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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신앙의 눈으로 세상 바라보기)/사회

목회자 자녀인 양부모가 저지른 정인 양 학대치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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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자녀인 양부모가 저지른 정인 양 학대치사의 의미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디트리히 본회퍼, 오해와 편견 (6) 어린아이의 죽음과 쉰들러의 회심

신앙 양심 되살리기보다 이미지 실추 염려 언급 꺼리는 듯

바닥까지 떨어진 기독교계 신앙 양심 세간 인식 더 악화돼

방탕한 벼락부자 쉰들러조차 방관자로서 죄책감 느꼈는데

교회 지도자, 신자들 정인 양 양부모 죄악에도 방관자 자처

▲기독교인 양부모의 학대로 죽음에 이른 정인 양의 입양 전후 모습. ⓒ유튜브

◈신학과 회심: 쉰들러가 목격한 어린아이의 살해 장면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에서 실존 인물인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 분)는 원래 유대인 노동자들의 생사와 처우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이들을 착취하며 자신의 사교성과 인맥, 그리고 뇌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 ‘방탕한 벼락부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던 그가 윤리적 각성과 비약을 체험하게 되는 계기는 바로 한 유대인 어린이,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부터다.

1943년 3월, 독일군은 폴란드의 중심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던 크라쿠프(Kraków)에서 유대인 게토로 강제로 이주돼 있던 유대인들을 집단수용소로 끌고 간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들과 병든 이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당한다.

쉰들러는 이 극악한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를 부모의 행방도 모른 채 공포에 젖어 돌아다니는 한 소녀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극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독일인들의 집단적 광기가 빚어낸 비인간적 살인과 폭력의 현장에서 자신 역시 한 사람의 독일인으로서, 그리고 그 불의의 장면을 지켜보기밖에 할 수 없는 방관자로서 극한의 가책을 느낀 것이다.

이후 쉰들러는 수용소 내부에서 독일군 병사들이 유대인 사망자를 소각할 때 수백, 수천의 학살당한 이들 사이에서 이 어린 소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커다란 슬픔에 압도되며, 무거운 죄책을 견디다 못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을 살리겠다고 결심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크라코프 소개작전 중 거리를 이리저리 헤매는 어린아이.

<쉰들러 리스트>의 이 유명한 회심 장면에 대해, 영화가 개봉된 1993년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들이 일반 예술비평, 윤리학, 문화철학, 그리고 신학의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시도했다.

존 데이븐포트(John J. Davenport) 같은 연구자는 쉰들러의 윤리적 각성을 키에르케고르가 설명한 심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으로의 비약에 대비해 이해하려 시도한다.

사라 호로위츠(Sara R. Horowitz) 같은 연구자는 쉰들러의 윤리적 각성 장면 안에 성경의 ‘돌아온 탕자’ 모티프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고 평한다. 쉰들러의 회심 장면을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에 대비해 설명하는 연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만일 본회퍼가 생존해서 이 영화를 봤다면, 쉰들러의 회심 장면을 어떻게 평가하였을까? 영화에서 쉰들러의 회심이 일어난 크라코프 소개작전이 실행된 시기가 1943년 3월이다.

이 시기는 본회퍼가 반나치 운동 때문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 시기(1943년 4월)와 거의 일치한다. 본회퍼는 과연 이 시기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을 알고 있었을까?

본회퍼의 옥중서간집 <저항과 복종>의 내용과 어조로 봐서는 그 역시 소문을 통해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 범죄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본회퍼가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느끼는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단순한 실망이 아니라 거의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본회퍼가 비종교화(dereligionization) 원리를 본격적으로 내세운 시기가 바로 이 때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옥중에서 독일인들의 광기에 찬 범죄 현실을 목도하면서 ‘미친 자의 운전대’와 함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의 관점에서 볼 때, 파격적이라 할법한 주장을 내세웠다.

