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에 대한 어느 ‘大 철학자’의 오해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신학에 대한 러셀의 오해(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자연과학에 대한 코페르니쿠스, 루터, 칼빈의 관심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주로 대립의 개념으로 파악한 러셀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진술에 있어서도 동일한 편견을 드러낸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5)와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주로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의 초·중반을 살다간 인물들이다. 루터와 칼빈은 근대 과학을 향해 꿈틀거리며 역동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자연과학의 바람을 결코 피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던 시대를 살았다. 비록 자연과학도는 아니었으나 당대 영적 지성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루터와 칼빈은 과학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신앙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칼빈의 경우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담은 새로운 천문학 개론서를 낸 것은 1514년이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Brief Treatise(Commentarieolus, 짧은 논문)라는 논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는 코페르니쿠스 사후(死後) 루터파 개신교 목사였던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에 의해 출간되었다. 당시 이것은 성서의 권위와 신빙성에 대한 중대한 위협과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루터와 칼빈은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주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쿠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신학과 종교와 자연과학의 긴장과 충돌을 상징한다. 당시는 모든 천체는 지구를 돈다는 지구중심설이 성서의 지지를 받는 듯이 여기던 시대였다. 이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루터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정죄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가 않다. 루터가 천문학 서적의 기본 원리들을 이해할 만한 지식을 지닌 사람인 것은 분명하나, 우리는 그가 천문학적 주제를 탐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오히려 개신교 수학 강사 레티쿠스(Georg Johachim Rheticus, 1514-1574)가 코페르니쿠스의 수제자로 성서와 지동설을 양립하고자 노력한 사람임이 호이까스의 노력으로 발견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루터의 창조신앙
루터는 결코 자연에 무지한 학자가 아니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모든 자연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존재함도 인정하였다.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 본질의 완전성과 아들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이 현존함을 인정하였다. 다만 루터의 관심의 중심은 달랐다. 루터는 과학적 사실보다 과학의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 좀 더 집중한다. 아란트(Charles P. Arand)는 루터의 창조론(Luther's Thought on Creation) 강좌에서 루터의 요리문답 제 1조에 나타난 창조론과 그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면서 “루터는 후기 작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아란트는 창조주와 창조물 간의 경계와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과의 구분 그리고 하나님의 가면(Larva Dei)으로서의 피조물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피조물은 존재의 낮은 질서에 속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피조물은 오히려 신적 선하심의 도구이다. 그렇다고 인간이나 피조물이 창조의 중심이 아니다. 루터는 철저히 인간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 초점을 맞춘다.
루터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은 광대한 은하수로부터 미세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물을 만드신 분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 또한 창조주는 인간들을 다른 창조물에게서 구분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일부분이 아니요 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다. 이것은 과정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루터의 창조 신학에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루터는 아버지를 문법, 아들을 변증법, 성령을 수사학으로 비유하곤 했다.
칼빈의 신학 방법론과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러셀의 착오
그럼 칼빈은 어떠했는가.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과학과 신학의 전쟁 역사>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1896)에서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통상 시편 93편 1절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에 도전했고 어느 누가 감히 성경의 권위 위에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올려놓으려 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러셀(B. Russel)은 자신의 책 <종교와 과학> 그리고 <서양 철학사>에서 화이트가 주장한 이 내용을 토대로 반복하여 칼빈을 공격한다. 심지어 최근의 토마스 쿤(T. S. Kuhn) 조차 이 구절로 칼빈을 비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심코 칼빈을 반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고 인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꼼꼼히 살펴본 적은 없는 듯하다. 칼빈의 어느 책에도 위의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칼빈은 시편 93편 1절에 대한 주석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지동설을 유지하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해석학적 오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사실에 대한 분명한 강조를 말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하고자 감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문헌은 결코 없다. 로젠(E. Rogen)은 화이트와 반대로 칼빈의 모든 텍스트를 찾아보았으나 칼빈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들어본 일도 없고 따라서 그에 대해 어떤 태도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호이까스(R. Hooykaas)도 칼빈은 한 번도 코페르니쿠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칼빈이 말했다는 ‘인용구’는 모두 가공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칼빈이 죽기 25년 전(1539) 마르틴 루터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의 인물이었고 칼빈보다 루터가 가톨릭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도 칼빈이 코페르니쿠스를 전혀 몰랐다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칼빈의 저서나 관련 문헌에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일까? 여기서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칼빈이 설혹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해도 그리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을 공적으로 논평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후 거의 반 세기 동안이나 그의 태양 중심설은 지지자들을 거의 얻지 못하였다. 겨우 한 대학교(스페인의 Salamanka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보댕(Jean Bodin, 1530-1596)이나 몽테뉴(1533-1592) 같은 16세기 후기의 학자들도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침묵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이후 반 세기가 지나서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에 의해서 본격 부활된다. 신학자로서의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관심의 대상이었더라도 자신의 저작 가운데서는 간과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저서에 나오지도 않는 이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했다는 낭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인용이 되었던 것일까? 샤프(John Sharp)는 멜랑히톤의 물리학 서론(Intia Doctrineae Physicae)에서 인용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칼빈에게 있어 세상은 루터처럼 모두 ‘하나님의 세상’이었다. 칼빈은 과학을 무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칼빈은 자연과학에 대해 열려 있었으며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칼빈은 과학적 연구를 적극 권장하였으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물질세계와 인간의 몸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거한다. 칼빈은 천문학과 의학 연구를 모두 적극 추천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더 많은 증거와 지혜와 섭리를 알게 되는 일이었다. 과학이 하나님의 과학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칼빈과 루터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창조 신앙의 반열에 있었다. 다만 칼빈은 성경을 관점과 관심이 다른 책으로 보았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었다. 성경은 전문 과학 서적처럼 대할 책이 아니었다. 칼빈은 분명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자연은 조금 일그러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책으로 본 것이다. 피조세계의 연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훌륭한 도구였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었다. 1645년과 그 이듬해 과학에 헌신한 사람들의 부정기적 모임으로 출발한 영국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 회원 대부분이 청교도적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신학에 대한 러셀의 미숙함
칼빈은 또한 과학과 과학자 만능의 엘리트주의자도 아니었다. 칼빈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였다. 칼빈이 보기에 하나님의 영(靈)은 특별한 사람들만 배려한 고등 교육 기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보통 학교를 개설하시는 분이었다. 칼빈의 해석학에 대한 평택대 안명준 박사의 명쾌한 논문인 칼빈의 해석학에 있어서의 간결성과 용이성(Brevitas et Facilitas)의 방법론은, 칼빈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모세는 지식인 뿐 아니라 무식자의 선생으로도 소명을 받았다. 칼빈은 천문학이나 기타 난해한 것을 배우려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보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물론 루터나 칼빈도 어떤 부분에서는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러셀도 마찬가지였다. 즉 러셀은 신학과 성경의 깊은 해석은 모르더라도 성경해석학의 기본 원리는 알았어야 했다. 이것을 모르고 루터와 칼빈의 약점만을 물고 늘어져 이들의 견해를 기독교 비판 도구로 사용하려는 러셀의 태도는 대학자의 풍모라고는 보기 어렵다. 러셀은 철학의 가치란 불확실함에 있다고 했다. 오히려 철학에 소질이 없는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그렇게 신중한 러셀이 신학에 관한한 기본도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을 내렸다는 데에 아쉬움을 가진다. 대철학자 러셀은 실은 신학에 관한 한 오해로 가득 차고 전혀 기본을 모르는 미숙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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