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1. 테크놀로지란?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우리말로 기술(技術)을 말하는데 과학을 통해 인간의 욕구나 욕망에 적합하도록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거나 또는 성취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어원적(語源的)으로는 예술·의술 등도 포함하나 오늘날은 주로 생산기술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을 자연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지식과 이론으로 보는 반면 기술은 일종의 응용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대중들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기술과 과학을 거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스컴은 이 둘을 합쳐 과학기술이라 통칭하고 있는 겁니다.
2.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테크놀로지 문제
1) 과학기술은 가치중립(value free)적인가?
기술이 과연 가치중립(value free)적인가하는 문제에 있어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기술은 분명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증거가 많습니다. 핵연구가 핵무기 개발로 이어진 점, 독성 연구가 테러용 독침개발 기술로 이용된 점, 좋은 육질의 고기를 제공하기 위한 육류가 포함된 사료 개발이 광우병 사태로 이어진 점, 장기 이식 수술의 등장이 멀쩡한 장기를 사고파는 장기 밀매매로 이어진 점, 많은 과학기술의 성과가 범죄에 악용된 점, 과학기술이 세상에 편리함은 가져다 주었으나 새로운 인간 소외, 빈부 격차, 환경 오염, 자동 기술로 인한 대량 실직 사태, 과거에 없던 크고 작은 여러 안전 사고로 인한 다수의 사망자와 중도 장애자 발생 등등 과학이나 기술은 결코 가치중립적이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과학기술과 기독교
그럼 과학 기술은 지금까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왔을까요?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이 질병을 극복하고 소통의 거리를 단축 시켰으며 새로운 기회 창출을 가져왔다고 긍정적 측면을 보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과학 기술이 인간 관계의 비인간화, 귀중한 자원의 고갈, 한경 오염, 대량 학살 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 존재에 대한 위협이 초래 되었다고 비난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기독교도들의 경우도 양편으로 나누어집니다. 현대 기술이 기독교적인 이해와 긴장 관계에 있다고 보는 자크 엘룰(Jacques Ellul)같은 학자와 과학 기술이 기독교와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하비 콕스(Harvey Cox)와 프리드리히 드사우어(Friedrich Dessauer)같은 학자들도 있어서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를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적 세계관으로 보면 분명 과학기술의 역작용과 부작용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3) 기독교는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기독교는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그저 한숨만 쉬며 방치하거나 과학기술을 철저히 외면해야 할까요? 과학기술 문명에 대해 대단히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거부하거나 의심을 거두지 않는 재세례파 계열의 아마쉬나 메노나이트 같은 교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에서도 여러 반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죄성 때문에 많은 경우 그동안 선용보다는 악용되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방치하고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안에서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학문과 문화는 철저히 세속화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해버렸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며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들을 파하고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복종 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알려줍니다(골 3:17; 고후 11:5). 과학기술도 당연히 이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즉 기술도 인간 문화 활동의 한 형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수행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잡한 기술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기술에 대한 잘못된 문화적 태도와 가치관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샬롬이 과학과 기술 분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하나님의 샬롬은 원론적으로 첫째 하나님과의 정당하고 조화로운 관계로부터 오며, 둘째 다른 사람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한 성경적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대한 바르고 정당한 조화를 통한 전면적 샬롬에서 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샬롬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기술에 대해서도 바른 이해와 적용을 통해 늘 무엇이 합당한 길인지를 항상 고민하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습니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됩니다. 기독교는 기독론적 사랑과 샬롬을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용해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합니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조직신학자 지명수 박사는 모든 복음이 그 핵심 내용에 있어 동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초의 축복은 가장 넓은 함의와 적용을 갖는 말씀으로 보고 이 최초의 축복을 최초의 복음, 창조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창조의 복음은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이것은 생태계나 생명 윤리나 테크놀로지를 다룰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신현수 교수(평택대, 조직신학)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의 실현의 행위로서 샬롬(shalom)의 신학을 제안합니다. 구약의 평화는 기본적인 어떤 것으로 사회적, 역사적 및 다른 형태의 변화도 그것의 기본 의미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생명, 갈증 혹은 기쁨 등과 같이 변화 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습니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하지요. 이것은 복음주의 과학관 안에서도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질서의 샬롬을 촉구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테크놀로지의 현대적 이슈를 다룸에 있어 과학의 질서 안에 내재된 창조의 샬롬, 하나님의 샬롬을 찾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복음주의는 자연 안에서 찾게 되는 이것들이 성경의 완전한 충족성에 비해서는 비록 작은 빛이기는 하나 여전히 피조된 세계 안에 펼쳐진 자연 계시 안에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비록 피조 세계가 샬롬의 질서를 많이 상실하고 파괴된 채로 방치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과학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지향하는 가는 복음주의자들의 끝없는 고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마치면서
기독 과학 철학자 델 라치(Del Ratzsch)가 말하는 ‘사랑 안에서 진리 말하기/발에 관한 몇 가지 생각’(Speaking the Truth in Love/Some Thoughts About Feet)도 흥미 있는 제안을 합니다. 델 라치는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논쟁 할 때 첫째. 말할 때(Speak) 공동체 내부를 쉽게 깨뜨리는 누(累)를 범하지 말 것(토끼 발을 모두 잘라 버리는 발이 되지 말 것) 둘째, 당신의 입에 당신의 과학적, 신학적 또는 철학적 발을 집어넣지 말고 참 진리(the truth)를 찾도록 애쓸 것(입에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말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어 짐) 셋째, 사랑 안에서(in love) 한 몸을 이루는 (복음의) 친구들에게 총을 쏘지 말 것(그것은 자신의 발을 쏘는 것이요 엽총으로 티눈을 잘라내는 격이다), 이렇게 세 원칙을 제안합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델 라치가 보기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한 몸입니다.
기독교는 테크놀로지가 상실하고 외면한 사랑과 샬롬의 따뜻함을 어떻게 회복 시킬 것인지 늘 고민해야 합니다.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초월적 사랑과 내재적 사랑을 동시에 만족하는 샬롬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테크놀로지가 장애인들이나 약자들을 위한 배려(점자 책 개발, 무료 개안 수술, 저개발국 지원, 장애인용 전동차 개발 등등)로 나타나는 것 등은 초월적 사랑을 휴먼 테크놀로지로 승화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한 삶을 살며 테크놀로지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케 하는 도구로 삼아야 하겠지요.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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