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자연 계시로서의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는 기독론은 늘 기독교 조직신학의 중심부를 이루어왔다. 그것은 기독교 구속신학이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문제는 기독론의 핵심을 이룬다.
먼저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에서 그 신성을 찾는다. 그 명칭은 주로 복음서 기자들이 소개한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God, 요 1:1; 20:28),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마 16:16; 26:61-64; 요 10:36), '주'(Lord, 마 22:43-45)라는 명칭이 바로 그렇다. 이 명칭은 요한계시록에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또는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전능한 주 하나님이신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나중, the first and the last)로 묘사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복음서의 예수는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이나 '주'(主)라고 칭한 적은 없었다.
다만 사도 요한의 언급(요 1:1)과 사도 도마의 고백(요 20: 28)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임을 드러낸다. 사도 요한은 말씀(logos, 요 1:1)이 곧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고 묘사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심 많은'이는 수식어를 동반하는 도마는 예수에 대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도 중 최초의 고백을 통해 그가 다른 제자들과 다른 깊은 믿음의 성찰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제자 베드로의 고백(마 16:16)과 대제사장의 추궁(마 26:63) 그리고 예수 스스로 하나님을 빈번히 아버지라 칭함과 예수 스스로의 계시(요 10:36) 속에 나타난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요 소유주로 참 그리스도인의 '구주'인 '주님'에 대해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강론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온 '주'(主)가 누구인가에 대해 분명히 언급한다(마 22: 41-45). 그 주(主)는 물론 예수였다. 예수의 이 같은 강론은 바리새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준 언급이었다. 그러나 이 고백을 그대로 분명히 믿음으로 수용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놀랍게도 사도 도마였다(요 20:28).
예수의 이적이 말하는 것
예수는 스스로 '내가 창조주다'라는 식의 공표는 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신성을 가진 존재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 같은 계시를 표적의 책인 요한복음을 통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표적'이란 어떠한 현상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가시적인 표시이다. 요한복음에서 17번 사용된 '표적'이란 단어 중 11번이 예수의 이적이었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주로 예수의 구원사역을 알려주는 계시적 기능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공생애 첫 사역의 처음 표적은 갈릴리 가나에서 행한 창조 기적이었다. 즉 혼인에 청함을 받은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를 방문하여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 돌항아리 6개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우게 하고 그 물을 떠서 잔치집 연회장에 포도주를 공급한다. 이 처음 표적은 요한도 설명한 것처럼 잔치집이나 갈릴리 가나나 혼인에 초점이 맞춘 표적이 아니었다. 이 표적은 오직 예수의 지시 속에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있다. 포도주는 효모(酵母)라는 미생물에 의해 포도 속에 있는 당(糖) 또는 다당류(多糖類)가 포도당으로 변한 다음 에탄올(C2H5OH)과 이산화탄소(CO2)로 분해하는 발효 현상 가운데 생기는 부산물이다.
필자는 목회자 이전에 발효 현상을 공부한 사람이기는 하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상식적으로나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볼 때 물(H2O)은 절대로 포도주가 될 수 없다. 즉 이 표적은 누군가 트릭을 사용한 마술이든지 아니면 하나님만이 가능한 창조 사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 처음 표적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요 2:11)을 나타낸 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 계시를 넘어 구속사역을 향한 접촉점으로서의 예수의 치유 사역
예수는 이 표적 이후로 여전히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을 지속한다. 이것은 주로 치유의 기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때로는 풍랑과 같은 자연을 다스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통한 창조주의 사역을 여전히 보여준다. 물론 이것들은 표적일 뿐이다. 창조주로서의 표적은 사실 "포도주 이적" 한번이면 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예수의 기적과 계시가 끊임없이 창조 사역과 연결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인류 구원을 향한 치유와 기적의 역사와 계시가 결국은 창조 계시, 창조 사역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접촉점을 가지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표적이 아닐 수 없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생명"과 "빛"과 "생수 또는 물" 등이 죽음과 흑암으로부터의 재창조 사역, 즉 영생의 구속 사역으로 가는 매개체요 도구요 비유로 제시 된다.
예수 비유에 피조 세계의 사물들(생명, 빛, 생수 등)이 유비의 제한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동원된다. 그것은 복음서의 저자들 뿐 아니라 예수께서도 친히 사용하는 유비였다. 예수는 이 창조 계시, 자연 계시를 구속 계시의 접촉점으로 부단히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자연 계시가 단순한 자연 계시와 자연 신학에 그치지 않고 구속 계시로 연결하는 사역임을 말해준다. 그때 비로소 자연 계시는 이신론(理神論)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적 창조주 하나님 계시로 나아간다.
영적 계시로서의 창조 계시의 권능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영적 존재들도 피조 된 존재들이라고 설명한다(골 1:16). 4복음서는 모두 이들 영적 존재들인 사단과 귀신의 존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 사탄은 32회 가운데 14회 복음서에서 언급되며 귀신은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행, 고전 딤전, 약. 계) 성경에 11회 언급된 가운데 복음서에는 100여 회가 넘는 빈도로 등장하고 있다.
사도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이들 영적 존재의 창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사탄과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 있음과 더불어 그들도 예수 자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적 존재인 사탄과 귀신에 대해 예수는 인격을 가진 그들과 대화한다. 물론 그들이 예수의 사귐의 대상은 아니었다. 예수에게 사탄은 꾸짖어 쫓아낼 존재요(막 8:33) 귀신도 악하고 더러워 추방해야 할 존재였다(마 12: 43, 45). 예수는 십자가 죽음과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예언한 가르침에 대해 예수께 항변하며 이 같은 일이 예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던 제자 베드로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로 책망하였다.
또한 '사탄'은 제자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요 13:27). 그렇게 복음서의 예수는 인류 타락과 죄와 불순종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 그 전모를 파악하기 결코 쉽지 않은 심각한 영적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계시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자연 계시를 통해 의인 욥의 고난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존재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한다(욥 1-2장 참조). 심지어 하나님은 욥기 41장에서는 '사탄'이라는 언급을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리워야단'이라는 동물(자연 계시)를 통해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사탄에 대해 암묵적 계시를 하고 있다. 욥이 깨닫고 회개하고 은혜 받고 복 받은 것은 구속 계시가 아닌 놀랍게도 모두 70여 가지에 달하는 속사포 같은 하나님의 자연 계시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만하고 군림(소위 '갑질')하는 자는 베드로나 가룟 유다처럼 '사탄'의 도구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나가면서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요 기독론의 중심이다. 예수의 자연 계시가 자연을 초월함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의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 역시 말씀과 하나님의 영 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우주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두 손이라고 표현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언급한다. 그런데 20 세기 들어 오스카 쿨만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를 구속사(Heilsgeschichte) 내에 묶어두려는 의도적 시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애써 숨기려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임을 언급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골 1: 15-17).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신학 > 조직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예수의 심판 계시와 종말 계시 (0) | 2021.02.15 |
---|---|
심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의 계시 (0) | 2021.02.12 |
카발라 창조론의 주요 저작들과 개념들 <유대교 랍비들의 카발라 사상이란 무엇인가?, 2> (0) | 2021.02.07 |
‘유신진화론 비판과 성찰’에 대한 논평 (0) | 2021.02.01 |
악에 대해 선지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모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 (0) | 2021.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