모던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급진적 변화와 함께 시작된 21세기는 신학도 이제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복음의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코로나19의 성경적 복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 박쥐, 그 작은 실마리에서 팬데믹으로

 

어릴 적(1960년대) 필자가 살던 고향 민가에는 박쥐가 참 많았다. 아마 당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의 익숙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박쥐는 주로 목조 건물의 나무와 벽 사이의 공간 속에 살면서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옆집 세무서장 관사의 낡은 벽 속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박쥐들 풍경이 눈에 선하다.

 

우리 민족은 박쥐의 그 요상한 생김새(?) 때문일까 박쥐를 생포하여 시식하는 것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다만 당시 유사한 풍경이 있었다면 동네 개구쟁이 형들이 참새를 잡아, 구워 시식하던 장면이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포장마차에서 팔던 참새나 토끼고기 등을 “샤슬릭”처럼 꼬치에 끼워 불판에 지지던 소리와 냄새를 뚜렷이 기억한다. 물론 박쥐도 일부 보양식이나 약용(치료 또는 단백질 보충 등)으로 식용하는 사람들이 국민 정서상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보양음식에 관한한 우리 민족의 집착은 어느 민족 못지않다. 하지만 박쥐만큼은 경제 상황이 나아지고 생활환경도 바뀌고 언론의 비판 때문인지 주변에서 시식한다는 소문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과 달리 중국은 여전히 박쥐 식용의 풍습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언론 보도나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아도 그렇다. 또한 중국 대도시의 빌딩 숲 뒷골목을 들어서면 장면이 바뀌어 마치 과거 6·7십 년대 고향 풍경을 보는 듯했기에 하는 말이다. 보기도 낯선 이 포유류 식용이 결국 인류 대 참사를 가지고 왔다. 사스와 메르스나 이번 ‘우한 폐렴’(코로나19) 모두 박쥐 속 바이러스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코로나19의 시발지가 중국 우한의 시장터이든 아니면 우한 생물 연구소이든 박쥐와 관련된 것은 분명해졌다. 도대체 이 바이러스는 무엇이고 성경은 왜 이 박쥐를 먹지 말라 했을까?

 

코로나19가 세상을 빠르게 변환시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뒤늦게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인,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상태를 일컫는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하였다. 팬데믹은 다른 대륙의 국가에까지 추가 감염이 발생한 상태로, 인류 역사상 팬데믹에 속한 질병은 14세기 중세 유럽을 초토화시킨 '흑사병(페스트)', 1918년 전 세계에서 5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1968년 100만 명이 사망한 '홍콩 독감' 등이 있다. 특히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WHO가 1948년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팬데믹을 선언한 경우는 1968년 홍콩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 2020년 코로나19 등 세 차례뿐이었다. 그리고 이 현재진행형인 팬데믹이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갈지 누구도 명쾌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전문가들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인류와 지구촌의 패러다임이 코로나19 전후로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라 판단한다는 점이다. 이미 인류는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이 36년 만에 야심차게 준비했던 인류 대제전인 하계올림픽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다. 앞으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다 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3) 그렇다면 기독교적 관점은

 

기독교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구촌 생태계와 관련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세상과 그분의 말씀, 곧 창조신학이 그 중심이요 출발점이다. 우주는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요 지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류가 생명을 영위하는 삶의 터전이요 이 지구촌에서 인류는 영원과 구원을 갈망하며 살고 있다. 즉 이 터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발을 딛고 산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이요 중심인 기독론과 종말론도 이 터전을 중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매몰되어 살다가 천국도 결국 “새 하늘과 새 땅” 즉 처소라는 점을 교회가 간과하였다.

 

이 창조 교리와 구속 교리의 신학적 관계를 고찰한 주요 학자로는 폰 라드(von Rad)가 있다. 그는 이 창조 교리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구속 교리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보조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그럴 경우 구속 교리 속에 창조 교리는 매몰되어 숨어버리고 만다. 자연 신학을 철저히 배제한 칼 바르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0 세기 창조 신학이 구속 신학의 상징적 두 거물에 가려 독자적 영역 확보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창조 모티프가 구원 모티프에 종속한다는 폰 라드의 견해에 반대하여 창조 신학을 강조한 신학자도 있었다. 슈미트(Hans Heinrich Schmid, 1937-2014)는 창조신학을 성경 신학의 중심 대상으로 묘사하여 모든 신학은 특별히 창조를 말하지 않더라도 창조신학이라 했다. 비록 슈미트의 견해가 성경적 창조신앙을 고대 근동의 창조 사상과 관련하여 접근하였음에도 성경 창조 신앙이 세속의 기원론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신학의 출발점으로서의 창조의 중요성을 지적한 점에서는 옳았다.

 

구속 신학은 체계상 교리의 확장성에 일정한 제한을 가진다. 반면 창조 신학은 분명 기독교 사상과 과학 발전과 더불어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이나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이 과학의 점진적 발달에 따라 성경이 과거 역사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었던 영역에서 창조 신학은 역설적으로 성경 속 창조 신앙을 바탕으로 무한한 확장성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이 소박한 교리의 껍질 속에만 안주하면 안 된다는 것을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디지털·사이버 세상과 바이러스와 같은 미시의 미생물 세계는 눈 뜨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코로나19의 팬데믹 아래 신학과 성경적 세계관은 마냥 제도권 권력에 순종하고 무기력한 수동의 자세로 만족했어야만 했을까? 이 문제를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복기해보려는 이유다.

 

완보동물 영상 캡처

Ⅱ. 미생물, 그 본 모습은

 

1) 미생물의 분류

 

코로나19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사실 뜸팡이와 쪽팡이, 바이러스를 구분할 수 있는 신자들도 많지 않았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같은 영역은 그저 전문가들이나 관심을 가지는 영역에 불과했다. 코로나19가 현실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대부분의 신자들은 바이러스가 무엇이고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같은 대소동의 주인공을 창조하신 것인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목회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미생물(microorganism , 微生物)은 육안의 가시한계를 넘는 0.1mm 이하 크기인 미세한 생물로 주로 단일세포 또는 균사로써 몸을 이루어 최소 생활단위를 영위하는 생물로 주로 조류(algae), 세균류(bacteria), 원생동물류(protozoa), 사상균류(fungi), 효모류(yeast, 뜸팡이류), 곰팡이 등과 한계 생물이라 할 수 있는 바이러스(virus) 등이 속한다.

