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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예루살렘, 다윗 이전 팔레스틴 땅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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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해안가에 포진한 블레셋(팔레스틴)

다윗 이전 예루살렘은 블레셋(팔레스틴)의 땅이 아니었다.

블레셋이라는 이름은 일찌감치 성경에 등장한다(창 10:14, 21:32,34; 26:1-18; 출 13:17; 15:14; 23:31). 이들은 오늘날 아랍 민족이 주장하는 아브라함 후손인 셈족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었다.

블레셋은 주로 가나안 해안가에 살던 7 부족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함족 미스라임의 후손으로 애굽과 크레타(그레데) 섬 등을 떠돌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주로 해안가를 중심으로 포진하였다.

욥바의 일몰 풍경©조덕영

이들 블레셋 민족은 아브라함 일행과 일찌감치 조우(遭遇)한다. 블레셋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가나안의 북서부 욥바로부터 가사 남부까지 해안 평야를 따라 정착한 민족이었다(창 21:32,겔 16:57).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등이 이 지역의 주요 5대 성읍이었다. 이들은 함의 자손으로 일찍이 지중해의 그레데(갑돌) 섬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여(렘 47:4; 암 9:7) 원주민 아위 족속을 멸망시키고(신 2:23) 가나안 원주민 역할을 했던 강력한 해양 민족이었다. 오늘날 이들 5대 성읍은 팔레스틴 자치(가자) 지구와 이스라엘 영역 등으로 갈라져 있다.

 

아스글론 국립공원 로마 유적

성경 역사 속 아브라함과 이삭은 가데스와 술 사이 곧 지금의 가자 지역 근처 그랄 땅을 다스리던 블레셋 왕 아비멜렉(Abimelech, ‘아버지는 왕<멜렉>이시다’는 뜻)과 대면하였다. 아비멜렉은 아마 애굽의 바로(Pharaoh)나 로마의 가이사(Caesar)와 같은 블레셋 통치자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뾰족한 턱수염과 동물이 어깨에 매달린 이 남성 인물은 아마도 한때 컬트 스탠드의 일부였다. 이 조각은 기원전 1000 년경 여부스 사람들에게서 다윗 왕이 정복 한 지역인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출처 Z. Radovan, www.biblelandpictures.com

다윗 이전 예루살렘의 주인들

블레셋과 같은 함의 후손인 가나안은 시돈과 헷을 제외한 가나안의 아홉 아들들 이름과 세거지(世居地)가 창세기 10장 15-19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가나안의 아홉 아들들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할 즈음 이미 그 땅에 정착하여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들의 조상들이 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예루살렘에 정착한 가나안 부족은 여부스족(Jebusites)이었다. 이들은 헷족과 더불어 일찌감치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사사 시대에도 여부스는 여전히 지금의 예루살렘 주인이었다(사사기 19:10). 이렇게 다윗의 통치 이전 이스라엘 민족은 여부스 족을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이 통곡의 벽 위에 바로 모스크가 있다.©조덕영

다윗은 이곳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하고 예루살렘으로 개칭한다(수 18:28; 삿 19:10; 대상 11:4; 삼하 5:6). 하지만 다윗의 정복 이후에도 여부스 사람들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시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번제단을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Araunah)의 타작마당과 소 값으로 은 50세겔(약 570그램)을 주고 정식 구입한다(삼하 24: 16-25; 대상 21:15, 18-28). 여부스 사람들은 솔로몬 시대에도 남아 왕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왕상 9: 20-21). 그리고 훗날 이곳에는 성전이 세워졌다.

이 여부스 족의 도시가 바로 오늘날 인류 역사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 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위대한 아모리 왕 함무라비가 서있는 바빌로니아 신을 묘사 한 비석의 윗부분. 비석의 바닥 부분에는 함무라비 법전 텍스트가 있다. /출처 new world encyclopedia

성경을 보면 아모리족(Amorites)도 가나안 땅의 가장 유명한 족속 중 하나였다. 때로 아모리족은 가나안족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곤 했다.

팔레스틴의 상황을 묘사한 주전 14세기 중엽 쓰여진 애굽에서 발견된 유명한 토판인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은 이들 팔레스틴의 아모리족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겔 16:3)하여 아모리가 북방 헷과 대조되어 에스겔 선지자 당시 남쪽 수리아와 팔레스틴의 유력 족속이었음을 알려준다.

아모리족의 번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부 아모리족은 주전 23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이주하여 수메르의 우르 제 3왕조를 붕괴 시키고 바벨론 지역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 아모리족 출신의 가장 유명했던 통치자가 바로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왕(주전 1792-1750년 경)이었다. 성경 창세기 등 토라에 등장하는 시혼, 옥, 마므레도 모두 아모리 족 출신의 통치자였다(창 14:13; 민 21:21; 신 31:4).

아모리족의 바벨론 통치는 주전 1590년경 같은 가나안 후손인 히타이트족이 바벨론 지역을 침략해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아모리족은 소왕국 형태로 존속한다.

우리 한반도의 고조선이나 삼한의 100개에 달하던 부족국들 그리고 가야 연맹은 통치자들의 이름이나 통치연대가 명확하게 남아있지를 않다. 겨우 2천 년 전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아모리(아무루) 왕국은 주전 14세기부터 주전 13세기까지 통치자와 그 통치연대가 남아있을 만큼 만만찮은 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주전 1천 년경 아람 족이 바벨론에 진출하면서 그 정치적 영향력이 막을 내리게 된다.

옥으로 대표되는 아모리 족은 키가 얼마나 컸던지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 나무 같았다”(아 2:9)고 묘사되고 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긴 아모리(아무리) 족은 창조주 하나님의 참된 경배를 방해하던 족속(수 24:15; 삿 6:10)이었다.

예수님께서 출입하셨던 예루살렘의 성전산(마 21장)에 모스크가 들어섰다.©조덕영

오늘날 예루살렘은 여전히 정치적, 종교적 긴장 지역이다. 놀랍게도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 세 종교의 성지요, 이스라엘과 미 전 대통령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선포하였다고는 하나 현실은 정치적으로 이스라엘과 아랍인과 팔레스틴이 공유하는 땅이다. 예루살렘의 정황을 모르는 사람도 성전산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면 대단위 공동 묘지를 중심으로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지역과 회색빛 전혀 다른 팔레스틴 지역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역사와 정치와 종교에 대해 여러 모로 묵상케 하는 땅이다. 이 땅에 평화가 임하기를.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