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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역사

인류의 기원과 노아의 후손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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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과 노아의 후손들

포스트코로나 시대, 인류는 정말 성경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라랏산(NASA 항공 사진)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얼마 전만 해도 4차 산업 혁명을 이야기하고 AI를 이야기하고 마치 평균 수명 120세 시대가 곧 열리며 모종의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언론들이 달라졌다. 세균보다도 작은 겨우 바이러스 한 종류에 인류가 이토록 무기력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인류는 이제 문명의 어떤 대전환기를 맞는 것은 아닐까 보통사람들조차 무언가 진지하게 고뇌하는 모습이 주변에 많이 보인다. 그러면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와 기원과 본질과 역사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온갖 질병을 치유한다고 떠벌리며 신유은사 받았다던 인물들은 모두다 쥐구멍으로라도 들어가 버린 것일까? 진정한 치유는 이때를 위함이 아니었던가? 하찮은 바이러스 한 종류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정체가 드러나 버렸다! 치유술사들은 끽소리도 내지 않고 숨어버렸다. 

 

전통적 주일성수 조차 무참히 통제 받는 참담한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무거운 마음의 짐들을 속으로 품기 시작했다. 코로나19에 각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인류는 정말 성경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깊은 성찰에 빠지기 시작했다.

 

인류의 기원과 역사

 

정말 그렇다. 우리 인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류는 이 지구촌에서 어떤 여정을 지나며 살아왔을까? 그리고 어떤 미래를 맞는 것일까?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탁월한 외교관이요 국제정치학자로 노년에는 역사학자였던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 1892-1982)는 경직된 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 역사는 늘 그 해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강단사학자들보다 역사학의 아웃사이더나 딜레탕트들의 견해가 오히려 설득력을 가지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한 유일의 중원고구려비 발견이나 백제 초기 왕성 논쟁, 임나일본부 논쟁 등에 있어서도 정통 강단사학자들보다 아웃사이더나 딜레탕트들의 역할이 크고 논쟁 자체를 주도하는 것이 그 보기다. 한, 중, 일 세 나라가 역사를 보는 관점이 첨예하게 다른 것도 그런 이유다. 심지어 같은 한민족인 남과 북은 역사를 보는 눈이 얼마나 다르던가. 이렇게 역사는 늘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며 우리들에게 영감을 주고 재탄생을 기다린다.

 

역사 해석과 세계관

 

무엇보다 세계관은 그 역사 해석과 흐름에 일정한 변곡점을 제공하는 요소다. 그 같은 변곡점은 당대를 뛰어넘는 성현이나 군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임진왜란 의병장 55명을 길러낸 임진왜란(1592) 이전의 남명 조식(1501-1572)이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그리고 일제 시대의 안중근, 신채호, 안창호 같은 선각자들은 분명 그런 인물들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건국 논쟁, 건국 아버지 논쟁, 친중 사대주의, 소위 친일 토착왜구 논쟁과 같은 역사 해석 논쟁이 벌어진 것도 결국은 역사를 바라보는 세계관 논쟁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기독교에도 어떤 변곡점이 가능할까? 기독교는 그런 변곡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단단한 교리의 틀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리의 틀과 역사 추적은 조금 다른 영역이다. 교리 논쟁은 그 보폭이 한계를 가지는 반면 역사와 창조신앙과 기독교 사상과 자연세계(과학)와 같은 섭리적 영역 안에서는 여전히 열려진 영역이 많이 있다. 그만큼 하나님은 다채로우신 분이시요 피조물인 인간을 초월하신 창조주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같은 역사 해석과 세계관의 영역 속에서 창조와 구속 사이의 청지기로서의 사명감을 잊으면 안 된다.

 

우주와 생명 기원의 딜레마

 

기독교는 모든 기원을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의 책 성경에서 찾는다. 그렇게 기독교와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역사에 있어 몇 가지 변곡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변곡점은 일종의 딜레마로 다가온다. 특별히 성경 초기 역사에 이 3 가지 딜레마는 바로 필자가 논증한 적이 있는 (1) 아담과 하와 부부의 타락과 에덴동산 추방 사건(우주적 붕괴 발생, 창 3장) (2) 인류와 생명과 지구촌 생태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창세기 대홍수(지구적 대 변곡점 발생, 창 6-8장) 사건 (3) 태초 언어도 추적이 난해한 가운데 홍수 이후 일어난 바벨탑 언어 혼잡 사건(언어 혼잡으로 인한 역사 추적과 해석의 대 혼란 발생, 창 11:1-9)이다. 문제는 이 사건들이 환원할 수 없는 사건들이기에 인류는 창세기 전반부(창 1-8장)에 대한 온전한 해석의 길을 상실해 버렸다. 일종의 군웅할거식 (타당하고 가능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홍수 이후 노아 후손들 계보를 증거해야 하는 이유

 

따라서 필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타당하고 가능한) 복음주의적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고 수용한다. 진실을 추적해 검증하는 것 자체가 반증 가능 장치가 있는 자연과학 수준만큼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투구식 논쟁은 무익할 뿐이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홍수 이후는 다르다. 이제 성경이 창세기 전반부(창 1-8장)를 포함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계시임을 증거 하는 길은 홍수 이후의 역사적 추적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 권위의 변증을 위해서도 결코 방치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세상에는 반성경적 온갖 인류 역사 해석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 기원을 다룬 수많은 고대 역사서 가운데 보편적인 인류(종족과 국가 기원)의 분산 계보를 소개한 책은 성경이 유일하다. 홍수 이후 인류 계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적하여 증거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인류 분산 계보를 남겨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책의 초월적 권위를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진리가 없다면 어떻게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노아의 후손들

 

그렇다면 노아의 후손들은 어디로 흩어져갔을까? 또한 심지어 우리 민족의 흔적도 이 성경을 중심으로 추적할 수 있을까? 성경 속 노아 후손들은 정말 세상 모든 민족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뿌리이고 토대가 될 수 있을까?

 

성경은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5:32; 창 9:18). 그 세 아들의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다. 그리고 그 세 아들은 모두 16명의 아들을 낳았다(창 10장 참조). 대체로 성경을 살펴보면 노아가 머물던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노아 16 후손들의 진출로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경적 근거는 역사적 증거와 많은 부분에서 유연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좀 더 깊이 추적해보아야 하는 부분들도 많이 있고 너무 오래 전 일이라 때로 외삽(外揷)이 필요하고 영원히 추적 불가능한 부분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궤적을 추적해 보는 것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과 타락과 구속의 여정을 보여주는 계시일 뿐 아니라 인류 최고 역사서이기도 한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는 강력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성경을 기본 바탕으로 노아의 16 후손들에 대한 역사적, 고고학적, 문화적, 언어적, 지리적, 계시적 경로를 추적해 보고자 하는 이유다. 필자는 이미 이 내용을 오래전 언론에 소개한 바 있다. 이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으며 다시 한 번 새롭게 확인하고 정리한 내용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계속>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전 김천대-평택대 겸임교수, 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