 

본래 이들 미생물은 분류학상으로 보면 은화식물(隱花植物, 민꽃식물, Cryptogamae)에 속한다. 민꽃식물이란 꽃을 피우지 않고 포자로 번식하는 식물의 총칭이다. 크리스천 과학자였던 분류학의 아버지 린네가 「식물의 종」(1753)에서 식물계를 24강(綱, class)으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 양치류(羊齒類)·선태류(蘚苔類)·조류(藻類)·균류(菌類)를 하나로 통합하여 민꽃식물이라 했다. 사실 이 같은 분류법은 린네가 원조였다. 오늘날 분류학의 시조로 불리는 린네는 생물을 분류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확고한 기본 입장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성경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의 종류를 분류해 보는 것과, 그 종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종류로 절대 변화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것은 모태 신앙인으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보수적 신앙의 유산 덕분이었다. 생물의 종(種)에 대해 그는 전혀 우연론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생물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攝理)였다. 예를 들어 린네가 볼 때 라플란드 이끼의 변종(變種)이 이곳에서는 자라고, 저곳에서는 자라지 않는 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믿음에 린네는 원칙만 따르는 도서관 직원 같은 기질을 가진 인내심 강하고 정확한 스웨덴 사람이었다. 토마스 쿤과 프린스턴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과학사상가 찰스 길리스피(C. C. Gillispie)가 린네는 자연을 볼 때 사상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보았다고 평가한 것이 이해가 간다.

 

일단 종을 나눈 다음 그 종 안에서의 특성으로 생물을 구별해 보고자 했던 린네의 분류 방법은 참으로 성경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그는 철저한 창조론자였다. 동물보다 식물을 다루는 데 있어 린네는 더욱 꼼꼼하게 관찰하고 발전한다. 17세기, 식물의 꽃은 식물의 성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퍼져있었다. 린네는 꽃의 형태를 분류에 활용한다. 그는 식물을 꽃의 수술의 수, 비율, 배열에 따라 24개의 강(綱, class)으로 나누었다. 강은 암술대의 수에 따라 목(目, order)으로 나뉘고, 목을 결실 방법에 따라 속(屬 )으로 나누었다. 속은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에 따라 종(種)으로 분류하였다. 이 같은 린네의 명명법은 동물학으로까지 확장되어, 창조주께서 주신 주요 성질은 속(屬)으로 부수적인 성질은 종(種)으로 명명되었다.

 

식물학의 아버지로도 불렸던 린네 사후 프랑스 식물학자 A. T. 브로냐르는 식물계를 꽃의 유·무로 크게 나누어 꽃을 피우는 것을 현화식물,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을 은화식물로 정리하였다. 이 은화식물의 균류 안에 쪽팡이(세균, bacteria)와 진균류(眞菌類)의 뜸팡이(효모)와 곰팡이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쪽팡이(세균, 박테리아)는 인체에 들어와 감염성 질병을 일으키는 특징이 있다. 린네도 모르던 미시의 생물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감염성 질병을 일으키는 이들 미생물은 세균 말고도 바이러스가 있다. 바로 코로나19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들 감염성 질병을 일으키는 두 미생물인 세균과 바이러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2) 세균과 바이러스의 구분

 

미생물은 광학현미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최소(最小) 생명체를 말한다. 이들 미생물을 크게 나누면 조류(藻類, algae), 원생동물(protozoa), 사상균(絲狀菌, mold), 효모(酵母, yeast), 버섯, 세균(bacteria), 리케챠(rickettsia), 바이러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위생(衛生) 측면에 있어 미생물은 발병이라는 현상을 동반하는 특징을 갖는 경우가 있다. 의학은 곰팡이, 버섯류, 부패세균 등을 깊게 다루지 않는 반면, 식품위생학은 이들 미생물들 상세히 다룬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의 중요 병원성 미생물들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영역에 존재한다. 원생동물군 가운데는 사람 장관(腸管)에 기생하는 아메바 종류가 있고, 광합성이 없고 운동성도 없으며 대부분 육지성인 진균류들은 형태가 다양하고 무성 또는 유성으로 포자(胞子)를 형성하여 증식하는 사상균(絲狀菌, 곰팡이)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항생물질도 만들어내고 식품 부패에 관여하기도 하고 주정 공업에 이용되기도 하고 효모(yeast, 뜸팡이)도 포함한다. 거대 곰팡이라 할 수 있는 버섯류도 여기에 속한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중간 미생물에 속하는 리케챠에는 발진티푸스 병원체가 있다.

​쪽팡이(박테리아, 세균)는 스스로 증식하는 반면, 바이러스는 숙주(宿主, Host)세포에 기생하는 미생물이기에 전혀 다르다. 쪽팡이는 1~5㎛(100만분의 1미터)크기로 가장 작고 간단한 단세포 생물(식물)로 토양, 물, 공기를 비롯해 사람이나 동물의 피부를 비롯하여 내부기관지 또는 장(腸)에 까지 존재한다. 쪽팡이 대부분이 병원균(病原菌, pathogenic bacteria)이지만 사람과 전혀 무관한 것과 유산균, 발효균, 초산균, 방사균처럼 유용한 세균도 일부 있다.

 

이들 쪽팡이는 이미 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미생물이었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달랐다. 독감 등의 유발 미생물임을 알면서도 20세기까지만 해도 그 속성에 대해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유명한 생물진화론자 굴드(Stephen Jay Gould)조차 미생물들이 인간들에게 과소평가되어 왔다면서 그 수에 있어 다른 생명체를 압도하는 이 작은 생물체의 수와 다양성을 논하면서 현대가 박테리아 시대(Age of Bacteria)라고 했을 정도다.

