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라는 표현에서 "미래의 신학"으로(몰트만의 창조 신앙은 성경적인가? 4)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몰트만의 창조신앙은 성경적인가?(4)
1)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
2) ‘창조하시니라’(‘바라’, bara)라는 동사
3) “태초에”라는 표현에서 미래의 신학으로
이 표현에 대해 몰트만은 태초가 그 속에 정립되어 있는 절대성 속에서 시간 속에서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 대한 절대적 전제 조건을 시간의 태초라고 의미한다고 보았다.
피조물의 시간은 빛과 낮과 밤의 주기의 생성과 함께 시작한다. 창조자가 만드는 모든 창조의 사역들은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하느님이 나누셨다”는 말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연속하여 일어난다.
창조 자체만이 그것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그런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 한 번에 일어났으며 모든 면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태초는 아무 전제 없이 정립되어 있다.
이 태초의 창조는 시간의 창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몰트만은 그것은 변화될 수 있는 창조(creatio mutabilis)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파멸과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열려 있으며 사멸과 완성에 대해 열려있다.
결국 몰트만에게 있어 개별의 창조와 창조 전체는 개방되어 있는 체계(offenes system)로 이해된다. 몰트만의 신학이 필연적으로 미래와 연결되는 이유다.
여기서 “체계의 개방성”이란 (1) 체계는 그의 변화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지닌다. (2) 미래에 이루어질 그것의 상황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통하여 완전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다. (3) 그것은 다른 체계들에 대하여 소통적이다. (4) 체계의 마지막 상태는 처음 상태와 다르다.
자연과학적으로 볼 때 이 “폐쇄 되어 있는 체계”는 양적인 진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로, 그 자체에 있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 체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진술할 수 없는 데, 그것은 모든 관찰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보의 교환이 가능한 개방된 체계에 대해서만 진술할 수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심각한 “미래 신학”으로 몰트만 신학을 유도한다. 정통신학의 하나님은 시간의 영역 밖에 존재하시는 초월의 하나님이다. 하지만 몰트만은 하나님을 시간 속에 예속시킴으로(Moltmann, Theology of hope, pp. 29, 30-32, 42)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미세 균열을 일으키며 정통에서 벗어난 탈선의 신론을 가지고 “희망의 신학”을 전개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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