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의 음식 준비는 책망 받을 만큼 잘못된 선택인가?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9)
글을 시작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뒤이어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눅10:38-42)를 읽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육적인 일’(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 만드는 일)보다 ‘영적인 일’(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임을 교훈한다고 생각한다. 또 예수님도 육신적으로 자신을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라고 생각한다. 아래 소개하는 주석이 이런 생각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음식 준비와 환대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은 인생의 우선권을 재설정한다. 마리아는 복음에 우선권을 두었다. 다른 모든 것, 환대마저도 복음 앞에서는 상대화 된다.”(James R. Edwards)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눅10:38-42에 대해 “이 본문에는 행동보다 사색이 우월하다는 것이 명확히 진술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평가를 다시 설명하면 ‘마르다가 선택한 음식 장만은 기껏해야 육적인 행동에 불과하지만, 마리아가 선택한 주의 말씀 듣기는 영적인 사색을 유발하는 귀중한 것이다’일 것이다. 즉 마르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고, 마리아는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육적인 일과 영적인 일을 단순히 비교한다면, 육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과연 눅10:38-42에 기록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육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는가이다. 답은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눅10:38-42에 기록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는 육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교훈은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계시는가? 또 누가(Luke)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는가? 결론만 미리 말한다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앞서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후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말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훈의 또 다른 사례라는 말이다. 전자가 ‘이웃 사랑’의 비유라면 후자는 ‘이웃 사랑’의 실제 사건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꿈에서라도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이 자신들의 이웃임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 대한 지금의 부정적인 태도를 버리고 사마리아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고 있다면(만약 예수님이 사마리아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면, 강도 만난 자는 사마리아인으로,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으로 설정하셨을 것이다).
반면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마르다가 정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가장 가까운 이웃이 그녀의 친동생 마리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 때문에 마리아를 미워하는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시면서, “네 동생 마리아는 네가 사랑해야 할 가장 가까이 있는 네 이웃이야!”라는 교훈을 마르다에게 주시고 있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이웃 사랑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첫 번째 근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뒤이어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너무나 어색한 연결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Luke)가 어떤 신학적인 목적을 위하여 시간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뒤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연결시켰다는 말이다. 아래 눅9:51-56을 보라.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눅9:51-56)
예수님은 십자가의 때(위에서 ‘승천하실 기약’은 오역이다. ‘십자가에 오르실 때’로 번역해야 한다)가 가까운 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지름길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비협조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우회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먼 길을 택하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시기는 아마도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는 도중이었을 것이다(눅17: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다시 말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실 당시는 적어도 예수님이 유대 지역으로 진입하시기 이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36)에 뒤이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기록된 눅10: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을 보면, 예수님은 어느새 예루살렘에서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베다니의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셨다.
이 상황을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한 순간에 베다니로 순간이동 하신 것이 된다. 물론 누가(Luke)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뒤에 베다니까지 가시는 여정을 다 생략하고, 바로 베다니에서 있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기록들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기록된 눅10:38-42 이후의 기록들을 보라.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눅13:2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눅17:11)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눅18:35)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눅19: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눅19:28-29)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사마리아 지역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셨으나 사마리아인들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다른 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시작하셨다(눅17:11). 도중에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셨고(눅10:1), 갈릴리 지역 어떤 곳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눅10:30-37).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에서 30km쯤 떨어져 있는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한 맹인을 만나 그의 눈을 뜨게 하셨다(눅18:35-43).
그 후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에서 3km쯤 떨어져 있는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으며(눅19:28-29), 얼마 쯤 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눅19: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그러므로 눅10:38-42에 기록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 한참 후에 베다니로 가셨을 때 예수님이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든지, 아니면 다른 때(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 예루살렘에 3번 이상 방문하셨다)에 마르다의 집에서 있었던 일일 것이다.
