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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신약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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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는가?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3)

글을 시작하며

 

율법주의자들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율법 준수를 중요한 구원 교리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청교도들은 눅10: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을 근거로 예수님도 율법 준수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고 하면서, 구원의 과정에서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이나 청교도들의 이런 자신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를 오석했기 때문이며, 오석의 원인은 헬라어 원문에 대한 무지와 전후문맥을 통해 예수님과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메시지를 놓쳤기 때문이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예수님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신 말씀은 율법사에게 율법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생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사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염두에 두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를 다시 쓴다면, “너는 율법을 지속적으로 온전히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없다”가 될 것이다.

 

율법사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인정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율법교사가 예수께 질문한 목적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시험하려고 한 것일까? 율법교사의 질문 이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주목하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

 

율법교사가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설령 그가 이 말씀을 듣지 않았다 할지라도, 누가는 전후문맥을 통해서 율법교사의 시험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영생에 관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생의 절대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그러므로 인간의 영생(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그들의 지혜와 슬기로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며, 반면에 무지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임하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께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도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없다. 물론 이 말에 대해 율법주의자들이나 청교도들은 신4:1(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로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의 부르심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했으며(히11: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다윗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며 그분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에 의지했다(시51:10-11/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러나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유다 백성이 그토록 자랑하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파괴되자, 유대인들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전에 대한 깊은 상처와 좌절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전’ 대신 ‘토라’(율법)에 의지하며 집착하기 시작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세운 회당에서 이들은 열심히 ‘토라’(율법) 읽기,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성전 파괴로 인한 민족적인 좌절감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 후 1~3차 포로귀한 과정에서 성전이 다시 재건되고 제2성전 시대가 열렸으나, 유대인들은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너무 초라한 제2 성전에 마음을 주지 못하며, 성전 제사보다 ‘토라’(율법)에 더욱 매달렸다.

 

포로기 후 시기인 말라기 시대에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성전 제사를 등한히 한 것도(말1: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물론 하나님을 총독보다 가볍게 여겼던 제사장들의 타락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제2 성전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이 한몫했을 것이다.

 

이렇게 ‘토라’(율법)를 중요시하는 분위기는 포로 후 시기 이후 중간기에도 계속되었고, 이때 구전 율법(장로의 유전)이 집중적으로 양산되었으며(참고로 예수님이 공격하신 것은 성문 율법이 아니라 장로의 유전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언제 부터인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오염, 죄책에서 벗어나며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사 제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는 속죄 제사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속죄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정결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정결 의식을 행했기 때문에 오염에서 정결케 된 것이 아니라, 정결 의식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정결함을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속죄 제사나 정결 의식은 죄를 용서하시고 오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를 믿는 믿음의 표시이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가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된다고 착각했으며, 결국 이 착각으로 말미암아 율법 지킴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만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까닭은 율법 지킴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것도 율법을 위선적으로 지키는 척함으로써, 자신의 의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에 대한 이런 잘못된 성향이 유대인들에게 고질화되어 있었다. 아마도 예수를 시험하려 했던 율법 교사도 율법을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기면서 살아 온 것이 몸에 배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영생의 소유는 율법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자기도 모르게 말해 버린다. 왜냐하면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에서 “얻으리이까”로 번역된 “klhronomh,sw”(클레로노메소)의 원형 “klhronome,w”(클레로노메오)는 “상속하다/상속받다”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상속” 받는 것임을 율법사가 몰랐다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말해 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한글 성경에서는 “klhronomh,sw”(클레로노메소)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제대로 번역했다.