 

역사상 인류를 가장 괴롭혀왔고 지금도 퇴치되지 않고 있는 전염병 결핵이 바로 쪽팡이인 결핵균에 의한 것이다. 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도스토예프스키, 발작, 쇼팽, 작가 김유정, 시인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결핵이고 대한민국의 유명 목회자 한경직, 정진경, 조용기 등을 괴롭힌 것이 바로 결핵이었다. 결핵균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까지 언급했을 정도로 인류 역사와 함께 인류 곁에서 인류를 괴롭혀온 ‘모든 질병의 왕’이었다. 물론 이들은 결핵이 미생물인 균(菌)으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결핵이 전염병인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1865)한 사람은 프랑스 외과의사 J. A. 빌맹이었고 결핵균을 발견한 것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R. 코흐였다. 이 결핵균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상황에서 슈퍼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우리 인류는 신음하고 있으니 디지털시대가 왔다고 환호하던 인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는 이미 사망률에 있어 바이러스인 에이즈를 능가하고 있으니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바이러스는 세균보다도 그 크기가 훨씬 작아서 0.05~0.1㎛에 불과해서 세균보다 최고 100분의1 정도로 작다. 세균이 단세포로 이루어져 세포벽, 세포막, 유전정보(DNA, RNA)가 들어있는 핵, 단백질 등으로 구성돼 있는 반면 세균보다 작은 바이러스는 유전정보가 들어있는 핵(주로 RNA 또는 DNA)이 단백질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 세포라고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세포를 숙주(宿主, Host)로 한 기생(寄生)의 형태로 생존하는 것이다. 즉 바이러스는 유전물질만 가지고 인간과 동물의 세포 속으로 들어가 그 숙주세포의 효소, 단백질 등을 이용해 그 수를 늘려 나간다. 바이러스를 생물로 규정하지 않으려는 과학자들도 일부 있는 이유다. 그것은 바로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세포(숙주세포)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떤 생명 활동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균도 통제하기 쉽지 않은데 바이러스를 통제한다고? 그리 간단치 않다. 슈퍼박테리아에 한가지 무기가 있기는 하다. 바로 박테리아를 잡아먹는 ‘박테리오 파지’라는 바이러스다!

 

어찌되었든 진화생물학자들조차 도대체 이들 미생물들이 얼마나 많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 정확한 파악을 하지 못한다. 현재 3천 만종 이상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가운데 단지 150만종만이 명명되어 있을 뿐이다. 명명되지 않은 생명체의 대부분은 미생물들이다. 생물 종들은 빠르게 멸종되어 가고 있는데 그 속도는 알 수 없으며 학자들은 대략 연간 0.1% 정도로 추정할 뿐이다. 이 수치는 인류가 지구에 출현하기 이전과 비교하여 1,000배 정도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생물 종들이 다양하지 못했던 초기 지구 환경의 악조건(?)에서도 이 완벽한 생명의 고향 지구에서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생물들이 종 간 진화를 하고 살아남아 폭발 번식했다는 것일까? 그런데 오늘날 이 좋은 환경 속에서는 빠르게 생물 종들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고? 지금이 폭발 번식하기 더 좋은 환경이 아닌가? 환경과 생화학과 미생물을 두루 배웠던 신학자·목사로서 필자는, 완벽하게 생태계가 잘 유지되고 있는 오늘날의 생태환경 속에서도(물론 그렇지 않은 환경도 있기는 하지만) 생물 종들이 오히려 빠르게 멸종되어 가고 있다는 생물진화론자들의 추정은 과연 우연 진화가 정말 맞는 것인지 여전히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필자만의 생각일까?

 

 

Ⅲ. 세균과 바이러스의 인체 내 감염(바이러스를 가볍게 보면 안 되는 이유)

 

병원성 쪽팡이(세균)들은 보통 피부 상처나 호흡 등을 통해 인체로 침입한다. 반면 바이러스는 혈액, 타액, 피부 등을 통해 생체로 들어오며, 각각의 바이러스가 선호하는 세포에 달라붙어 세포 속으로 들어간다. 바이러스는 쪽팡이(세균)들보다 소독약이나 열에 강하고, 전염 정도가 세균보다 빠르며, 유전 물질만 가지고 세포는 없으므로 변신(變身)에 능해 돌연변이 확률이 더 높다. 이것이 쪽팡이들보다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치료제 개발이 더 쉽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슈퍼 바이러스의 출현도 가능한 이유다. 이 복제를 통한 변이를 막으려면 바이러스의 재생산을 막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들 바이러스들은 세포가 없이 RNA나 DNA를 가졌기에 감마선에 약한 특성을 보인다.

 

하지만 세포가 없기에 변이(變異)가 잦은 바이러스의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어도 바이러스가 변신해버리면 백신이나 치료제가 쓸모가 없어지기에 개발자 입장에선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온 세상이 형식은 기업이나 연구소 중심의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라고 하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국가적 후원을 받으며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나서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내 최초(4명)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확진환자는 과거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과 같은 계열의 병원체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발병 특성을 보였다. 국내 의료진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스”때와 유전자 염기서열이 70~80% 유사하다. “메르스”는 50% 상동성(유전자 및 단백질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백신과 치료제가 듣지 않아 중국에서 일부 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까지 시험 투여해 보고 있다는 것은 바로 바이러스 유전자의 잦은 돌연변이 때문에 예방과 치료가 쉽지 않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유전자 염기서열 차이로 인한 아미노산의 변화를 기준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S, V, L, G, GH, GR, O(기타) 등 총 7개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G 계열은 스파이크 단백질과 다른 단백질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한 반면, V와 S 계열은 스파이크 단백질에는 돌연변이가 관찰되지 않았다. 최근 전 세계서 검출되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부분(97% 이상)은 스파이크 단백질에 돌연변이가 생긴 G 계열, 즉 G, GH, GR 세 그룹이다. 이들 변이 바이러스가 전파력도 크고 치사율이 높기에 전 세계 국가들이 통제에 애를 먹는 이유다. 그런데 지금까지 분석된 코로나19 유전체의 3/4 가량이 이들 세 그룹의 바이러스 등이다.