따라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바로 연결되어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누가(Luke)가 어떤 신학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간적인 어색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로 뒤에 배열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가(Luke)는 왜 이런 시간적인 어색함을 각오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로 뒤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배열한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동일하게 “이웃 사랑”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눈치 채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눅10: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오늘날의 교회들처럼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는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먼 이웃에 대한 사랑)와 동일하게 ‘이웃 사랑’(가까운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한 교훈임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으로 이해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석일 수밖에 없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영적인 말씀 듣기’가 ‘육적인 음식 만들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는 두 번째 증거는 분문 39절에 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앉아”로 번역된 “parakaqesqei/sa”(파라카데스데이사)는 “parakaqe,zomai”(파라카데조마이/sit)의 ‘수동태’이다. 이는 마리아가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스스로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앉혀졌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자원해서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주의 발치에 앉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주의 발치에 앉혀져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앉아”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 “parakaqesqei/sa”(파라카데스데이사)로 묘사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마리아는 스스로 먼저 “주의 말씀을 듣는 영적인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언니는 음식 만들도록 두고, 너는 내 발치에 앉아 나의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을 때, 마리아가 그것을 거절하고 “나도 언니와 함께 음식 준비를 할래요”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만약 마리아가 그랬다면 아마도 예수님을 향한 마르다의 불평 섞인 투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에 의해 주의 발치에 앉혀져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마르다는 어리석게도 음식을 만드는 육적인 일을 선택했고, 마리아는 지혜롭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영적인 일을 선택했다고 이해한다면, 마르다가 육적인 일을 선택한 책임이 예수님께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당시 상황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보다 말씀을 듣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당연히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마르다를 마리아처럼 자신의 발치에 앉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마르다를 주방에 그대로 방치한 채, 마리아만 자신의 발치에 앉혀서 말씀을 듣도록 한 것은 예수님의 명백한 실수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실수로 벌어진 일을 놓고, 마르다가 음식을 장만하는 일을 택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책망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갑질’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몰상식하게 ‘갑질’이나 하실 분은 아니지 않는가?
앞으로 필자가 밝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의 핵심 교훈을 미리 말하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잘 대접함으로써 예수님께 칭찬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자신의 음식 만드는 일에 집착한 나머지 음식을 준비하는 자신의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친동생 마리아를 놓쳐버렸다”가 될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 이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멀리 있어서 이웃을 놓친 유대인들의 슬픈 이야기라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칭찬받고 싶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가족)을 너무나 쉽게 놓쳐버리는 유대인들의, 아니 우리 모두의 슬픈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르다, 가장 귀중한 자신의 참 이웃인 친여동생 마리아를 놓치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38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르다가 살고 있는 베다니 마을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들어가신 것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일행을 집으로 초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초대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식사 초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38절에는 마리아는 없고, 마르다만 등장한다. 특히 누가(Luke)는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라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마리아와는 별 상관없이 마르다의 일방적인 의사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굳이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가 마르다임을 누가(Luke)가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일에 마리아는 별 상관이 없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나중에 마르다가 예수님을 향해 마리아가 자신의 음식 장만하는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는 불평이 정당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한 가지 장치가 될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발치에 있던 마리아가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언니를 도와준다면, 마르다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그러나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할 때 마르다는 동생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르다는 혼자 음식을 장만해서 예수님을 대접함으로써 혼자 예수님의 칭찬을 들으려고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수준 이상의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혼자 감당이 되지 않으니까 괜히 마리아를 탓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다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한 마리아를 탓할 수는 없다. 39절을 보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절)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주도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했다(38절). 마르다의 집에 오신 예수님은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는 일, 즉 자신이 좋은 편을 택한 것을 존중하셔서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도록 그냥 두시고, 마리아에게는 자신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도록 제안하셨다. 이때 마리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말씀 듣는 편을 택하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을 털어놓았고, 예수님은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견해를 간단히 요약하면,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 제 좋은 편을 택하였고,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제 좋은 편을 택했으니, 마르다는 마리아가 택한 것을 놓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두 자매가 택한 ‘음식 장만’과 ‘말씀 듣기’에서 어느 편이 더 낫다는 예수님의 편견은 없으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39절에 나오는 “발치에 앉아”라는 표현을 좀 더 눈여겨 보이야 한다. 왜냐하면 “발치에 앉았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발치에”로 번역된 “tou.j po,daj”(투스 포다스)는 행22: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문하에서”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눅10:39의 “발치에”와 동일한 “tou.j po,daj”(투스 포다스)이다. 따라서 행22:3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를 눅10:39처럼 다시 번역하면 “가말리엘의 발치에서”가 될 것이다.
