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는 다윈주의 등장에 어떻게 반응했나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자와 적절히 훈련받은 평신도는 가장 중요한 현대 과학의 결과를 성경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조화시켜야 한다고 여겨왔다. 또한 복음주의 지도자들 일부는 과학적 결론을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변증이 될 수 있는지를 입증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복음주의자들은 보통 과학이란 “베이컨주의”, 혹은 입증된 개별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좀더 보편적인 법칙을 엄밀하게 추론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모든 학문 분야의 데이터를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제공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Origion of Species)의 출판에 대한 복음주의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진화에 대한 현대 논쟁과 비교해 볼 때, 인류 기원에 대한 논쟁의 초기 반응은 오늘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복음주의적 결론과 비교적 차분한 논쟁 분위기를 유지하였다. 미국의 과학 공동체가 유기체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신학적 교리 면에서 매우 다양했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다윈의 변이 가설을 단순히 해로운 과학쯤으로 생각하여 한마음으로 거부할 수 있었다. 1860년대 까지만해도 다윈주의와 합리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화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주 흥미롭게도, 상당히 보수적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던 조합 교회의 아사 그레이(Asa Gray)는 북아메리카의 지도적 다윈주의자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다윈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과학자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버드 대학 시절, 아사 그레이는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던 자연주의자였다.
1880년, 그는 자신을 가리켜 “과학적인 면과 스타일에 있어 자신은 다윈주의자이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확고한 이신론자이며, 종교적인 면에서는 ‘보통 니케아 신경이라고 불리는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기독교 신앙의 지지자” 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그레이는 자연 도태 이론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과 보존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윈과 논쟁하였다. 다윈은 그 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레이는 그것에 대해 결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1870년대에 미국의 과학자들이 유기체 진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수용하자 상황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의 실천을 따를 것인지-이전에 지구의 연대와 성운 가설에 대해 반응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결론을 진화론에 맞추어 조정함으로써-아니면 이 새로운 도전에 대항하여 선을 그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때 25년에 걸친 논의 끝에 세 가지 입장이 대두되었다.
보수적인 반대자들은 일차적으로 진화론이 성경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진화론을 거부하고 관할권 밖으로 내몰았다. 장로 교회의 존 더필드의 말에 의하면 다윈이 설명한 진화론은 “인간의 기원과 현재의 영적 상태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진화론이 구속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을 저버린 것은 그 이론이 “성경의 중심적인 종교 사상”을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또한 이전에 미국인들이 베이컨적인 과학에 보였던 헌신과 하나님의 설계에서 출발하는 18세기의 논증 공식의 각 특성들이 어떻게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지 보여 주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의해 형성되었다.
개신교 신앙과 진화론을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두 개의 또 다른 집단으로 나뉜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진화론자들과 오버린 대학의 조지 라이트(George Frederick Wright, 1838-1921),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B. B. Warfield)는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의 범주 안에서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회중교회 목사이자 국제적 명성을 얻은 아마추어 지질학자였던 조지 라이트는 「진화론의 소멸」이라는 책에서 유신론적 진화론과 특별 창조론자들의 전통적인 견해 사이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려는 시도를 한 사람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는 근본주의 좌익을 택하였다. 1930년대까지 근본주의자들은 맥코쉬(James McCosh)나 조지 라이트, 워필드가 제시한 대안을 철저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복음주의 진화론자들이 왜 그와 같은 길을 선택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학에 적응하기 위한 일부로서 진화론을 수용했다. 진화론에 대한 그들의 재해석은 성경의 고등 비평과 종교 의식에 대한 새로운 신뢰, 그리고 인류의 점진적 발전에 대해 점점 더 확신하는 그런 견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러한 경향에 편승하여 현대주의적인 개신교 진화론자들은 내재적인 하나님의 관념을 옹호하였고, 성경을 발전하는 종교 의식의 표현이라고 재정의 하였으며, 구속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유기체 진화론에서 빌어 온 표현으로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이어졌던 진화론 논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후기 개혁주의적, 민주주의적인 미국 사회의 복음주의자들이 과학의 중요성 이미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진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은 유럽의 복음주의자들보다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권위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계속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과 유럽의 보수적인 개신교는 미국인들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진화론 때문에 나뉘어 지지는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화론에 관한 지성적 논쟁은 또한 전통을 벗어던진 문화 속에서 개신교가 해야 할 역할에 관한 논쟁이기도 했다. 지지자들이나 반대자들은 모두 다 계몽주의 과학 사상과 전통적인 기독교사상 사이의 유대 관계에 역사적으로 개신교가 얽매어 있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사적으로 과학적 체계에 깊이 얽매어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베이컨적인 과학의 가정에 얽매어 있었음을 드러낸다.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과학과 신학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상당히 세련된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복음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성경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틀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의견까지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남북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869년 12월 17일 뉴욕의 쿠퍼 유니온 대학에서 당시 코넬 대학의 총장이었던 37살의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신앙과 과학에 대한 폭탄을 하나 던진다. 당시까지 학생과 교직원의 선발과정에서 부여되었던 신앙적 검증 절차를 파기하고 코넬 대학을 과학을 위한 도피처(asylum)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화이트헤드는 앞으로의 역사는 현세대가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종교와 과학 간의 적대 관계는 아주 사소한 것이며 기독교는 과학의 발달을 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겼다고 본다. 