 

감염의 경우에도 쪽팡이와 바이러스는 그 치료 방법이 다르다. 쪽팡이는 항생제를 쓰며 바이러스는 항바이러스제를 쓴다. 감기나 독감 등에 아무 약제나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통 쪽팡이나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하게 되면 우리 몸은 그 미생물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여 저장해 둔다. 따라서 이들 쪽팡이와 바이러스가 재침투하였을 때 재감염을 막게 된다. 예를 들어 세균이 침입하면 콧속의 면역물질(항생물질)은 세균과 치열하게 싸운다. 그 찌꺼기(부산물)로 누런 콧물이 나오는 것이다. 반면에 바이러스나 이물질이 침투하면 우리 몸은 정확하게 파악하여 바이러스나 이물질을 씻어내기 위해 맑은 콧물이 많이 분비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몸은 한치의 오차도 없다. 그렇다고 개인이 무조건 세균이나 바이러스라고 판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바이러스는 쪽팡이들과 달라 변형이 잦다는 점이다. 즉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자주 감염되는 것은 독감 바이러스가 유전적 변형이 잦아 반복 감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수두 바이러스나 헤르페스처럼 인간을 한번 감염시킨 다음에도 인체 속에서 오래 공존(잠복)하면서 불쑥불쑥 말썽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도 있다. 파상풍, 콜레라, 디프테리아, 결핵, 폐렴 등이 쪽팡이들이 일으키는 질병이며 일부 감기, (홍콩)독감, 조류 독감, 에블라, 사스, 메르스, 수두, 대상포진, 간염, 헤르페스, 소아마비, 천연두, 에이즈, 우한 폐렴(코로나19) 등이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병들이다. 바이러스는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로 자궁경부암, 간암, 편도선암, 헤르페스바이러스에 의한 피부암의 일종인 카포시육종, 성인T세포백혈병림프종 등이다. 천문학적 숫자의 미생물들 가운데 거의 모든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세균, 원생생물들은 현재까지 겨우 100종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앞으로 그 많은 미생물들 가운데 어떤 미생물들이 불쑥 인류 앞에 새롭게 등장하여 우리 인간에게 또 다른 팬데믹을 선물할지 아무도 모른다. 지극히 작은 이 미생물이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의 과학기술 시대를 자랑하는 인류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집 안에만 약 8만종(79,950종)의 세균들이 득시글거리기에 하는 말이다.

 

 

Ⅳ. 미생물과 생명 기원의 신비

 

생명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미생물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고 한경직 목사도 수상한 적이 있는 템플턴 상을 1995년 수상한 20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이론물리학자 폴 데이비스도 생명의 연구는 깊이하면 할수록 의문이 더 깊어질 뿐이라 했다.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 속에는 인류가 파악하지 못하는 복잡계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교과서적으로 단순히 진화돼 왔다고 판단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조차 갖추지 못한 바이러스도 제어하지 못하고 온 세상이 대 소동을 벌이고 있는 코로나19의 세상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견하여 파동 이론과 양자 역학의 한 축을 세웠던 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슈뢰딩거(1887~1961)는 1944년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낸다. 물리학자의 눈으로 생명을 볼 때 생명은 물리학의 영역인 원자들의 집합체요 유전 물질도 있고 돌연변이도 있고 유전 암호도 조금 있고 질서와 무질서를 다루는 엔트로피 속에서 이 현미경 부품을 가진 이 작고 정교한 기계로 보이는 생명 현상은 그 조립 설명서의 실체가 드러날 듯 보였다. 더구나 이 천재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추상적인 영역까지 뛰어든다. 그러나 생명의 기본 구조인 유전 코드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지금도 생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생명 자체 시스템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과 공간은 어디서 왔는가? 생명이 우연한 물질에서 시작되었다면 통증은 무엇이고 환희는 무엇인가? 아름다음이나 진리의 개념은 어디서 온 것인가? 종교적 본성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또한 생명이 가지는 일정한 자율성(autonomy)이나 목적성은 어디서 왔는가? 이것들이 모두 단순한 물질에서 온 것인가? 이 같은 비 물리적 요소들도 우연히 진화되었다는 것일까? 생명 시스템의 기술적 메커니즘 해석은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근원적이고 본질적 질문들은 해결되지 않고 오리무중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가장 원초적 미세 단위인 바이러스를 분석하면 그 답이 있을까? 바이러스 연구의 권위자요 1953년 막스 플랑크 문리화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었고 1964년 연구책임자, 훗날 이 연구소 소장을 지내기도 했던 1967년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 만프레드 아이겐(Manfred Eigen)은 진화가 불연속의 도약을 거쳐 진행한다고 했다. 진화가 맞다면 기적적 도약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불연속 도약을 불러일으킨 메카니즘을 좀 더 검토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진화론은 세포를 가지지 못한 바이러스가 진화하여 단세포생물로 진화하여 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세포보다 아미노산과 단백질과 RNA와 DNA가 먼저 진화 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숙주(宿住, Host) 세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이러스와 숙주 세포의 역할을 하는 생명체들이 서로 동시에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이러스는 생명체가 멸종하면 이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다. 따라서 바이러스들은 숙주 세포가 없으면 자신들도 생존할 수 없기에 일정한 돌연변이를 하다가 세포와 공존의 길을 가게 된다. 치명적 질병이었던 에이즈가 관리가 가능한 질병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다. 공포의 코로나19도 결국은 유사한 길을 걸을 것이다.

 

쪽팡이들도 마찬가지다. 생체라는 생화학공장은 모든 기능 요소들의 동시 존재를 암시한다. 유전물질(DNA, RNA)과 아미노산과 단백질과 그들을 담은 세포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각각의 물질은 아무런 기능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DNA가 있어야 RNA와 아미노산들이 단백질 합성의 기능을 수행하고 수십 종류(약 70여 종)의 단백질들이 있어야 비로소 DNA가 작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피드 백 기능이다. 이 모두가 정말 우연한 결합에 의해 정교한 생화학 공장을 생체 안에서 운영하는 것일까? 마치 고장 난 휴대폰 수십 억대를 분해하여 쌓아놓는다고 우연히 새로운 휴대폰 조립이 가능한가? 그것도 성능이 개선된 상태로 말이다. 세포와 DNA와 단백질이 그득한 정육점 고기들을 짓이겨 놓는다고 그곳에서 새롭고 정교한 생화학 공장이 탄생하는가? 그런데 과거 극악한 지구 환경 속에서 그런 생화학 체계가 우연히 생겨났다고? 슈퍼컴퓨터(이것은 생명이 아니다)보다도 더 정교한 그 생명 생체컴퓨터 시스템이?

