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신학 질의 응답

성경을 알레고리와 모형론으로 해석해도 될까?

728x90

성경을 알레고리와 모형론으로 해석해도 될까?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1. 알레고리적 해석

 

풍유(諷喩), 우의(寓意), 우화(寓話) 등으로 번역되는 알레고리(allegory)는 헬라어 알레고리아(allegoria, 다른 이야기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문학형식을 말한다. 본래 이 말은 헬라어의 ‘다른’이라는 단어인 'allos'와 ‘공공장소에서 말하다’라는 'agoreuein'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어원적으로는 ‘다르게 말하는 하나의 방식’을 지칭한다.

 

어떤 내용을 표현할 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말하려는 대상의 본체를 감추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방법은 알레고리 말고도 다양하다. 비슷한 성질이나 모양을 가진 두 사물을 ‘같이’, ‘처럼’, ‘듯이’와 같은 단어로 결합하는 직유(直喩, simile),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은유(隱喩, metaphor),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나타내는 말을 경험적으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나타내도록 표현(예를 들어 ‘흰옷’으로 우리 민족을, ‘백의(白衣)의 천사’로 간호사를 표현)하는 대유(代喩, synecdoche),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환유(換喩, metonymy) 같은 비유법이 있는데 알레고리는 신학에서 관심을 갖는 표현기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 성경의 알레고리란 무엇일까?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이란 성경의 문자(rhete) 혹은 분명한 것(phanera) 이면(裏面)에 담긴 구절의 실제적 의미(hyponaia)가 존재한다고 믿는 해석 방법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알레고리 해석을 확대된 은유(metaphor)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명기 14장 21 후반절에 보면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는 계명이 나온다. 온갖 재료와 향신료가 제한 없이 마구 섞이는 짬뽕이나 비빔밥류를 즐기고 별다른 음식 계명이 없이 살아온 우리 민족은 이 계명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또한 염소 새끼를 어미 젖과 섞어 삶을 일도 거의 없다. 만인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에 이렇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시급하지도 않은 일을 굳이 기록하신 이유는 무얼까? 성경이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라 그런 것일까? 우리 사회라면 어미 젖 이슈보다는 아마 도축법에도 없는 강아지를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목사나 성도들이 함부로 영양탕으로 즐겨도 될까하는 문제가 더 쟁점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하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는 계명으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염소 새끼와 어미 젖에 담긴 좀 더 확대된 중요한 해석이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은 고대 헬라와 유대 사이의 교류를 통해 자연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주전 170-60년) 같은 학자는 호메로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헬라 철학이 오히려 구약, 특히 모세의 율법에서 알레고리 기법을 가져왔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유대의 필로(Philo, 주전 약 20년-주후 약 54년)는 유명한 유대의 알레고리주의자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겐, 제롬 등은 알레고리 해석에 능한 초대 기독교 학자들이었다. 성경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책이다. 설교도 결국 해석의 적용이다. 따라서 성경 시대의 상황과 풍습에 능하지 못한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은 과거 유대, 기독교 학자들의 알레고리 해석에 대해 어디까지 수용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2. 모형론적 해석

 

모형론(typology, 유형론, 예표론)적 해석은 구약 성경의 역사는 진리가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라 보는 해석을 말한다. 즉 구약 성경의 그림자 같은 역사는 그 원형(原型)이나 구현이 신약성경의 계시에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말씀, 사건, 인물 그리고 제도들은 모형들(Typen)로 간주되고, 그 모형들과 상응(相應)하는 것이 신약에 있다는 입장이다. 모형론적 해석은 이러한 모형(模型, Typos: 구약)과 원형(原型, Antitypos: 신약)의 대조를 통하여 구원역사의 연속성을 살펴보게 된다. 어떤 학자는 극단적으로 구약의 모든 사건과 역사를 모형으로 해석하여 실제 역사를 무시하기도 한다.

 

모형을 나타내는 신약의 단어들로는 튀포스(모형, 롬 3:14; 고전 10:6,11), 스키아(그림자, 골 2:17; 히 8:5; 10:1), 휘포데이그마(사본, 히 8:5; 9:23), 세메이온(표적, 마 12:39), 파라볼레(비유, 히 9:9; 11:19) 등과 같은 용어들이 있다. 모형론을 폭넓게 보아 알레고리의 영역에 넣어 다루려는 학자들도 일부 있기는 하다. 확대 해석하면 그렇게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엄격히 구분하면 약간 그 성격이 서로 다르므로 구별하는 게 좋다고 본다.

 

모형은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신 것(예를 들어 노아 홍수 사건과 소돔성의 롯의 때를 인자의 재림 사건에 대한 모형으로 언급한 누가복음 17장 26-30절을 참조할 것)이므로 연구 가능한 해석 모델이다. 다만 모형론 해석이나 연구를 하려면 다음 몇 가지를 먼저 잘 숙지해야 한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모형과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구분할 것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나 바울 등이 분명하게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학자들이 임의적으로 모형이라 말하는 것을 구분해야 혹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그릇된 해석을 분별할 수 있다.

 

둘째, 교리와 관련된 모형과 교리와 상관없는 모형을 구분할 것

요나가 큰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부활의 모형임을 예표해주셨다(마 12: 40). 하지만 요나가 육지에 다시 선 것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팔레스틴)에서 회복 될 것이라는 예표로 쓰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마 24:32) 말씀하셨다고 무화과를 이스라엘로 해석하고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에 50년 희년을 더하여 1998년을 종말로 해석한 것도 그릇된 적용이요 해석이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알레고리적 요소를 담고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하게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하면 엉뚱한 시한부 종말론 교리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 말씀은 종말의 때를 잘 분별하라는 말씀이지 시한부 종말론의 날짜를 계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다.

 

셋째, 모형에도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부분이 있음을 명심할 것

 

너무 지엽적인 주장을 핵심적인 것으로 몰고 가면 성경 해석의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부차적인 부분을 핵심적인 것으로 집착하는 실수도 조심해야 한다. 일부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본질적 핵심과 부차적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넷째, 완전히 성취된 모형도 있고 부분적으로 성취된 모형도 있으며 미래 또는 내세에 이루어질 모형들(주로 요한계시록 예언들)도 있음을 명심할 것.

 

다니엘서 2장에 나타난 열 발가락을 과거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EC 공동체 10개국으로 해석하여 이 내용을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오해한 것은 잘못 해석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3. 나가면서

 

과거 일부 사람들이 알레고리와 모형 해석을 확대 적용하여 그릇된 성경 해석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알레고리와 모형 해석에 대한 일부 반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성경에는 알레고리와 모형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이들 알레고리와 모형에 대한 바른 해석이 중요하다. 물론 성경 전체가 알레고리나 모형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책도 아니다. 일부가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신앙의 학문인 신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대두 된다. 과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던 이단들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성경 해석의 중심을 잡아 준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탁월한 신학자들이었다.

 

지금 한국 교계는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구별이 어려울만큼 심각한 포스트모던적 담론만이 난무하는 시대적 혼돈상을 경험하고 있다. 성령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싸우고 지켜온 참 신앙과 신학과 교리는 무시하고 마치 영적 사사기 시대처럼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하려 한다. 한국 교계가 바로 서는 길은 과거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엇을 지켜왔는 지, 그 지나 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고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한국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른 길을 찾으려는 일은 등한시하고 너무 대중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넓은 길로만 걸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점이 없지 않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