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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이슈들/기타(일반 과학 질문)

라이트 형제(목사의 아들들), 최초로 하늘을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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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아들들 -최초로 하늘을 난 라이트 형제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사람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타고난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루스가 큰 새의 깃을 백랍으로 붙여서 날개를 만들어 달고 미궁을 탈출하다가, 태양에 가까워지자 그만 백랍이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것은 커다란 소원이었으면서도 성취하기 어려웠다.

 

오늘날 독수리를 하늘의 왕자라고 하지만, 사실 과거에는 독수리보다 훨씬 큰 새들이 많았다는 것이 화석으로 밝혀지고 있다. 독수리는 한쪽 날개가 1m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테라노돈은 양 날개의 길이가 7미터나 되었고, 아즈텍 신의 이름에서 따온 케찰코틀러스는 날개 사이의 길이가 15m나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팬텀기의 날개보다 긴 것인데, 어쩌면 노아 홍수 전후에는 사람들이 이들 괴조들을 가축처럼 길들여서 날고 싶은 욕구를 일부 채웠는지도 모른다. 여러 나라에 거대한 새와 새를 부리는 사람들에 관한 전설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인디언들에게는 거대한 새에 관한 생생한 전설이 많다.

 

동화처럼 느껴지는 이런 인류의 오랜 소원을 이룬 인물이 라이트 형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의 언론인 루드윅은 “우리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라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기도 했다.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알려지는 윌버 라이트(W. Wright, 1867-1912)와 오빌 라이트(O. Wright, 1871-1948) 형제는, 미국 연합형제단 교회의 청빈한 목사였던 밀턴 라이트의 셋째와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의 어느 토요일 오후, 이들 형제는 역사상 최초로 비행기를 띄우기 위해 최종 점검과 수리를 끝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날씨도 그들을 돕는지 바람 한 점 없는, 시험 비행을 하기에는 완벽한 날씨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 비행기는 전혀 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가 뜨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날은 바로 주일이었던 것이다! 그들 형제는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주일에는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안식하는 데 훈련되어 있었다.

 

이들 형제가 처음으로 비행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79년에 부친이 여행 선물로 프랑스의 페노라는 사람이 고안한 장난감 헬리콥터를 선물한 이후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비록 장난감이었지만 헬리콥터의 모형은 연날리기를 무척 좋아하던 이들 10대 소년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들은 곧 지방의 연날리기 클럽에도 가입하게 된다. 두 형제는 공부도 무척 잘했는데, 원래 형 윌버는 예일대학교에 진학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려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스하키 도중 그만 거의 모든 이가 부러지는 커다란 사고를 당하게 된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이 형제들은 오하이오주의 기계 제작소와 신문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1892년에 자전거 판매소를 시작하였다. 당시 자전거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가 치열한 개발 경쟁을 하던 끝에, 50여 년 전 영국의 맥 밀란이 페달이 달린 자전거를 개발하여 신속하게 전파되고 있는 중이었다. 손재주가 많은 이들 형제에게 자전거 제작은 수입도 괜찮고 적성에도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역시 비행기의 제작이었다.  1895년경, 라이트 형제는 릴리엔탈이 지은 책을 읽게 되는데, 그는 글라이더의 전문가로 무려 2,000회에 달하는 비행 실험 경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릴리엔탈은 그만 1896년에 시험 중이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1899년, 과학 지식을 보급하는 국가기관인 스미소니언협회에 편지를 보내는 등, 라이트 형제는 꾸준히 비행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면서 비행기 제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1900년에는 사람의 몸을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글라이더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조종하느냐가 커다란 문제였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는 기계’인 새가 있지 않은가!”

 

형 윌버에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관찰이 쉬운 날을 하루 잡아서 자신이 살던 미국의 오하이오주 데이튼의 들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랜 관찰 끝에 새들이 수시로 날개의 모양을 바꾸어 가면서 좌우 상하 여러 방향으로 날며, 속도도 조절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행기도 좌우의 날개면에 변화를 준다면 새처럼 불편 없이 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기체가 좌우가 기울었을 때 떠오르는 힘에 차이가 생기게 함으로써 기울기를 줄이는 방법으로, 오늘날에도 모든 비행기에 응용되고 있는 보조날개의 원리였다.

 

1900년 6월, 라이트 형제는 이것을 연과 글라이더 실험을 통하여 거듭 확인하게 된다. 글라이더에는 동생 오빌이 엎드려 탔으며, 언덕 위를 미끄러져 30m를 날아서는 잔디 위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동력장치 없이 그저 날기만 한 실험이었지만, 라이트 형제에게는 큰 용기를 줬다.

 

“형! 글라이더에 엔진이나 프로펠러가 달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생의 말에 형 윌버는 작고 가벼우면서도 힘이 센 자동차 엔진을 개발하여 글라이더에 달 구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라이트 형제보다도 먼저 글라이더에 엔진을 달아 실험하려는 사람이 나타났다. 랭글리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1903년 10월 7일 글라이더에 엔진을 달고, 커다란 강 가운데 있는 배 위에서 실험 비행을 하였다. 그런데 비행기는 배를 떠나자마자 곧 물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랭글리는 그 해 12월 8일에 2차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날기도 전에 뒷날개가 갑판 위의 물체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랭글리의 비행기 연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라이트 형제도 독자적인 비행기 연구를 계속하여, 랭글리가 비행 실험을 하던 그 해에 12마력의 엔진을 개발해 놓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는 이 엔진으로 두 개의 프로펠러를 돌릴 수 있도록 비행기를 제작하였다. 이윽고 랭글리가 비행 실험을 시도하다 실패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는 비행을 계획하게 된다.

 

날씨도 추웠던 데다가 랭글리의 비행 실험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버린 직후라, 언론과 대중들은 학벌도 시원찮은 이들의 실험에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더욱이 어느 누구의 경제적 도움도 없는,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제작된 비행기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면에는 그들 형제의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고 조용한 성격에도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고지식하고 청빈한 목사였던 라이트 형제 아버지의 영향이 많았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롤스로이스 자동차 회사의 공동 설립자였던 롤스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밀턴 라이트(라이트 형제의 아버지) 목사는 성경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긍정적 효과에 관하여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라이트 형제의 이 유명하고 역사적인 비행 실험에는 겨우 5명의 구경꾼만이 참석하였다. “라이트 비행기”라고 이름을 붙이고 동생 오빌이 탄 이 비행기는, 1차 실험 비행에서 12초 동안 37m를 날았다. 역사적 비행은 이렇게 그들의 성격대로 아주 조촐(?)하게 마감된 것이다. “라이트 비행기”는 제2차 실험에서는 59초 동안 260m나 비행하였다. 모든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1908년, 윌버는 유럽으로 건너가서, 프랑스에서 그 위용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과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 해 사고로 승객이 죽고 오빌도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라이트 형제는 1909년 비행기 생산을 위한 항공 회사도 설립하였다. 1909년 7월 25일에는 1개의 날개를 가진 단엽기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을 37분 만에 횡단에 성공한다. 항공산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목사인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주님을 영접하고, 일생 동안 술과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으며, 그 당시 흔하던 도박에도 전혀 손 한 번 대지 않고,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간 이들 형제의 모습은 오늘날 물질적 욕구에만 눈이 어두워 어수선한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대비되기도 한다. 그렇게도 우애가 깊던 이들 형제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형 윌버는 1912년 5월 30일 45세로, 동생 오빌은 1948년 1월 30일 76세로 주님 곁으로 갔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