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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신앙과 역사-르네상스, 기계론, 계몽주의, 현대신학 태동, 역사적 예수 논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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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르네상스, 기계론, 계몽주의, 현대신학 태동, 역사적 예수 논란 등)

 

A. 르네상스(14세기~16세기)와 사상

르네상스의 대표적 인물, 다 빈치(1452-1519)

1. 르네상스의 의미

1)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하는 생활과 사고방식의 전환(“르네상스가 근대를 낳았다!”)

2) 문예 부흥:

학문 또는 예술의 회복, 재생, 부활, 부흥, 각성이라는 의미

3) 어원:

재생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

4)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으로 확산

5) 기독교적으로도 중세 격동의 시대

르네상스 탄생지 피렌체("꽃의 도시") 풍경

6) 하지만 르네상스 이전과 이후를 <암흑>이라는 단어로 구분하거나 르네상스가 만든 모든 것이 무조건 사람에게 좋은 것이었다는 구분법은 바람직하지 않음

7) 모든 선한 것이 현대 인본주의의 탄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후대 계몽주의자 인본주의자들의 편견임

2. 르네상스 운동의 종교성

1) 신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율성 속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적 인간 인격 종교 추구.

2) 유럽의 세속화 : 종교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3) 즉 인문주의(휴머니즘)의 잉태 시기(휴머니즘이라는 말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르네상스는 그런 사상이 잉태된 시기)

4) 사상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466년 경~1536년) 등장

에라스무스

(1) 에라스무스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중요한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즉 1500년대 중요한 인문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어떤 논문은 그를 인문주의의 왕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의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수도원에서 양육되었으며, 20세에 (다른 논문에서는 21세라고도 되어있다.) 정식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 배경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에라스무스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 계속적으로 연구하는 이유기도하다. 사실 그의 부친은 사제였다. 그리고 모친은 의사의 딸이었다. 그는 후에 자기시대의 교회를 원래, 원시 그리스도교의 단순한 신앙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 사람이다. 1516년 헬라어 신약성서를 발행하였고, 훗날 그것은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2) 에라스무스의 생애 중 중요한 발단달계- 유년기

에라스무스의 유년기, 기독교 신앙형성에 있어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12살부터 5년간 생활했던 데벤터(Deventer)에서의 학교생활이다. 이 기간동안 그는 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고전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사상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게 된 시기였다. 두 번째로는 ‘부모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 그가 그의 친구 세르바티우스에게 편지한 내용을 보면 ‘부모의 죽음’이 그의 신학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에게 있어 신앙 체험의 공통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젊은 날 죽음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두려워 떨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두려움’의 종류이다. 여기서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차이점을 볼 수 있는데, 루터는 그 두려움을 ‘은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에라스무스는 신앙적 교육과 훈육을 통해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까지 이어지는 근본적 다른 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시대적 배경

①르네상스

에라스무스가 살았던 시대는 ‘르네상스’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르네상스는 “재생”또는 “부활”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특별히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보다는 알프스 북부의 르네상스와 깊은 관련을 가졌다. 따라서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보는 관점과 교육 사상, 고전의 저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문학적 비평의 기술 습득은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영향 속에서 에라스무스가 스콜라 철학과 대립했다고 볼 수도 있다.

②인문주의

15세기 이탈리아 대학생들 사이에 통용되었던 일종의 은어로서 고전어와 고전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나 중등학교 교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가, 16세기 이후에는 교사만이 아니라 고전학문을 배우는 학생들과 연구자들에게도 확대 적용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러한 ‘교양’, ‘교육’, ‘학문’은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인문주의들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인간보다 우월한 신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인문주의들이 퍼지면서 이러한 관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에게 환영 받지 못하였고, 에라스무스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영향을 받아 오해를 받기도 한다.

