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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창조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오리겐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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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겐이 본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

  

 

▲조덕영 박사.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세상이나 인간이나 물질과 어떻게 다른가? 오리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비육체적 존재임을 세 번이나 강조한다. 육체는 피조물의 특성을 반영하는 단어다. 오리겐은 하나님을 육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소개한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빛이라고 했다고 하나님을 이 세상 태양 빛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성령을 육체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 시대인 오늘날 성령을 마치 파워풀한 존재로 여기는 만유내재신(萬有內在神)적 성령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주로 과정신학자들이나 신사도운동가,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을 파워 에너지나 불처럼 여겨 안수 행위로 신자들을 쓰러뜨리거나 '불 받으라'는 식으로 인격적 하나님이신 성령을 도구화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오리겐 시대만도 못한 미숙한 성경 해석이 여전히 통용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오리겐은 오히려 하나님을 어떤 육체라거나 육체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분은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덧붙일 수 없는 단순한 지성적 본성이시다.

 

헬라 철학의 단어를 빌리면 그분은 전적으로 유일성(唯一性, monas), 말하자면 일성(一性, henas)인 분이다. 그렇다고 오리겐이 철학의 하나님을 믿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헬라 철학이 말하는 완전한 통일성과 절대적 불변성을 가진 순수한 정신적 본질로서 우주의 만유 너머에 존재하면서 모든 만물의 영원한 창조주는 이성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물질로부터 세계를 형성하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게(Demiurge)를 믿는 헬라 철학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었다. 신은 자신의 뜻대로 우주를 존재하게 하였고 우주의 본성을 작정하고 만든 것이다.

 

 

창조에 대한 오리겐의 기독론적 접근

 

이 현상 세계를 성부 하나님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성자 로고스(Logos)로 인한 것이다. 오리겐은 창세기 1장 강해부터 창조의 기독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이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 11:27). 이 성자 하나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장자로 '지혜'와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한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힘이시며 지혜"(고전 1:24)라 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실체가 없는 존재로 여기면 안 된다. 오리겐은 요한복음 주해를 통해 오늘날 이단으로 정죄된 양태론을 부정하고 있다. 성자는 말씀이며 성부의 모상이다. 이 제 2위의 신이 물질세계를 존재하게 한 창조에 관여한 신의 아들이었다(요 1:3). 그 분이 또한 모든 사람이 구원자이다.

 

성령에 대한 오리겐의 낯선 해석

 

오리겐은 성령께서 로고스로 말미암아(through) 지은바 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성령을 아들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 오리겐이 분명 세 위격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성부가 성자보다 뛰어나고 성자는 성령보다 뛰어나다고 본 것은 삼위일체에 "위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정통 교리와 벗어난 낯선 주장인 것이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나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개념은 정통 교리가 아니다. 일종의 층위를 나눈 삼위일체론은 일종의 '종속설(Subordinationism)' 이 되어버리게 된다.

 

이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층위를 종속적 관계로 구분한 것은 공교회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기독론에 있어 아리우스(Arius)의 유사본질(類似本質)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주석』(Commentary on Hwbrew)을 통해 동일본질(homoousios)의 교리를 발전시킨 오리겐이 종속설(surbodination)로 귀착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리겐은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 성령은 성화의 은총을 베푸신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즉 거룩한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서 은혜를 받을 가치 있는 자들에게 향한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은혜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한다. 오리겐이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보는 군주신론이나 양태론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한 세 본체(位格, hypostases) 혹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속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오리겐이 신학의 한계를 보여준 인물임은 분명하다.

 

 

성경 해석에 있어 여전히 부족한 인간의 한계성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 하지만 창조 해석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난제와 다양한 해석들이 현실 속에서 충돌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사는 우리 인간의 생태적 한계 속에서 초대 교회는 당연히 지금의 우리들처럼 성경 속 선지자들이나 특별 계시의 전달자요 성경 저자로서의 사도들과 달리 그 어느 누구도 성경 계시의 해석자로서의 완벽한 인물은 없었다. 계시는 무오하나 초대 교회의 성경 해석자는 드물었고 그들 학자들은 초대 교회의 역사적 공간 속에서 미숙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신학자는 성경의 선지자가 아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받은 계시(성경)의 해석자에 불과하다.  오리겐에게서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과는 달리 그런 계시의 해석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확인하게 된다.

 

2천년 가까이 흐른 지금 우리들은 과연 얼마나 바른 성경 해석을 하고 있을까? 과연 교회와 신자들은 성경에 대해 얼마나 바르게 알고 있을까? 첨단 과학 기술 시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창조론의 일치점을 찾기는커녕 일치된 교리보다 충돌하는 영역이 여전히 적지 않음은 무슨 이유일까?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도 중요하나 인간이 많은 부분에서 보다 더 겸손해질 이유를 묵시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창조론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렇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