 

우연(진화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믿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창조 섭리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다. 즉 믿음의 차원으로 본다면 “우연”은 정말 전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그렇다면 기원 논쟁에서 무엇이 남는가? 여러분들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Ⅴ. 바이러스와 박쥐, 성경은 왜 박쥐를 먹지 말라 했나?

 

성경은 박쥐를 하늘을 나는 생물들(새들과 박쥐와 대부분의 곤충들)에 포함시킨다. 이들 하늘을 나는 생물(새와 곤충)의 규례(레 11: 13-23)에는 중요한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먼저 새는 부정한 것만 소개하고 있다. 먹이가 풍부하지 못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진 새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광야의 새들은 주로 시체와 불결한 것을 먹는 종류들이었다. 또한 일부 새들은 물고기, 악어, 뱀들과 더불어 애굽 땅에서 신들의 형상이었다. 뱀이 하애굽의 상징이었던 반면 독수리가 많이 살던 상애굽에서는 독수리가 국가의 수호신이요 상징이었다. 즉 ‘Re'는 태양의 신인 동시에 매나 독수리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가진 반신(半神)이었다. 따오기 머리를 가진 'Thoth'는 신들의 서기관으로 시간을 측량하고 수를 계산하며 재판 시 사람이 마음의 무게를 재는 재판의 신이었다. 따라서 이들 새들은 모두 정결치 못한 생물로 분류되었다. 즉 뱀과 하늘을 나는 짐승은 애굽 신의 상징이었다

 

성경은 당시 가나안 주변에 익숙하게 알려진 조류와 곤충들을 모두 망라(網羅)하고 있다. 먼저 20여 종류의 부정한 새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독수리, 솔개, 물수리(어응, 魚鷹), 말똥가리(매), 말똥가리(매) 종류, 까마귀 종류, 타조, 타흐마스(쏙독새의 일종, nighthawk, KJV, RSV), 갈매기, 새매 종류, 올빼미, 가마우지(노자,鸕鶿), 부엉이, 흰 올빼미(따오기), 사다새(당아, pelican, KJV, RSV), 너새(올응, carrion vulture), 황새와 백로 종류, 오디새(대승,戴勝, hoopoe, 후투티), 박쥐였다(괄호 안의 이름들은 한글개역판을 참조). 공동번역 성서는 이들 이름을 독수리, 수염수리, 흰꼬리수리, 검은소리개, 각종 붉은 소리개, 각종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각종 매, 부엉이, 사다새, 따오기, 백조, 펠리컨, 흰물오리, 고니, 각종 푸른 해오라기, 오디새, 박쥐로 기록하고 있다. 개역성경보다는 개역개정판과 공동번역이 좀 더 현대적 이름에 가깝게 번역한 이름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 동물들은 오늘날 명확히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종류가 있는 가하면 그렇지 않은 종류들도 있다. 그래서 성경의 역본들은 각각 조금씩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박쥐는 오늘날 분류학상으로 포유류에 속한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의 상식에 적응하여 성경은 박쥐를 나는 새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레 11:20, KJV). 성경을 과학책이라 우기며 토끼를 반추동물이라던가 박쥐를 포유류가 아닌 새라고 집착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런 성서근본주의적 사고는 부질없는 집착에 불과하다.

 

곤충은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 가운데 뛰는 다리를 가진 곤충들만 정결한 것들이었다. 즉 메뚜기 종류, 베짱이 종류, 귀뚜라미 종류, 팟종이 종류 등 네 가지 종류가 해당되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것들은 부정한 종류였다. 곤충들은 지금도 동남아 등지에서는 식용으로 다양하게 시식되고 시판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판되는 경우는 흔치 않으나 과거 농촌에서 자란 대부분의 세대는 논과 밭에서 메뚜기 등 곤충들을 포획하여 닭 등 가축의 먹이로 주거나 구어 먹고 튀겨 먹은 기억들이 남아있다. 세례 요한이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것도 바로 메뚜기가 정결한 곤충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마 3:4).

 

그러면 왜 성경은 박쥐(레 11:19) 등과 같은 생물들은 먹지 말라 규정했을까? 박쥐를 매개로 한 20~21세기 바이러스의 창궐까지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바이러스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염된다는 것이 확인된 것은 1996년 12월 아르헨티나 남부를 덮친 한타바이러스(hantavirus)가 최초 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집단 밀집은 바이러스 전파에는 치명적 위험요인이다. 남극 펭귄을 집단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의심을 받았던 신종 바이러스 균주(IBDV, infectious bursal disease virus)는 북반구 집단 양계산업지역이 바이러스에 오염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1998년 10월부터 말레이지아에서 100여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핸드라(Hendra) 유사 바이러스도 성경이 섭식을 금지한 생물인 큰박쥐와 돼지의 집단 사육이 사람에게 전염된 사례였다. 이 때 도살 된 돼지는 100만 마리가 넘었다. 돼지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될 가능성이 인정되면서 영국의 규제기관은 유전자 재조합 같은 오늘날 생명공학자들이 거리낌 없이 시도하고 있는 이종(異種)간 이식의 임상 시도를 중단 시켰다. 생명공학 기업의 탐욕이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위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질병 원인은 환경 요인이 압도적이다. 사람의 유전자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노약자라 사망하는 게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핵심이다. 만일 박쥐를 팔던 우한 시장 바닥(이것도 문제는 문제다)이 아니라 우한 생물연구소가 바이러스의 유전자 재조합을 시도하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유출시킨 거라면 반 하나님무신론 국가가 저지른 큰 재앙 중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시장이든 연구소든 그 질병 확산의 진원에 대한 진상은 반드시 엄중하고 정확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이렇게 낯선 미생물에의 접촉이나 DNA변형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숙주의 범위와 전염성과 질병의 강도를 어떤 누구도 예측 불가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인류의 재앙은 코로나19로 인류를 강제로 겸손하게 만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인간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가 아니던가! 그리고 반드시 심판은 기다리고 있다(히 9:27).

