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진화론 비판과 성찰’에 대한 논평
*본고는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지난 6월 3일(금) 온누리교회에서 개최한 <창조론이냐 유신론적 진화론이냐> 발표회에서 이은일 박사(창조과학회 회장)가 발표한 내용에 대한,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의 논평이다. 발표 특성상 지면 제한으로 일부 누락됐던 내용을 보강하였다.
1. 논평을 시작하며
기독교는 초월(超越)과 내재(內在)가 역동적으로 소통하는 종교다. 창조과학은 주로 내재의 재료를 가지고 초월의 창조를 증거하려는, 과학도 중심의 신앙 학문이다. 창조과학은 과학 기술이 국내 산업화를 주도하며 과학을 등에 업은 무신론적 진화론이 한국 사회 주류를 형성하던 시대에, 보수 기독 과학자들이 창조신앙을 수호하며 기독교를 옹호하는 험증(驗證)적 운동의 상징적 위치를 확보한 면이 있다. 필자는 그런 창조과학 전성기(?)에 창조과학회 대표간사로 몸담았던(1984-1997) 신학자로, 논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비록 짧지만 보다 신앙과 신학의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 권면하고자 한다.
2. 논문 내용
창조과학회 회장을 맡은 이은일 박사는 본 논문에서, 일련의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논증되어 온 '진화론에 대한 비판적 경향'을 잘 정리하고 있다. 다만 이번 이 박사 논문이 다른 점은, 자연주의 진화론이 아닌 "유신진화론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유신진화론 진영의 대표적 인물로는 서울대 우종학·장대익 교수, 그리고 바이오로고스연구소의 칼 기버슨을 꼽았다. 유신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초월적 창조가 아닌 자연과학적인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셨다"며 "기독교 창조 이론이 다양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비판을 위해 다음의 세 가지 논증을 시도한다.
(1) "초월적 창조를 과학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주로 '빅뱅 이론'과 '대표적 유신진화론자인, 게놈 프로젝트를 수행한 프랜시스 콜린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유신진화론자들이 초월적 창조론을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간격의 하나님)"이라고 비웃고 있으나 과학이 발전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음을 실감하며, 성경 외 어떤 기록에서도 "무에서의 창조" 개념은 발견되지 않음을 주목한다. 따라서 초월적 창조를 인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오만을 버릴 것을 역설한다. (2) 진화론이 과학이기 때문에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적 자연주의는 수용하고 자연주의 철학은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화론의 허구를 감추고자" 한다고 본다. 또한 창조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재현 가능한 실험과학"과 "재현 불가능한 역사과학" 영역으로 나누고 있음을 소개한다. 즉 진화는 재현 불가능하므로, 실험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진화의 용어가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 기원으로서의 진화를 구별하지 않는 모호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3) 마지막으로 생명체의 다양성과 환경에 대한 반응이 진화의 증거라는 주장에 대해, "종의 분화"는 진화가 아니며 인종의 다양성 또한 진화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결론으로 최근 나노과학이 발전하면서 진화론이 "자기 조립" 개념으로 진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나 이는 정보 패턴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물질 창조 이전에 "정보"가 먼저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이 과학임을 강조하면서, 유신진화론을 반대하면 과학을 거부하는 사람인 것처럼 공격"하지만 창조론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목적을 분명히 해 주는데, 곧 하나님의 질서를 탐구하면서 인간 범죄 이후로 손상된 질서를 바로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3. 평가와 권면
1) 논문 내용에 대해: 신앙의 <과학>도 결국 신학이다
