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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역사

한반도 최초 전래 성경은 어디로부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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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 전래 성경은 언제, 누구로부터였을까?

 

 

 

한반도에 최초 유입된 외국어 성경은 언제, 누구로부터였을까?

필자는 아마도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와 네스토리우스(경교) 선교사들의 중국 입성 이후의 어떤 시점에 성경의 한반도 유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 시대 이미 지금의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바닷길은 열려있었다. 특히 백제와 가야는 일찌감치 해양으로 진출한 국가였다.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 출신이었고,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박사 고흥에게 한국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케 했으며 4세기 이미 일본 남부와 중국 요서, 산둥반도뿐 아니라 서남아시아까지 진출할만큼 대단히 역동적인 "다문화국가"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했다. 한성 백제는 지금식으로 말하면 해양을 개척한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적으로 열린 국가였던 셈이다. 이때 한반도가 기독교를 접하였다면 경교가 아닌 분명 사도들이 전한 그 복음(사도 도마 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전래에 대해 침묵하던 국내 주요 교회사학자들도 경교 전래에 대해서는 그 충분한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김양선 목사는 신교(新敎)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경교(景敎)가 신라와 고려조에 전래 되었다고 단정하였다. 경교가 635년 중국에 전래된 이래 845년 외래 종교에 대한 대 박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약 200여 년 간 경교는 당(唐) 전토의 유력한 종교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당과 밀접하게 교류를 하던 신라는 당 수도 장안(長安)에서 유행하던 것이라면 신라에 수입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경교도 유입되었을 거라고 보았다.

 

이때 어떤 식으로 든 성경을 접하고 한반도로 들여온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문헌 기록에 남지 않았을 뿐이다. 당의 수도 장안에 알로펜 일행이 도착한 이듬해인 선덕여왕 4년, 당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한 기록이 있다. 이후 수많은 신라 사신들과 상인들과 유학생들이 당에 드나들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경교를 몰랐을 리가 전혀 없다.

 

일본 고대 기록인 《續日本書記》 〈성무천황기〉에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김양선 목사는 고든(E. A. Gordon)의 저서를 인용하여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십이지상(十二支像)이나 페르시아 무인상, 경주 석굴암 전실(前室)양벽에 부조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 중 두 상을 페르시아 무인상으로 보았고 석굴내벽에 부조되어 있는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 십나한상(十羅漢像), 범천(梵天) 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의 의문(衣紋)과 발에 신은 샌들, 손에 든 유리잔 등을 모두 경교의 영향으로 서술하였다. 195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경교식 십자가도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다보탑을 비롯한 불국사 전체가 한반도 불교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독특한 양식을 지니는 것은 실제적 설계자가 어떤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는지 자세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문헌 기록에 근거한 외국어 성경 유입에 대한 독보적인 자료를 수집한 학자는 단연코 고 이응호 박사(서울대 졸, 명지대 명예교수, 전 성결대 이사장, 전 교회문화연구원 원장, 문학박사, 서대문 성결교회 장로)라 할 수 있다.

 

언어학자요 장로였던 이 박사는 자신의 저서 <한국에 처음 유입된 외국어 성경>(성결문화사 간, 1993)에서 1916년 9월 5일 전래된 영어 성경과 모리슨, 독일 출신의 구출라프 선교사, 영국 출신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 등이 전한 중국어 성경들의 유입 과정, 일본어 성경의 유입 과정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박사의 귀중한 문헌 자료를 이어 후학들의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글: 조덕영,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