 

400여 년 동안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모세의 주도 아래 출애굽을 감행한다. 장정만 60 여만 명이었다. 이들은 광야에서만 40년을 유랑한 후 가나안으로 입성한다. 이들 집단 밀집 공동체에 섭생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만일 특정한 전염병이나 식중독이나 바이러스가 공동체에 침투하여 창궐한다면 민족이 궤멸될 수도 있었다. 박쥐와 바이러스로 공동체가 소멸한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비극이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박쥐에게 은 우상, 금 우상을 던지라하여 박쥐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생물로 취급(사 2:20)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도 “박쥐 우상”을 경고하고 있다(렘 22장 참조). 이렇게 박쥐에게 쓸데없이 가까이 하는 것은 전혀 영육 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 규례에 따라 박쥐 식용을 멀리하여 공동체의 집단 발병을 막을 수 있었다. 따라서 레위기 섭생법은 비록 구원의 직접적 조건은 아닐지라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 인류를 속량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에 따른 광야와 가나안 섭생법까지 염두에 두고 인류 역사 전체에도 계시로서의 성경책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다중적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이들 부정한 동물들은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생물들일까? 그렇지는 않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낮 12시경 욥바의 피장(피혁공) 시몬의 집에서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을 때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나타났다.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내려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 그 때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결코 먹을 수 없다고 반응하였다. 이 때 두 번째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 15)는 음성이었다.

 

 

Ⅵ. 코로나19, 천산갑까지 누명?

 

2월 15일은 '세계 천산갑의 날'이다. 희귀 동물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정한 날이다. 이 천산갑까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누명(?)을 쓰게 된 것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박쥐에서 천산갑을 거쳐 인간으로 전파됐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중국 화난(華南)농업대학 연구진은 지난 2020년 2월 공식 웨이보 계정을 통해 다양한 야생동물의 시료를 검사한 결과 천산갑에서 나온 바이러스 유전체 염기 서열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서열과 99% 일치한다고 밝혔다. 천산갑 시료가 직접 우한 화난시장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천산갑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중간 숙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 발표였다. 억울하지만(?) 이제 박쥐로부터 시작하여 천산갑도 코로나 바이러스 중간 숙주의 공범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 중국의 유별난 섭식 문화와 은밀한 체제가 빚어낸 참사다.

 

이 천산갑이 왜 문제가 된 것일까? 천산갑은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주로 대만과 중국 남부 그리고 동남아와 아프리카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단단한 비늘로 뒤덮인 일종의 개미핥기다. 천산갑은 긴 혀로 주로 개미나 흰개미를 잡아먹는다. 그런데 일반적 개미핥기와 달리 천산갑은 특이하게 머리·몸·다리·꼬리 윗면이 마치 솔방울처럼 비늘로 켜켜이 덮여 있어 아주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 특이한 외모 덕분일까? 천산갑의 비늘은 갈아 먹으면 종기를 가라앉히고 혈액 순환에 좋다 하여 한약재로 쓰이고 있다. 멸종위기종임에도 불구하고 이 천산갑이 유통되고 밀무역되는 이유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런 접촉조차 쉽지 않은 동물들을 그렇게도 집착하고 섭식하는 것일까?

 

보양식에 관한한 우리 한민족도 타민족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국내외 동물보호론자들의 줄기찬 비판에도 불구하고 단순 사철탕을 넘어 지렁이, 불개미, 동면개구리, 뿔 종류, 피 종류, 쓸개 종류, 동물생식기 종류, 독사 등 어느 것 하나 마다하는 것이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과거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박쥐와 천산갑에까지 호기심을 보일 판이다.

 

과거 우리 국민들에게 디스토마 기생충이 많았던 이유는 바로 무분별한 민물고기의 생식 때문이었다. 우리 국민들이 보양식으로 여기는 뱀 쓸개나 잉어 쓸개의 독성이 급성신부전증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가물치회나 열대의 뱀 등을 생식할 때 몸에 들어오는 열대 기생충인 나토스토마에는 아직도 특효약이 없다. 고래 같은 일부 해양 물고기 등을 생식할 때에도 아니사키스 흡충 같은 희귀 기생충이 우리 몸에 침투할 수 있다. 뱀에는 혈관을 타고 돌아다닐 만큼 기생충이 많다. 심지어 우리 국민이 유난히 즐기는(?) 웅담에도 박테리아나 희귀하여 이름조차 기억하기 쉽지 않은 트리스티세르코치스와 트리치넬라 속선 모충이라는 유해한 기생충이 존재한다. 태국 최대 '두싯 동물원(Dosit Zoo)'의 원장이며 수의사인 알롱콘 마하놉 박사에 의하면 이것이 인체에 들어갈 경우 간과 비장에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다. 또 곰에게서 호흡기를 통해 유입될 수 있는 탄저병의 병원체는 폐렴이나 균혈증(菌血症)을 유발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피는 어떠한가? 온갖 잡균과 독소와 노폐물과 기생충의 통로이다. 동물이 도살될 때 받는 동물의 스트레스는 동물체 내(피)의 독소 내지는 노폐물 분비와 관련된다. 포화지방으로 되어 있고 노폐물들이 쌓여 있는 동물의 기름도 마찬가지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녹용, 사슴피, 사슴고기 등을 날 것 그대로 섭취하는 사례가 있어 소비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밝힌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현재 생녹용은 위생적으로 처리하여 추출가공식품에만 사용하도록 관리하고 있는 만큼 제품 표시사항 중에 식품유형이 ‘추출가공식품’으로 표시되어 있는지 확인한 후 구입하여 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추출가공식품이란 식용동물성소재를 주원료로 하여 물로 추출한 것이거나 여기에 식품 또는 식품첨가물을 넣어 가공한 것으로 세균수‧대장균군‧대장균 규격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생녹용은 건조공정을 거치지 않은 뿔로서 털을 제거하거나 90℃ 이상의 열수 등을 이용하여 3회 이상 세척 후, 냉동상태로 포장 및 보관·유통된 것이어야만 하며 추출가공식품류에만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부득이하게 생녹용을 가정에서 섭취할 경우에는 깨끗이 세척한 후 반드시 물에 끓여 마시는 것이 좋다.