화이트헤드의 눈으로 보면 창조와 진화 논쟁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과학은 논쟁과 관계없이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과학적 이슈에 대해 복음주의의 혼란이 예견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이것은 곧 프린스턴대학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19세기 전체를 거쳐서 주도적 신학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과학과 신앙의 대면에도 활발히 관여한다. 왜냐하면 프린스톤에 있던 지리학, 지질학, 생물학 등등의 대변자들이 그들의 동료 신학자들과 같은 종교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12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의 제 1 교수 취임 연설에서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과학적 결론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연의 역사와 화학, 그리고 지질학은 성경 안에 있는 난제들을 해결하도록 성경 연구자들을 돕는 면에서, 혹은 이러한 과학의 비호 아래 만들어진 적대자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게 하는 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
알렉산더의 후임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한걸음 더 나아가, 거룩한 창조의 기본 틀 안에서의 과학의 제한적인 자율성을 지지한다. 성경의 완전한 신뢰성을 바탕으로 성경에서 발견될 것으로 생각되는 결론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 과학자들이 각 분야에서 적절한 귀납적 연구를 추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의 연역적 결론이 과학과 갈등을 일으킬 때는 어찌할 것인가? 과학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계시를 제쳐둘 경우 위험천만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보장이 있는가? 핫지는 성경에서 파악된 것이든 자연에서 파악된 것이든 사실은 자명하다고 믿는 지나치게 단순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핫지에게 있어 자연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참된 계시였다. 그러므로 핫지가 볼 때 우리가 성경을 과학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다.
찰스 핫지는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출판된 이후 진화론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핫지는 1874년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를 통해 진화론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핫지는 진화론의 특징으로 진화 또는 모든 식물과 동물의 유기체가 하나 또는 아주 적은 수의 원시 균류(primordial living germs)로부터 생겨나고 발전했다는 가정과, 이 진화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에 의해 일어났으며 결국 다윈의 이론은 자연선택이 초자연적 지성의 설계(design)없이 비지성적인 물리적 원인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보았다. 핫지는 우주의 창조와 섭리 과정에서 지성적 설계를 배제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른 창조의 가능성을 부정하므로 목적론적 설명이 배제된 다윈의 진화론은 수용할 수 없었다. 진화론의 자연선택 개념이 초자연적 설계나 목적의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배제하게 되면 결국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학과 결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핫지가 볼 때 다윈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주장한 적은 없으나 다윈의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었다. 핫지는 성경과 과학이 원칙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핫지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providence)를 무시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이론의 방법으로 삼는 과학의 이론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진화론을 인정하는 신학자들도 나타났다. 핫지의 뒤를 이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B. B. Warfield)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워필드는 진화론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워필드는 칼빈도 자신처럼 진화론자로 보았다, 마크 놀이 칼빈은 진화론자로 주장한 것도 결국 워필드의 견해로부터 기인한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앞질러 간 것으로 여겨진다. 칼빈의 시대는 진화의 시대도 아니었고 칼빈의 어떤 주석에도 진화론은 등장하지 않으며 칼빈은 두드러진 과학의 이론도 아니었던 진화론에 적응할 리가 결코 없었다. 워필드는 다윈이 기독교를 거부한 이유는 사변과 가설에 너무 편견이 동원되어 생각의 위축을 가져와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진화론은 맞되 다윈이 세련되게 그 이론을 정리하여 기독교와 충돌하지 않도록 내놓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것들이 복음주의 진영 안의 일치 되지 않는 논란을 가져왔다. 진화론과 관련된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서로 일치 되지 않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은 당시 대중적이었던 과학의 내용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효과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수용은 지성적인 이유보다는 공리적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지만, 복음주의를 과학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과학에 대한 근본주의의 대안은 세속주의를 완전히 거부하려 했던 근본주의적 성향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었고 매우 전투적이었다, 과학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 견해를 반대하는 가운데 근본주의자들은 문제를 보는 방식에 있어서 복음주의 대중을 성공적으로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이 계속해서 과학자들을 훈련시켜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저마다의 과학 분야에서 비교적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대학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복음주의자, 산업체나 정부를 위해 일하는 과학 전문가로 고용된 복음주의자, 혹은 기독교 대학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복음주의자들은 보통 과학적 주제를 신학이나 다른 사상 영역과 연관지어 연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학과목에 접근했다기보다는 서로 분리된 지식의 분야로써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다시 말해 복음주의적인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지성적인 지위보다는 직업적인 지위를 갖는 것을 의미했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과학자들은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과학적 논쟁을 지배했던 경쟁적이고도 고도의 이론적인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복음주의자들의 과학적 사고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과학에 대한 신학자들의 분열과 혼란은 복음주의 과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서로를 연결할 끈은 사라졌고 복음주의 진영에 있던 과학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20세기의 대격변에 의해 초래된 재난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적인 지성적 급소에 영향을 주었다. 즉 세상에 대한 지식과의 관련 속에서 성경의 지혜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을 연구하려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혼란은 복음주의 진영이 오늘날 과학과 신앙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지속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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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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