(4)에라스 무스의 가장 중요한 사건 루터와의 논쟁 (자유의지론 대 노예의지론)

본래 에라스무스는 다른 어떤 인물보다 루터와 가까웠다. 하지만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당의 문에 “95개조 논제”가 게시되기 이전부터 에라스무스는 1516년 12월 프리드리히의 지도 신부였던 슈팔라틴으로부터 루터가 자신의 로마서 해석을 논의하면서 율법 전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은 이후 이미 루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95개조 논제를 본 후 루터주의자에게 편지를 썼다. 연옥에 관한 몇가지 점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일정부분 루터의 경해와 동일함을 나타냈다. 하지만 루터의 과격한 개혁과 극단적인 태도에서는 충고를 남기기도 했다. 1520년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내통하였다. 루터파라고 화살이 쏠리게 되고 그 오해는 풀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럴수밖에도 없었던 것이 에라스무스가 1522-1524년동안 교회의 관행을 풍자로 비판하는 내용의 저서를 썼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자이며 런던 주교였던 커스버트 턴스톨이 에라스무스에게 루터를 반박해 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왔고, 많은 주교들이 그랬기에 할 수 없이 에라스무스는 ‘자유 의지’에 대해 편지를 썼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의 내용의 각각 이러하다.

①에라스무스

플라톤적 이원론에 입각하여 인간이 육체와 혼으로 구성되었고, 인간의 혼은 다시 이성과 의지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이라고 한다. 자유의지가 구원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선악을 판별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 선을 행하고 추구하는 것은 자유의지이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가 구원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은총’을 아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정도 은총 또한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신명기 30:15-19절을 한 예로 들어 그는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16절 –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자유의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주장을 내 놓았다. 첫째는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선택권이 없는 인간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둘째로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구분되었다고 주장한다. 마가복은 14장의 말씀을 통해 만약 신이 모든 것을 한다면 유다는 필연적으로 배반했겠지만 유다는 자신의 의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루터의 관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일부분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판단했다.

②루터

루터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신의 선물이라는 점에서는 에라스무스와 같은 입장이지만, 타락의 결과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마저도 신의 뜻에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을 신과 사탄 사이에 놓인 예속적 존재라고 설명한다. 선을 행하는 것 또한 루터는 은총의 개입 여부로 보았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신에게든 사타에게든 속해져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인간 스스로가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 은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할 것은 루터와 에라스무스 둘다 ‘은총’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구원’이 차지하는 비중에 차이점이 있다. 에라스무스는 은총을 상대적으로 판단하였고, 루터는 은총을 절대적으로 파악하였다. 루터 또한 성경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는데 로마서 1장 18절 말씀을 통해 “신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 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모든 인간이 신의 진노 아래 있음을 뜻한다고 전제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루터는 인간 스스로의 인간 의지는 무가치하다고 이야기한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통해 “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인간이 율범이나 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읜총에 의해 거듭나게 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5) 유럽 사상이 두 노선으로 양분

(1) 종교개혁(1519년) 사상과 인본주의

(2) 헬레니즘(인간 중심)과 헤브라이즘(신 중심)의 양분 시작

3. 르네상스의 배경

세계 최초 대학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1) 초기 대학들(본래 성직자들의 대학) 등장(파리, 툴루즈, 몽펠리에,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파두아, 볼로냐, 나폴리, 리스본 등): 도미니크회 수사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나폴리와 파리대서 수학. 파리 교수(의지는 타락했으나 지성은 손상되지 않았다).<-> 우르반 4세(1263):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 금지

2) 15세기(1454년) 요한 구텐베르크 마인츠에서 라틴어 성경 최초 인쇄

3) 고전 번역 활발: 희랍어와 라틴어 연구(곧 철학과 초대 교부 연구 가능)

4)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작용(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플라톤<427?-347?>주의 시대로)

5) Ad fontes(근원으로): “원본 자료들”(고대 자료 연구 붐, 고대 영광 회복)

6) 라파엘로(1483-1520)의 바티칸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프레스코화(1510, 은총과 자연의 대조):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별자(particulars)

7) 미켈란젤로(1475-1564)의 다비드상과 말년 피에타 상의 어두움(인본주의적 자신감의 상실?)

