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신학 질의 응답

부정신학이란 무엇인가요?(조덕영 박사)

728x90

부정신학이란 무엇인가요?(답변: 조덕영 박사)

하나님에 대해 교회는 묘사할 수 없었기에 주로 추상적 상징을 교회건축에 활용하였다

 

 

부정신학이란 무엇인가요?

 

 

1) 부정신학이란?

부정신학은 신비주의 신학에 속한 신학으로, 무한한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력 너머에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신학을 말합니다.

 

2) 부정신학의 기원

이 같은 부정신학의 기원은 기독교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카고대의 버나드 맥긴은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서방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3, 4세기 시작되어 12세기까지 꽃을 피웠다고 보며 13-16세기를 신비주의의 개화기로 이때 신비주의의 고전적 학파들이 생겨났다고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신비주의는 그 역사와 뿌리가 깊다고 볼 수 있지요. 이 역사 속에서 성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신비주의 속에 관여합니다.

 

3) 기독교 신비주의- 신인합일의 열망

그런데 맥긴이 3세기를 기독교 신비주의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us, 175-250)의 두 제자였던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해석의 달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Origen, 185-254)과 신플라톤학파의 실제적 창시자 비기독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 205?-270)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들에게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며 현상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합일(合一)에 대한 신비적 열망이 나타나는데 플로티노스는 감각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 사이의 합일, 즉 인간의 혼은 탈자(脫自)를 통한 절대적 일자(一者)와의 합일을 이룬다고 봅니다.

 

4) 오늘날의 신비주의

이 같은 합일의 갈망은 과학기술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비주의의 근간을 이룹니다. 초월자이신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개념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지요. 이 같은 신비주의 속에는 전지전능하신 인격자이신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과 플라톤적인 선의 이데아(Idea),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만유의 목적인 누스(Nous)의 개념이 혼재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비체험가들과 신비주의자들도 이런 기독교의 하나님과 철학적 하나님을 혼동하는 체험(즉 주관적, 개인적 체험)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필로(주전 20년 경~주후 45년 경)와 부정신학

이 같은 혼돈을 일찌감치 간파한 종교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저술이 남아있는 최초의 저술가로도 유명합니다.  철학서의 최고 도서관이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출신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필로(Philo)는 신은 인간 오성(understanding) 너머에 지고지순한 분이기에 무한하고 이해 불가능하며 형언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지요. 따라서 필로가 볼 때 유한한 인간이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것이었습니다. 신에 대해 인간이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신은 이러이러한 분은 아니다’는 식의 서술만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정철학에서 파생한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입니다.

 

필로는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접촉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70인역 성경을 축자적으로 영감된 책으로 여겼으며 예수님과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인물입니다. 즉 성경(구약)의 창조주를  플라톤의 '이데아'와 '로고스'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늘 철학과 신학계에서 주요한 사상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6) 인간의 사고 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므로 긍정(kataphasis)에 대조되는 부정(apophasis)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려한 이 같은 방식은 6세기 아레오바고의 관원 디오니시우스(17:34, 디오니시우스)의 이름으로 저서를 유포시킨 익명의 철학자를 통해 훗날 동방정교회의 수도원 전승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졌습니다.

 

7) ()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일체의 규정을 초월해서 선()이라고도 존재라고도 할 수 없지요. 신은 초선, 초존재로 일체의 형용과 규정을 부정하는 것만이 신에 대한 이해의 길이지요. 신을 아는 자는 <무지(無知)의 지>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부정도(via negativa)> 또는 <부정신학>은 이후 오랫동안 신비신학의 방법론이 되었습니다. 이 전통을 이어 받은 희랍 정교회에서 수도원 운동이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8) 스콜라 신학자 존 스코투스의 신학 안에도 무한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함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명제가 보입니다. 이렇게 부정 신학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아는 하나의 신학 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