 

NIV: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KJV: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NASB: "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어떤 이로부터 무엇인가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조건은 그 상속자의 아들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율법사가 한 말을 다시 번역하면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으리이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사가 예수께 한 질문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며, 대단히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을 하여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들에게 주시는 절대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율법사도 “klhronomh,sw”(클레로노메소/상속받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말로 자기도 모르게 이것을 시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율법사는 “영생”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아들에게 거저 “상속”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에 집착한 나머지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는 자신의 “행위(공로)”를 영생의 수단으로 내세움으로써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를 질문한 율법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행위(공로)”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영생”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를 내세우는 대신에, 영생을 거저 상속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 앞에 그분의 아들로 아무 조건 없이 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율법주의자들이나 청교도들이 율법 준수를 “영생”과 관련시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영생”을 부인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들이 “영생”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10: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원문을 보지 않으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청교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눅10:28이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석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눅10:28을 결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0.00001%만 있었어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율법을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신에 인간이 율법을 더 잘 순종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가르치시며 훈련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헬라인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미련함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0.00001%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율법을 행하면 살 것이라는 의미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을 다 순종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의 길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율법사에게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다시 말하면 율법사 자신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율법을 부분적으로 지키며, 또 율법을 다 지키는 것처럼 흉내 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수준의 율법 지킴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완벽한 율법 지킴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을 율법사에게 하신 것이다.

“행하라”로 번역된 “poi,ei”(포이에이)는 원형 “poie,w”(포이에오)의 ‘현재 명령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형’을 만나면, 이것이 ‘단회적인 명령’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명령’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이 구별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전후문맥과 명령의 내용을 잘 살피면 쉽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로 가라”는 명령이나, “어떤 물건을 집어라”는 명령은 어떤 장소로 한 번 가면 되는 명령이며, 어떤 물건을 한 번 집으면 되는 명령이다. 이런 성격의 명령을 ‘단회적인 명령’이라고 한다. 반면에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든지, ‘이를 행하라’는 명령은 한 번만 순종하면 끝나는 명령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다. 이런 성격의 ‘현재 명령형’을 ‘지속적인 명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하신 “이를 행하라”는 명령은 율법을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끝까지 행하라는 의미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율법사가 설령 ‘이웃 사랑’의 율법을 잘 순종했다고 자부한다 할지라도, 그는 평생 동안 ‘이웃 사랑’을 끝까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잘 순종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율법사는 아마도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지한 질문이 예수께 들통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사는 끝까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절)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더 어리석은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만다. 율법사는 예수님 앞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자신이 완벽하게 지키고 있음을 입증하려고 바보 같은 시도를 한 것이다. 뒤에 율법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더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글을 마치며

 

오늘 날 청교도들이 율법 준수를 중요한 구원 교리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처럼 “무엇을 하여야”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짓이다. 왜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영생”에 “율법”을 끼워 넣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영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인간의 부패한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이생의 자랑”을 전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싶은 자들에게는 십자가를 훼손하는 “무엇을 하여야”의 율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이들에게도 바른 신앙 고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이들은 자신들이 바른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마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막9:29).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고백의 내용만 놓고 보면 정답이다. 그러나 “주는 그리스도이니이다”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를 고려하면, 베드로의 고백에는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에 바른 신앙 고백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처참하게 죽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에 “십자가”를 더해 주신다(막9: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그러나 놀랍게도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칠게 붙잡고 꾸짖었다(막8: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8:32에서 “붙들고”로 번역된 “proslabo,menoj”(프로스라보메노스)는 거만하고 거친 몸짓으로 상대방을 움켜잡고 윽박지르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멱살을 틀어잡고” 정도가 될 것이다. 또 “항변하매”로 번역된 “evpitima/n”(에페티만)의 원형 “evpitima,w”(에프티마오)는 “항변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명령하다’(command, order, give a command), ‘꾸짖다’(rebuke)의 의미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인 행동을 묘사한 “붙들고 항변하매”는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의역한다면, “드러내 놓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거칠게 틀어잡고, 명령하듯이 꾸짖었다”가 될 것이다.

 

율법 준수를 구원 교리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흠이 없고, 온전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이해처럼 “십자가”없는 잘못된 신앙고백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영생‘에 계속 “율법 더하기”를 고집한다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영생”을 죄인들에게 은혜로 주신 예수님을 거칠게 틀어잡고, 명령하듯이 꾸짖는 어이없는 짓을 하는 꼴이 될 것이며, 그 결과는 불을 보는 듯 분명하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이창모 목사는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