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목사
손정도 목사 그리고 손원일, 김일성
“나는 비단이 아니라 걸레의 삶을 살겠다”
과거 KBS 1TV는 성탄 특집 임시정부 100년 기획(2부작)으로 ‘걸레성자 손정도’편을 방송했다. 손정도(孫貞道, 1872-1931) 목사는 독립운동가요 감리교 목사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훗날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 및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손원일 제독(장로)가 그 아들이다.
그는 임시정부 활동 이전부터 안창호와 친분이 깊어 안창호와 흥사단을, 박은식과 대한교육회를 조직하는데 각각 협력했으며 또한 무장단체 의용단과 한국노병회를 김구와 함께 조직했다. 윤치호 일가와는 사돈으로, 윤치호의 이복 동생 윤치창이 그의 맏사위였다. 자는 호건(浩乾), 호는 해석(海石), 문세(文世)로 평안남도 출신이다.
명 배우 남궁원의 아들로 한때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홍정욱 전 의원도 이 가문의 손주 사위이다.
여기 손정도 목사 그리고 그 아들 손원일 제독과 김일성의 기구한 인연을 소개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손정도 목사)
손원일 장로(전 초대 해군 제독)
대한민국 군목 제도를 창설한 초대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장로)의 국가사랑과 나라수호정신
'아! 이 귀한 해군과 이 소중한 해병대!’
-손원일 제독-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해군과 해병대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해군, 해병과 군종목사 제도는 바로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장로(제독, 1909∼80년)로부터 기인한다. 1948년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 해병과 대한민국 군종(군목)제도를 창설했다.
항일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
손 제독은 1909년 평남 증산면에서 손정도(1872∼1931)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재미의사 손원태, YWCA회장(1975-1982)과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지냈고 제 8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손인실 여사가 그의 동생들이다.
손 목사는 한때 정동제일감리교회 담임을 지냈으며 목회와 독립투쟁을 병행했던 인물이었다. 유관순 여사가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던 시절 담임이 바로 손정도 목사였다. 이후 일찌기 상해로 망명하여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대한적십자회를 창립하였으며,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요 독립운동가였다.
훗날 북한의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핍박했던 김일성조차 자신이 손정도 목사의 도움을 받았었음을 자기 책에 스스로 고백했을만큼 손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손 목사에 대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요 “한 평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애써 무시하는 평양 권력 상황을 볼 때 상해임시정부의 요직을 맡았던 손 목사에 대한 김일성의 이 같은 평가는 작금의 평양 권력자들을 혼동에 빠뜨리고 당황케 만들 주목할만한 언급이 아닐 수 없다.
남한이 정식 독립운동가(2007년 4월, 국가보훈처 지정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칭송하는 손 목사에 대해 김일성은 생전에 ‘손정도목사 기념사업을 추진하라’는 유훈을 남겼으니 참으로 손 목사는 남북에서 공식 인정 받는 애국지사가 되었다.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 가족
손원일 제독의 동생인 고 손원태 박사(재미 의사, 장로)가 유문중학교 재학 중, 같은 반에는 김형직의 아들인 김일성(당시 본명 김성주)도 있었다. 나이는 김일성이 두살 위였으나 둘은 형제처럼, 소꼽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손정도 목사는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김형직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강돈욱 장로가 운영하는 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때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 집사의 유언장 하나를 들고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 길림에 있는 유문중학교에서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인 손원태와 같은 반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김일성이 손 목사가 중국 길림(吉林)성 용정(龍井)에서 목회활동을 할 때 자신의 어머니 강반석 권사를 따라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하며 손 목사의 신세를 지면서 훗날 손원일 제독의 동생 손원태 박사와 의형제처럼 지내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1991년, 60여년 만에 손박사를 만났을 때 손 박사의 누이 손인실 여사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인해 김정일조차 손원태박사와 그 가족들을 극진히 대우하였다.
손원일 제독과 6. 25
손 목사는 나라를 빼앗긴 뒤 "바다에 미래가 있다. 비록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에 영향을 받아 손 제독은 중국 중앙대에서 해양학을 전공하고 일찍부터 외국을 항해하는 배를 탓으며 아버지의 독립 운동을 돕다 만주와 조국땅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과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 되자 바다를 지키는 해군이 되기로 결심한다.
손 제독은 해방 직후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했고, 6·25전쟁 때는 해병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등 국난 극복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6.25 당시, 소련의 막강한 지원을 받았던 북은 한국 해군이 군함도 없고 장비가 빈약한 것을 파악하고 3.8선 뿐 아니라 후방 부산을 일거에 점령하기 위해 1천톤급 배에 600여 명에 달하는 특수부대를 태워 38선과 바다에서 수륙양면전을 편다.
하지만 이때 우리나라에는 작은 군함 한척이 있었다. 바로 겨우(?) 450톤 급의 해군 최초 군함 백두산호였다. 이 배는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이 1949년 6월 군함 구입을 위해 참모총장부터 말단 수병까지 월급의 10%를 모금하는 운동을 벌여 마련한 배였다. 당시 수병의 증언을 들어보면 월급의 10%을 떼어가도 불평하는 장교나 병사는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장교와 부사관 부인들이 빨래나 바느질 삯으로 모금운동에 보태고,병사들도 고철을 모아 돈을 더했다. 장교 월급이 겨우 쌀 한말 가격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손 제독은 최초의 군함 구입을 위해 자신의 사비를 기꺼이 털었다. 이렇게 성금 일만 오천달러로 사들인 이 중고 군함은 6.25때 부산의 턱밑까지 침투해 내려오던 북의 군함을 극적으로 물리치고 우리 조국을 지킨 소중한 배가 되었다.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과 수군이 있었다면 6.25때는 손원일 제독과 해군, 해병대가 있었다. 손원일 제독에게 있어 해군과 해병대는 ‘이 귀한 해군과 이 소중한 해병대’였다.
국군의 날과 현충일, 국립현충원을 만든 사람 손원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도우심이었다. 이후, 손 제독은 6.25 전후 복구기에는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국군의 날, 현충일 제정, 동작동 국립현충원 및 국방대학교 건립 등 군 현대화에 앞장섰다. 자랑스런 이 같은 나라사랑 정신은 오늘날 용맹하고 멋진 해군, 해경, 해병 뿐 아니라 육군, 공군을 포함한 모든 대한민국국군의 조국수호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서해바다를 지키다 해군 전역한 우리 아들도 수고했다^^
-2019년 원고-
조덕영 박사(신학자, 칼럼니스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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