마르다는 분명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지만(그러나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자였다면 마르다도 예수님의 제자였을 것이다), 눅10:39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임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리아를 자신의 발치에 앉게 하시고 말씀을 들려주신 것은 마리아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권리이다. 또 마리아가 자신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은 것도 예수님의 제자인 마리아의 권리이다. 동일하게 마르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것도 마르다의 권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 볼 때,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마리아의 행동은 파격적이다 못해 집안의 수치로 여길 수 있을 만큼 눈살을 찌푸릴 일이었다는 데 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문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로 유대 사회는 여자들을 무시했다. 그러므로 유대인 랍비들이 여자를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여자들이 그냥 멀리서 랍비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도 금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의 관습은 남자들의 공간과 여자들의 공간을 철저하게 구별했다. 그래서 성전 뜰도 남자의 뜰과 여자의 뜰을 담으로 막아놓고, 여자들은 남자의 뜰 안에 들어올 수 없게 했다. 이런 관습은 사적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여자들은 남자들의 공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기서 특별한 일이란 여자들이 남자들의 음식 시중을 들거나 심부름 등을 해야 할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여자들은 빨리 자신의 할 일을 하고서는 이내 남자들의 공간에서 물러나야 한다. 굳이 여기에 예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이나 아주 나이가 어린 소녀들, 그리고 창녀들이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그렇다 손 치더라도 지금 마리아 혼자서 제자들이 있는 남자들의 공간에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어쩌면 마르다에게는 가문의 수치로 여길 만큼 기분 나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의 남녀 불평등의 인간의 관습을 뒤로 하시고,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으시고 가르치셨으며, 또 여자들과 친구가 되셔서 함께 어울려 다니셨다. 마르다의 집에서도 예수님은 마리아를 남자들의 공간에 부르셔서 자신의 발치에 앉게 하시고 그녀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마르다, 스스로 만든 자기 함정에 빠지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40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 너무 많아 마음이 대단히 분주했다. 여기서 마르다가 얼마나 분주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어가 바로 “분주한지라”로 번역된 “periespa/to”(페리에스파토)이다. 이 단어의 원형 “perispa,w”(페리스파오)는 “주변”을 의미하는 전치사 “peri,”(페리)와 “끌다, 당기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spa,w”(스파오)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사방에서 끌어당기다”이다.
그러므로 “perispa,w”(페리스파오)의 ‘과거 수동태’인 “periespa/to”(페리에스파토)는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디에 급하게 이리저리 끌려 다닐 때의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하나 든다면, 어떤 사람이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면서 이쪽 불에서는 된장국을 끓이고, 저쪽 불에서는 프라이팬 위에 파전을 부치고, 또 중간에 있는 불에서는 생선을 굽고 있으면서 또 도마 위에서는 양파를 썰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한참 파를 썰고 있는데 프라이팬 위에 있는 파전이 탈 것처럼 연기가 난다. 이 사람은 바로 파전이 있는 쪽으로 급하게 끌려간다. 그러자 저쪽에 있는 된장국이 끓어 넘친다. 이 사람은 또 넘치고 있는 된장국 있는 쪽으로 급하게 끌려 가버린다. 그때 또 굽고 있는 생선에서 타는 냄새가 난다. 이 사람은 또 그쪽으로 잽싸게 끌려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선 굽는 곳으로 가다가 도마를 건드려서 썰던 양파가 바닥에 쏟아지고 말았다. 이 사람은 또 바닥으로 급하게 끌려가 버리고 만다. 바로 이런 정신없는 상황이 40절의 마르다가 처해있는 “periespa/to”(페리에스파토/분주한지라)의 상황이다.
마르다는 이렇게 정신없이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다가 건너 편 남자들의 공간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마리아가 언니의 분주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예수님도 마리아도 자신이 힘들게 음식 준비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갑자기 마르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법한 마르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마르다의 입장에서 볼 때, 시장하실 것이 분명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서 빨리 잡수시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과 마리아는 태평하게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는 것 같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마르다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자신의 발치에 앉히신 예수님에게 먼저 불평을 토로한다. 40절 후반부를 보라.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40절)
지금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무라듯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40절은 마르다가 음식 만드는 귀중한 일을 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와주라고 하셔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예수님이 마리아를 붙들어 두고 계시니 ‘너무하지 않습니까?’라는 투의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순히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보면, 마르다의 불만 섞인 나무람은 이해할 만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음식 장만에 동생 마리아가 도와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데,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유대인 관습에서 금기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즉 남성 구역에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잘못을 범하고 있는 자는 예수님도 마리아도 아닌 바로 마르다였다. 물론 마르다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마르다는 지금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 걸까? 마르다의 가장 큰 잘못은 그녀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로는 자신의 화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또 설령 예수님이 실수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라도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나무라는 투의 말로 불평을 늘어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 행10:14을 보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행10:14)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셨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는 “그럴 수 없나이다”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 이때 베드로가 부른 “주”는 사실상 그에게 진짜 주님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진짜 주님이셨다면, 베드로의 “그럴 수 없나이다”의 반응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진짜 “주”였고, 베드로가 그 하나님을 진짜 “주”로 부른 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는 “그럴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순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귀중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왜 놓치고 만 것일까? 그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의로움의 크기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되심을 놓친 것처럼, 마르다는 많은 음식 준비로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놓치고 만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가 지금 겉으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자신의 명예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이 순간에는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이 더 커보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심을 놓친 것이다.