 

생녹용을 자르면서 채취되는 사슴피를 그대로 받아 섭취하게 될 경우 결핵, 기생충, E형 간염 등에 감염될 우려가 높으며 사슴피 섭취에 따른 Q열 감염 사례도 보고되고 있어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 Coxiella burnetii라는 세균에 의한 질병으로 열, 두통, 근육통 발한 등 감기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도 하며, 만성 감염의 경우 심내막염, 간염, 골수염 유발하기도 한다.

 

사슴고기는 날 것으로 섭취할 경우 결핵, E형 간염 뿐만 아니라 기생충 감염으로 인한 척수염 발병 등의 우려가 있으므로 반드시 가열하여 섭취해야 한다.

 

보양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식품 위생학적 상식이나 의학적 상식이 무지한 편이다. 그에 비해 육식할 경우 날로 먹지 말고 구어 먹으라는 말씀이나 피, 기름 등을 먹지 말라(신 12:23, 24, 레 3:17)는 성경의 말씀은 오늘날의 위생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검증되지 않은 낯선 동물의 피나 기름이나 고기를 절대 생식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영양학적으로도 매일 상식하는 식품이 아닌 특수 음식이나 특수 보약 등을 섭취하면 우리 몸에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중금속이나 특수한 배당체, 알칼로이드, 특수 단백질, 특수 기생충, 톡신(Toxin) 등에 노출될 수 있다. 이것들이 위장과 간, 콩팥 등에 부담을 주게 된다. 우리 몸이 늘 감당하던 물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이런 특수 물질들이 약리적 작용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건강한 정상인들에게는 굳이 그런 것이 필요치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천산갑이 보양음식?

 

천산갑도 마찬가지다. 그 범상치 않은 외형 때문에 무슨 특별한 약리적 작용이 있지 않을까하는 우리 국민의 여전한 비과학적 상식이 문제다. 비늘의 화학 성분은 머리털·손톱·발톱·피부 등 상피 구조의 기본을 형성하는 각질 단백질(keratin)에 불과하다. 손톱과 발톱과 머리카락을 값비싼 돈을 주고 사 먹는 바보가 있을까? 영양학적으로 이런 단백질들은 분해도 쉽지 않을 뿐 더러 우리 몸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콜라겐 단백질 붐이 이는 것도 유사하다.

 

우리 몸은 어떤 단백질이 체내로 들어오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일단 분해하여 아미노산으로 만든 다음 유전자(DNA)의 명령에 따라 생체컴퓨터라 할 수 있는 생화학 시스템을 통해 수만 종류에 달하는 단백질을 적절히 재생성하여 사용한다. 특별히 효소(단백질)들은 기질특이성이 있어 오직 자신의 한 가지 역할만을 감당하기 위해 체내서 준비된다. 이렇게 우리 몸은 진화론이 무색하고 일반컴퓨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정보로 가득 차있고 정교하다.

 

일반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박쥐, 천산갑, 독사 등의 희귀 생명체들은 인간에게는 아주 낯선 온갖 종류의 바이러스들의 소굴이다. 그 희귀 동물 들 속에서 이들 바이러스들은 서로 공존하면서 산다. 바이러스들은 반드시 생명체를 여관처럼 숙주(宿主)로 삼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숙주가 없으면 자연히 소멸된다.

 

그런데 왜 이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달되면 소동을 벌이는 것일까? 당연하다. 박쥐든 천산갑이든 독사든 그 속에서 공존하며 평안히 살던 이들 바이러스가 인간이라는 아주 낯선 생명체를 만나면 인간이든 바이러스든 서로 어떻게 반응하고 공존공생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이 생겨 대 소동을 벌이기 때문이다. 즉 바이러스도 낯선 생명체 속에서 혼란을 겪고 인간도 처음 보는 이 낯선 침입자로 인해 생체 생화학 정보처리의 대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서로 간 공존공생의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진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이들 바이러스들이 사람 몸에서 조용해지는 이유다. 에이즈조차 이제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면 사람 몸속에서 관리 가능할 정도로 통제가 가능할 만큼 조용해졌다. 낯선 동물 속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바이러스들을 사람 몸속에 침입하게 만들어 깨우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낯선 것들에의 섭생을 막았던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규례)가 그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소아마비, 천연두, 뇌염, 인플루엔자, 메르스, 사스, 우한 폐렴이 모두, 인류 체내에 없던 특정 바이러스에서 왔음을 명심하자.

 

성경적 관점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할까? 하나님은 인간과 관련하여 유별난 음식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도 교활한 사람의 입맛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던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 파, 마늘 등 온갖 향신료 등을 그리워하며 노예 시절을 그리워했다(민 11:5). 엘리야가 얻은 음식이나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도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상 접했던 떡과 고기일 뿐이었다.

 

필자는 과거 한때 팔당호수변에 살았던 관계로 여름만 되면 개 도살 장면을 심심찮게 목격하곤 했다. 더욱이 교회의 모임이나 행사의 일환인 경우도 일반인들 모임 못지않게 빈번한 편이었다. 개울가 잔인한 도살 장면은 지금도 보기에 민망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보양식품의 경우 대부분 일반 음식보다 값이 나가고 도축에 관한 규제가 없으므로 위생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없다. 일부는 비합법적이기까지 하다. 더욱이 영양이 부족한 시대도 아닌데 굳이 즐겨가면서까지 찾을 필요가 있을까? 혹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는 안타까운 북한 사회의 서민들이라면 하나님이 용납하실지 모른다.

 

보양식품을 별로 손대지 않는 평범한 서구인들이지만 우리보다 평균적으로 건강하게 장수한다. 우리와 체질이 유사한 일본만 해도 보양식품에 우리처럼 유별나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보다 훨씬 장수하는 편이다.

