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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현대신학자 몰트만과 바르트가 본 악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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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이 본 악의 문제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 받지 않았더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되뇌인다.

요나스가 아우슈비츠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을 포기했다면, 몰트만은 하나님 표상을 수정한다. 그는 하나님을 ‘무감정의 신’이라는 오해에서 건져내며, 귀납적 추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신론의 전통도 비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는 그는 ‘고난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고난’을 역설한다.

하지만 “고난을 하나님 안에 수용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문제는 몰트만에게 있어서도 난제였다.

몰트만적 견해는 신정론을 종말론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모든 불의는 사라지고 눈물과 고통과 죽음조차 없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으며 악은 당연히 사라진다.

어찌 보면 악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더라도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어찌하느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종말론적 미래에 모든 것을 미루어 놓으면 해결될 듯 보이던 것이 지옥의 영벌 문제에 부딪히면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일(knowing God)이란 악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칼 바르트의 신정론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정론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치명적 결함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즉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행위에 모든 것을 의지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가 볼 때 모든 사건이 모두 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스토아적 개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맺으시는 언약 의지로 보았다. 바르트가 볼 때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말씀 사건을 통할 때 악의 문제조차 해결의 근원을 찾게 된다.

그렇게 해서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사악한 신’의 선포자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난을 경험하고, 실존적 피조물이기에 상처와 위험을 겪기 마련이다. 바르트는 이를 죄 때문이 아닌 ‘무(無)’로 구분하였다.

이로써 악과 고난을 오로지 인간의 타락 탓으로 돌리거나 인간의 도덕문제로 제한하려는 관점을 저지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전체 화해 사역을 부정하는 근본 죄악이라며 창조의 어두운 면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르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답게 섭리론을 재정립하면서 악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보편주의자라는 의심을 받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다운 새로운 접근인 동시에 악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초월적 해석의 프레임에 자신의 생각을 가두어 버린 것이 아닌지 일부 의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고뇌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해석적 고뇌는 오늘날 세상이 보여주는 온갖 혼란과 모순 속에서, 그와 더불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우주와 생명과 믿음의 절묘한 삼중창 안에서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모든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만만치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케 만든다.

하지만 낙심은 금물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비장한 심정으로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했다.

각각의 자기 짐은 당당하게 져야한다(갈 6:5).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다(갈 6:9).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