본 논문은 유신진화론에 대한 창조과학의 시선을 잘 정리했다. 그런데 신학자 스탠리 그랜츠는 "모든 사람은 신학자"라 했다. 무신론자도 신을 믿지 않는 신학자인 것이다. 즉 나쁜 신학과 좋은 신학, 미숙한 신학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창조과학도 신학적 입장을 갖는 신학인 것이다. 이 박사는 본 논문에서 3명의 대표적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장대익 교수는 유신진화론자라기보다 이제 자연주의 진화론자로 보인다. 우종학 교수와 칼 기버슨은 자기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들이다. 필자는 생물진화에 당연히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우연주의자가 아닌 창조론자라는 것을 전제할 때, <창조론이냐 유신진화론이냐>라는 관점이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본다. 전제가 잘못되면 논증이 초점을 벗어나면서 미숙한 신학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유신진화론이 "초월적 창조를 과학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는 비판은, 자칫 창조과학에 그대로 적용될 수도 있다고 반박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 박사께서 진화의 용어가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 기원으로서의 진화를 구별하지 않는 모호함을 지적한 점은 옳다. 이제 생화학적·생물학적 진화론과 분리하여 우주기원론, 변이, 변천, 변화, 발전, 발달, 진보, 진전, 프로세스 등의 단어로 대치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단순 비판보다 과학과 신앙의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가진 학자들과 교류와 대화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2) 창조 신앙에 대해: 창조론 변증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이 본질이다
초월 계시인 창조를 아래에서부터의 내재적 자료로 증거한다는 것은 논리적 제한성을 갖는다. 본질적으로 유한은 무한을 담는 데 한계가 있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대중을 상대로 창조과학으로 계시를 계몽한다는 생각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창조사관이 타 유일신 종교나 서구의 진화론적 직선사관과 결코 공존할 수는 없다. 성경적 창조사관은 역사의 진정한 주권자인 성삼위 하나님의 "하나님 연대(年代)"로 역사를 조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구주 예수 안에서 "통일성과 다양성"(unity in diversity)의 긴장에 대한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필요로 한다. 지구 연령과 '창조의 날'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개혁신학 교단들인 OPC(Orthodox Presbyterian Church)나 PCA(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가 목사 안수와 결부하여 2000년대 초기 발생한 '창조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 사이의 치열한 연구와 제언에서 가능한 5가지 창조 이론("일상적인 하루의 날, 날 세대, 문예적 틀, 유비적 날, 미확정된 기간의 날")을 모든 복음적 견해로 수용한 것은, "반드시 일치해야 할 것들은 규명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주 예수의 사랑으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지혜를 보여 준다. 인간의 창조 해석은 '아디아포라'(adiaphora)인 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엄'(Magnalia Dei)이 본질인 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하). 창조에 대한 전문학자 간 다른 이론이 복음주의와 개혁신학 내부에 공존함을 이해하고, 우리 안에 발생 가능한 비방과 분열을 절대적으로 막아 서로를 품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이미 시간이 초월의 관점에서는 무의미함을 증거하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3) 창조 섭리에 대해: 창조 변증 못지않게 중요한 '창조 섭리에의 협력(concursus)'
창조를 단순 증거하는 측면이 제한적인 반면, 창조 섭리의 동반자로서 과학 기술의 적응과 적용성은 넓어진다. 크리스천 전문학자들은 하나님의 보존(conservatio)과 통치(gubernatio) 속에 다양한 방식의 협력(또는 동행, concursus)으로 문화와 선교 명령에 동참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기독 전문가들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이 될 수 있다.
4) 성경 해석에 대해: 성경은 <과학적 관점>의 특정 계층이 아닌, 모든 인류·역사에 적응된 책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관점에서 서술된 역사적 종교요 진리요 계시다. 과학적 관점의 언어로 과학적 관심에서 기록된 책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인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 원리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특정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닌, 지극히 작은 보통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적응'(accommodation)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 원리를 귀담아 들었으면 한다. 즉 성경은 과학과 관심이 다른 책이다. 예를 들어 칼빈이 "홍수 이전에는 무지개가 없었다는 일부 주장은 경솔한 것"이라고 말해도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자신의 카테고리 안에 묶어놓는 우를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 시대의 논리로 창조 계시를 수정한다면 근대과학이 시작된 17세기 이전 창조 해석은 모두 그릇된단 말인가?