 

모든 것을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니까 무조건 아무 것이든 거리낌 없이 먹고 마시면서 할렐루야 외치고 감사함으로 먹으면 된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크게 잘못된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살펴서 해야 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심지어 먹고 마시는 일까지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먹고 마시되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고전 10:32)하라 했다. 식물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닌 바에야 왜 굳이 그런 것들을 몸에 좋다고 먹으려고 하느냐는 의미인 것이다. 유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식물의 유익은 지극히 작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를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우상에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바울이 했던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은 거리끼지 않을지 모르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고전 8:12)이라 했다.

 

은혜 가운데 모든 것이 괜찮다 식의 의식 없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문제다. 사람들은 모든 일에 되도록 참기보다 즐기고 싶어 한다. 술, 담배 하는 것이나 기독교인들이 기호식품이나, 보양식품 등에 대해 갖는 유별난 관심은, 절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오늘날 보양식품에 관한한 기독교신자나 비기독교인 사이에 별다른 입장차이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술, 담배 등 기호식품에 통제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유별난 경우도 많다.

 

이제 음식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몇 가지 정리해 보자.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식물은 거룩하다 하였고(막 7:19) 예수님도 이 문제에 관한한 관대하신 듯하다. 하나님이 지은 것이 모두 선하다고 하였다(딤전 4:4). 하지만 우상에 바친 제물이나 목메어 죽인 것과 피는 금하라고 하였다(행 15:20). 목메어 죽인 것이나 피도 우상제물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렇다고 나머지 모든 음식에 대해서 성경이 무절제하게 권하지는 않는다.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은 비록 아니지만(고전 8:8) 우리의 자유함이 혹시라도 약한 자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면 형제를 실족치 않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고전 8:9-13).

 

결론적으로 기호식품 정도라면 섭생에 있어 죄책감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보양식품이나 혐오식품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능하면 절제가 요구된다. 예수님도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값비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마 그런 보양식들은 가까이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주로 세상의 연약한 자들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대부분 보양식들은 서민의 손길을 떠난 고급식품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마지막에 절제를 두신 이유를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코로나19도 결국 보암직도하고(?) 먹음직한(?) 것에 대한 낯선 탐욕이 시발점이었음을 기억하자.

 

 

Ⅶ. 나가면서

 

레위기 11장과 관련하여 사도행전 10장의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한 것들은 분명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정하고 가증한 것들이었다. 베드로는 한 번도 이들 규례를 어긴 적이 없었다(행 10:14).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어찌 속되다 할 수 있느냐(행 10: 15)는 음성이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다(갈 3:13). 은혜의 시대에 율법적 잣대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이 환상을 통해 히브리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가증한 것들을 함부로 먹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유리하며 살던 이방인에게도 참 빛이 비추인 것이다.

 

그렇다고 레위기 섭생법이 은혜 시대 이방인과 관련된 유비적 모형이라고 결론짓고 단순하게 판단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코로나19는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레위기 섭생법은 구약 시대 유대인들에게 있어 지속적으로 준수되어 왔고 지금도 코셔(Kosher)로 잔존해 있는 법이다.

코로나19로 이제 인류는 팬데믹(pandemic)과 더불어 문명 대전환의 특이점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환경은 준비과정이나 대처할 겨를도 없이 인류 앞에 불쑥 다가 왔다.

 

​1950년, 천재 철학자 러셀은 20세기 말에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성을 예측한 적이 있다. (1) 세상 모든 생물의 멸절 (2) 지구 인구가 격감하고 야만의 상태로 회귀함 (3) 모든 전쟁 무기를 독점하는 단일 정부에 의한 세계 통일 정부 등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세계적 인물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받지 못한 노벨상까지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냉전 시대를 살았던 이 천재 철학자의 예언 비슷한 이 예측들은 21세기가 지난 지금 살펴보면 결국 조금도 들어맞지 않았다. 사실 러셀의 이 같은 예측은 호킹이 21세기를 사는 신앙 없는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주장을 편 것처럼, 20 세기 중반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예측이었기는 하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러셀은 자신이야말로 역사를 선도하는 사상가라는 자부심이 분명 있었다. 그런 자신감으로 자신의 결정론적 격률(?)에 따라 역사를 예측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측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그도 그렇게 그저 평범한 인류보다 조금 나은 사상가였을 뿐이었다. 천재 과학자들도 선지자가 아니요 결국 미숙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정치인의 말이라면 결정론처럼 추종하는 대다수 우리 민족의 어리석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인간이 가진 미숙함과 한계점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 같은 팬데믹을 조금이라도 예측한 학자는 있었을까? 인류 미래에 대한 예측을 다룬 세계적 석학들의 탁월한 2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1999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서 나온 <다음 50년>(2050년 과학은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What Science will know in 2050)이고 다른 한권은 2018년 일본에서 출판된 <초예측(Super-Forecast)>이다. 한권 더 소개한다면 천재 과학자 18인이 10년 후 미래를 그려보았다는 2009년 작 <NEXT>가 있다. 이 가운데 2019코로나를 예측한 석학이 있었을까? ​오직 단 한사람 있었다! 바로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그는 퓰리처상을 받은 문명학자답게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세 가지 위협으로 (1) 신종 감염병, (2) 테러리즘, (3) 타국으로의 이주를 꼽으며 그 원인이 되는 국가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국제적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새로운 병원체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에볼라, 에이즈 바이러스가 미국 국민을 감염시켰던 것처럼 21세기는 (바이러스같은) 감염병이 국지적 풍토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유행병이 될 수 있음(팬데믹)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환경의 고안자 우리 인간은 생태 환경에 관한한 보기보다 유약하다. 영국 옥스퍼드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지능 대 확산(intelligence explosion)을 통해 AI가 인류보다 초 지능(superintelligence)을 가지게 되는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의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바이러스 가운데 오직 코로나 한 종류에도 당황하는 인류가 바이러스에 무관한 인공지능만큼 과연 지속 가능할까? 인간은 분명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세상 속에서 인간은 유한하다. 그렇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본질의 중심에는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요 1:1-9)!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다. 이 진리 속 자유와 샬롬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도전과 응전과 계몽과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인가? 코로나19는 신학에도 묻고 있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식품제조가공, Q.C 품질관리 1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