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심판주 하나님 계시
▲조덕영 박사. |
죄와 심판 계시의 역설
구속 계시의 선행 계시로서 심판주 하나님은 주로 죄와 종말에 관한 예수의 계시 가운데 나타난다. 영원한 빛과 영원한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죄의 어두움과 두려움과 영원하지 못한 생명과 유한한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부터 올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으로 가기 위한 역설적 은혜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친다(롬 5:20).
어거스틴이 말한 '죄가 복되다' 할 수 있는 역설적 '펠릭스 쿨파'(felix culpa)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인간은 죄와 종말이라는 어두움 속에서 오히려 빛을 소망한다. 이것은 모두 자연 계시 안에 있는 소망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일반 계시의 영역은 비로소 특별 계시 속 구속의 언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애증의 이름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애증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이름이기는 하나 주로 마태복음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볼 때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들을 다스릴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였다(마 2:6). 예수는 중풍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을 따라 그 집 하인을 고쳐주기를 원했으나 백부장은 예수에게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치유해 주기를 간구한다. 예수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 힘든 믿음이라고 칭송한다(마 8:10).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마 8:12). 예수의 이 계시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세속적 명칭에 담긴 계시적 역설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 역사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약속과 희망의 역사인 동시에 거룩한 예루살렘에 입성한 메시야를 처형한 민족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은 특권과 특별한 은총을 지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인 동시에 그렇게도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회개를 촉구하였음에도 모든 것을 외면하고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온(마 15:24) 예수를 버렸다. 이스라엘은 메시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백성들이요 약속을 주고 율법을 주고 선지자를 보내고 양자의 특권을 주었으나 예수를 버린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그들은 '먼저 포도원에 들여보낸 자들이요'(마 20: 2), '일하러 가지 않은 맏아들 같은 자들'(마 21:28 이하)이요 '집주인이 포도원을 맡기고 떠난 농부들(마 21: 33 이하)이요, '임금이 혼인 잔치에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마 22:1 이하)이었다. 그들은 약속 아래 있으며 약속을 지켜야만 하는 자들이었다.
예수 치유의 본질 죄사함
배로 건너간 본 동네에서 예수는 치유 받기 위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만났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향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 3)고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예수 표적 치유의 특징인 치유와 죄사함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사역 시기 동안 무리 중에서 예수께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사해 달라고 청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는 자신이 심판자임을 단호하게 보여준다. 중풍 병자에게 예수는 치유와 동시에 죄 사함의 선물을 내린다. 공개적으로 죄를 사한 첫 번째 경우였다(마 9:1-8; 막 2:1-12; 눅 5:17-26). 이제 누구나 중풍 병자처럼 예수께 나아오면 심판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그들에게 약속된 이스라엘의 메시아, '유대인의 왕' 예수가 왔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심판자(예수)를 심판하러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설이다. 이 치유 사건에 대해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르되 예수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했다. 예수는 이들 마음 속의 악한 생각을 아셨다(마 9: 3-4). 심판자를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예수의 탄식은 이스라엘의 고을 "고라신, 뱃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책망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고라신, 뱃새다"는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이요 가버나움의 교만은 소돔보다 더 한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마 11: 21-24). 오히려 소돔성 사람들이 예수의 권능을 보았다면 소돔성이 심판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예수는 강론하였다(마 11: 23-24).
예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은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준 사역에서 절정에 달한다. 바리새인들은 "귀신이 왕 바알세불을 힘 입지 않고는 귀산을 쫓아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마 12:24). 이 계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아는 게 아니었다(마 11: 25). 오히려 이 계시를 깨닫는 자는 어린아이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믿는 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채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이었다. 구속 계시의 은총을 입는 자들은 자연 은총 가운데 율법과 윤리적 삶 속에서 가난하고 연약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낮은 자들이었다.
율법을 초월한 사랑(구속 계시)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의 계시는 율법조차 초월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에 대해 예수에게 항의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이 안식일 밀 이삭을 먹은 일에 대해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다윗과 그 부하들이 먹은 사무엘서'의 내용(삼상 21: 6)을 토대로 자신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마 12:7) 자신 곧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임을 계시한다. 하지만 표적을 통해 시비 거리를 찾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가 보여주는 표적은 집합 명사를 사용하여 "이 세대"(마 12:41)에 대해 심판을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마 26: 63)를 심판한 것은 그 절정이었다.
예수를 심판하듯 심판자를 심판하는 일이 세상사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이 있던가! 예수의 자연 계시는 이렇게 심판자가 심판 받는 골고다 십자가 심판처에서 우주 역사의 클라이막스를 이루었다. 마가도 예수님의 공판과 처형 사이에 있었던 조롱의 대관식(막 15: 6-15, 16-20, 21-32)을 통해 심판의 역설을 보여준다. 이렇게 복음의 비밀은 은밀하다. 마가는 단 한번 사용된 이 은밀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막 4:11)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는 일반 비유의 계시 속에서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막 4: 11-12) 하는 비유 속의 비밀이 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렸다. 복음의 비밀을 모르는 자들에게 심판은 이렇게 올 것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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