마르다가 저지른 두 번째 잘못은 영접(대접)하는 자보다 영접 받는 자가 잔치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놓친 것이다. 마르다는 영접 받는 자 기쁨보다는 영접하는 자신의 욕망대로 많은 음식을 준비하려고 함으로써 자신을 흡족하게 하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음식 준비가 자신의 뜻대로 잘 되지 않자, 흡족하게 해 드려야 할 영접 받는 자(예수님)를 오히려 나무라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마르다가 저지른 세 번째 잘못은 공로를 세우려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할 자신의 여동생 마리아를 오히려 미워한 것이다. 마르다는 음식 장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귀중한 자신의 여동생 마리아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음식 장만보다 하찮게 여기고 미워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절)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의 불평의 원인을 지적해 주신다. 여기서 “염려하고”로 번역된 “merimna/|j”(메림나스)는 과도한 욕구, 즉 탐심으로 인해 생긴 분열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 분열된 마음 상태에서 염려하고 근심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영접하는 자가 영접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거기에 투영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자가 영접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아 준비해야 하고 더 특별한 것을 준비해서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쁘고 즐거워야 할 영접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영접하는 자에게 염려와 근심할 일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불평의 원인이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염려와 근심”임을 지적하시고 난 뒤에 그녀의 잘못을 친절하게 교정해 주신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절)
예수께서 말씀하신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의 의미는 ‘네가 나를 대접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염려와 근심하는 대신에, 네가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몇 가지 음식, 혹은 한 가지 음식만 준비해도 나는 충분하다’이다. 지금 예수님은 마르다가 선택한 음식 장만 자체는 인정하고 계신다. 단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말씀으로 칭찬을 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려고 함으로써 염려와 근심을 자초하고 있는 마르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실 뿐이다.
마르다는 처음부터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는 욕망 대신에 순수하게 영접 받는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했다면, 많은 음식 대신에 자신의 능력에 맞게 몇 가지. 혹은 한 가지 음식을 즐겁게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마르다는 예수님과 마리아에게 불평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님도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 마르다를 칭찬하셨을 것이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절)
위 본문의 “편을”로 번역된 “meri,da”(메리다)의 원형 “meri,j”(메리스)는 “몫”(portion, share)이라는 의미로, 마리아의 당연한 권리를 말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42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마리아가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너에게 빼앗길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좋아서 선택한 말씀 듣기는 마리아의 몫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빼앗기지 아니하리라”(ouvk avfaireqh,setai/우크 아파이레데세타이)는 수동형으로 ‘주어’인 마리아를 강조하심으로써, 마르다 자신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권리도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귀중한 것임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 강조는 마르다에게 ‘네 동생의 권리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언니인 네가 네 동생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는데, 너는 오히려 네 욕심 때문에 네 동생의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지금 마르다가 좋아서 선택한 음식 준비의 마르다의 몫(권리)과 마리아가 좋아서 선택한 말씀 듣기의 마리아의 몫(권리)을 비교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마르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네가 좋아서 지금 하고 있는 음식 만드는 일은 네가 택할 수 있는 귀중한 권리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좋아서 지금 하고 있는 말씀 듣는 일도 마리아가 택할 수 있는 귀중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너는 네 권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네 동생의 귀중한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있어서 당연히 원수처럼 여기고 있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서 너무 멀리 있는 그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는 사랑해야 할 주변의 이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는, 그래서 더욱 더 사랑해야 할 나의 부모님, 형제와 자매들, 아내와 자녀들에게 오히려 내가 이들의 귀중한 권리를 마음대로 침범하고, 때로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들을 미워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했던 바보짓들을 우리는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게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 가를 철저하게 질문하면서 롬12:9-13을 통해 우리 함께 도전받자!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9-13)
이창모 목사는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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