목회자 자녀들 자행한 잔혹한 범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부 자정기능 무력화되고 교회 밖 판단, 지탄에 휘청거려

신앙 양심도 외면한 채 이미지 포장에만 치중한 한국교회,

내부 교인 흉악범죄조차 예방할 수 없는 무능력 빠져들어

◈신학과 비종교화: 한국교회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삶

물론 본회퍼는 이미 <성도의 교제>나 <행위와 존재>와 같이 그의 전기사상을 대표하는 저서에서 역사적 실존 현실을 이루는 인격 간 관계를 하나님의 계시 행위로 지목하면서 계시의 참된 의미를 현대 독일인들의 삶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 동기 측면으로 볼 때 성서해석학자 불트만이 주장했던 비신화화 원리와 상당부분 유사한 측면을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본회퍼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을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단정하는 ‘순진한 무신론’에 대한 옹호가 아니었다.

애초 <행위와 존재>에서 대상화를 통한 존재론적 인식 자체가 불가능한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놓고 하나님 존재 여부를 논하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내적 모순이며, 본회퍼 역시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본회퍼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계시를 순종하는 신앙을 주장한 의도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다고 자고하는 독일인들, 그러면서 타자를 무참하게 학살하는 범죄를 자행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독일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코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우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폭로하려는 데 있었다.

▲반나치 운동 때문에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 본회퍼가 수감되었던 감옥. ⓒthebonhoefferproject.com

그럴 바에야 차라리 쉰들러와 같이 기독교인의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윤리 실천을 감행하는 이들이 더 하나님께 가깝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을 거짓 이웃으로 규정하고 죽어가는 이를 살린 사마리아인을 참된 이웃으로 규정하셨던 가르침(눅 10:25-37)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일어난 정인 양의 학대치사 사건과 관련해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쉰들러의 회심과 본회퍼의 비신화화 원리를 되새기며 교회 현실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 목회자 자녀들이 저항할 수 없는 약자이자 말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저질렀고, 그 결과 아이가 온몸이 부서진 채 죽음에 이르렀다. 기독교인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이 악랄한 범죄에 대한 한국교회 전반의 반응은 어떠한가?

쉰들러나 본회퍼에 비교해 본다면, 정말이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사안의 심각함을 절감하고 신앙의 양심을 되살리는 회심의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기독교계의 이미지 실추를 염려해 언급을 최대한 꺼리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리고 이런 회피의 태도가 그렇지 않아도 바닥까지 떨어진 기독교계 전반의 신앙 양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듯해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교회도 열심히 다니지 않는 방탕한 벼락부자조차 어린아이를 무참히 살해하는 독일인들의 모습에 방관자로서 무한한 죄책을 느꼈다.

반면 한국교회 뭇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어린아이를 직접 죽음에 이르게 한 교인 부부의 죄악을 바라보고서도 스스로 방관자를 자처하며 “그건 내 책임, 혹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라는 태도를 내세우는 듯하다.

▲정인 양 학대치사 사건의 주범으로 재판정에 등장한 양부 안 모씨. ⓒ유튜브

정인 양 학대치사 사건은 결과적으로 봐서는 분명 그들 개인의 죄악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자애롭게 보살피려 하는 인지상정조차 짓밟아 버린 그런 잔혹한 범죄가 목회자 자녀들에 의해 자행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처참히 무너져내린 한국교회의 신앙 및 윤리교육의 현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일은 개인의 범죄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교회 전반의 신앙의 후패함 문제로 연결된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교계 전반이 목회자 및 목회자 가정의 비위와 범죄에 대해 무조건적인 관대함을 보여 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교역자와 그 주변인들이 저지른 각종 월권과 헌금 횡령, 그리고 성범죄 등에 대해 무마로 일관하는 습관이 굳어져 있다.

또한 이런 관대함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그리고 교역자의 죄악에 대한 판단을 터부시하는 구약적 사고방식과 권위주의에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논리들이 거짓된 신앙인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고 또 적용되어서도 안되는 것들임을 외면해 온 역사 역시 인지하고 있다.

이렇게 합당치 못한 반지성적 처사 때문에 현재 한국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 내부의 자정기능은 무력화되고 오로지 교회 바깥의 사람들, 무신론과 유물론에 경도된 이들의 판단과 지탄에 휘청거리는 상황이다.

이는 그 원인을 따졌을 때 다른 누구의 잘못이기 이전에 한국교계 스스로의 잘못이다.

신앙의 양심은 외면하고 이미지 포장에만 치중해온 결과, 한국교회는 교회 내부에서 교인들의 손으로 자행된 흉악범죄조차 예방하고 다스릴 수 없는 무능력의 덫에 빠져들고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