5) 과학과 신학에 대해: 유신진화론자들과도 신앙 안에서 서로 토론하고 논증해야 한다
성경이 초월 계시인 반면 과학은 반증 가능 학문이다. 즉 과학 이론은 늘 유동적이다. 우리가 진화론을 비판하더라도 유신진화론자들을 초월을 부정하는 자로 몰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제 창조과학도 유신진화론자들의 견해를 비판은 하되 복음 안에서 귀담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경무오론의 위대한 장로교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나 게놈 프로젝트의 프랜시스 콜린스, 과학과 신학에 모두 능통한 아서 피콕이나 알리스터 맥그라스, 존 폴킹혼, 존 호트, 존 맥커리, 토마스 토렌스 같은 학자들이 왜 유신진화론자이고, 다수의 지적설계 지도자들이 부분적으로 진화론에 동의하고 그 선봉장 마이클 비히나 윌리엄 뎀스키도 자신들이 '어떤 면에서 진화론자'이고 '예정된 진화론자'라고 하는지 귀 기울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반창조론 활동에 적극적 반론을 편 것도 창조과학이 아닌 알리스터 맥그라스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6) 마지막 권면
창조과학의 열심과 열정은 충분히 존중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입장이 아닌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양승훈 박사나 필자가 전혀 진화론자가 아니며, 그것을 증거하는 양 박사나 필자의 글과 논문들 수천 편이 인터넷에 그대로 공개되어 있음에도, 진화론자로 밀어붙이며 징계하려 한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필자가 지적설계와 창조과학은 다르다고 지속적 논증을 해도, <창조론오픈포럼>은 배척해도 <지적설계>를 짝사랑하는 모습, 창조과학이 창조과학의 옹호 논리로 적극 사용하다가 AIG의 통보 한 번에 긴급운영위원회를 열어 순식간에 수정·포기한 18가지 주제라든가, 세계적 지질학자라 소개했던 러시아 드미트리 쿠즈네초프(국내 창조과학회와 카이스트에서까지 강의를 하고 수천만 원 선교비를 가져간 사기꾼으로, 미국에서 불량 수표를 유통시켜 수감생활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자신들 계시와 더불어 오직 몰몬교도들만 중요시하는, 1890년 미 펜실베이니아대 인류학자 모리스 재스트로우가 사진만으로도 만든 사람의 무식함이 드러나는 조잡한 물건이라고 폄훼한, 노아 홍수 모티브 동판의 사용, 공식 홈피에 검증되지 않았거나 조작된 무분별한 출처 불명의 거인 화석이나 공룡 이미지 전시, 폴킹혼의 친구로 창조론자가 아닌 프레드 호일이나 위클라마 싱의 견해를 아전인수 격으로 창조 논리에 활용하는 등과 같은 수많은 파행은, 창조과학 사역의 신앙적 열정과 공헌을 한꺼번에 조소거리로 만들 수 있으므로 사역의 진정성을 위해서도 이제는 심각한 논의를 거쳐 바르게 정리해야 한다.
최근(2016. 2, 백주년선교기념교회) 권진혁 교수(영남대)가 창조론오픈포럼에서 논문 발표를 통해 보여 준 <창조과학회의 최근 공식 입장>이 오히려 2007년 양승훈 박사의 견해로 수렴될 정도로 차별성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창조과학회의 놀라운 변화로 여겨진다. 창조신앙 수호운동으로서 열정적이었던 창조과학운동은 한국교회에 일정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규모를 갖춘 단체가 되었다. 칭찬에는 익숙하나 질타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힘을 가졌을 때이므로, 그럴수록 스스로 조심하고 무거운 책임을 느꼈으면 한다. 그리고 신앙의 학회이므로 신학과 늘 소통하고 진정한 연구 성과물을 내야 한다. 이것이 한때 창조과학을 사랑하고 사역해 왔던 필자의 진심 어린 충고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신학 > 조직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의 자연계시 (0) | 2021.02.12 |
---|---|
카발라 창조론의 주요 저작들과 개념들 <유대교 랍비들의 카발라 사상이란 무엇인가?, 2> (0) | 2021.02.07 |
악에 대해 선지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모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 (0) | 2021.01.25 |
악에 매몰되지 말라(솔로몬의 교훈) (0) | 2021.01.20 |
다윗을 통해 본 악과의 투쟁(악과의 투쟁은 어떻게 성공하는가) (0) | 2021.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