8) 인본주의의 절망을 인식한 천재 다 빈치(1452-1519)의 비관론: 말년 프랑스왕 프란시스 1세(1494-1547)에게로 간 다 빈치의 낙담과 비관(=인본주의의 우울함을 상징)

유럽 금속인쇄의 시작을 알린 구텐베르크 동상(독일 마인츠)

B. 기계적 세계관 사상(15-17세기)

1) 기계적 세계관의 시작

16세기 전후하여 유럽 세계관의 "세계상의 기계화"(michanization of the world) 시작

2) 15-6세기 이전 상황

(1) 우주 신성(the sacred cosmos)의 인정, 신적 질서의 세계, 조화와 의미의 세계

(2) 인간 외적 초월적 법, 도, 원리, 규범, 우주의 이성, 로고스의 지배를 받는 세계로 보다.

(3) 케플러의 스승 티코 브라헤(1546-1601)

“인간은 적도 이하에서 살 수 없다. 거꾸로 살 수 없기 때문”

아이러니=> 무식한 사람들에 의해 무너져 버림(뱃사람!)

3) 15세기 이후 고대와 중세 과학의 무력화 시작

(1) 세계적 과학자들의 등장

쿠페르니쿠스(1473-1543),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케플러(1571-1639), F.베이컨​(1561-1626), 아이작 뉴턴(1642-1727) 등의 등장

https://blog.naver.com/davidycho/221769259404

 
 

근대 과학과 철학과 과학 혁명의 시조 그리고 경험론의 선구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과 신앙-16C 천재들 시대에 등장하다!(조덕영)

근대 과학, 근대 철학, 과학 혁명의 개척자, 경험주의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과 신앙, 16C 천재들의 시...

blo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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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근대 과학, 근대 철학, 과학 혁명의 개척자, 경험주의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과 신앙, 16C 천재들의 시대에 등장하다

16세기 유럽과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6 세기 서양과 우리나라에서는 탁월한 인물과 학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도대체 서양과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얼핏 살펴보아도 조선에서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율곡 이이, 기대승, 서애 유성룡, 이순신, 오성과 한음, 송강 정철, 조선 최대 여류시인 이옥봉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쏟아졌다. 비록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겪었음에도 16세기 조선의 선조 임금 시대(재위 1567-1608)는 탁월한 천재들의 시대였다. 서양에서도 걸출한 인물과 학자들이 나타났다. 대륙에서는 먼저 15C 태어나 16C 주로 활약한 종교 쪽의 코페르니쿠스(1473-1543)와 마르틴 루터(1483-1546) 그리고 16C 태어나 활동한 요한 칼빈(1509-1564)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태어났고 독일에서는 천문학자 케플러(1571-1630), 16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활발히 활동한 합리주의(rationalism)자 데카르트(1596-1650)가 태어났다. 영국에서는 우리들이 살펴보려는 경험주의자(empiricism)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 등장했다. 베이컨 가문은 사실 영국 어떤 가문보다도 천재들이 쏟아진 전형적인 수재집안이었다.

과학혁명의 시조 베이컨

베이컨은 영국의 철학자, 과학자로 과학혁명의 시조라 불린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했듯이 그는 경험주의자로서 학문에 대한 굉장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 더 극찬한다면 데카르트는 대륙(합리론)을, 베이컨은 영국(경험론)을 대표하는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과학 방법의 길을 연 근대 철학과 근대 과학의 개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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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계는 기계가 아닐까("clockwork image")?: 기계론(무신론과 유신론)과 유신론(이신론Deism)

4) 과학적 세계관 등장에 따른 구 세계관의 붕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세계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세계관, 단테의 민속, 문학적 세계관의 붕괴

5) 근대 과학 탄생의 결정타

르네상스적 인본주의에 따른 세계상의 변화

6) 근대 과학의 부산물

(1) 종교적, 철학적 공허와 불안을 가져오다.

(2)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 유한성을 인식하는 갈대

7) 공허와 불안을 메울 새로운 정신적 토대는 무엇인가(새로운 신화 또는 story)

(1) 근대 철학의 탄생(존재론과 인식론)

(2) 근대 서구적 합리주의적 세계관 시작

(3) 즉 신앙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의 세계관적 시조(합리주의자 데카르트, 1596-1650)

*Cogito ergo sum->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정신적 토대가 될 수 없다(의심으로부터 출발)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 , 方法敍說 >= 4 가지 새로운 방법 추구(명백한 참 인식만 참이다, 만족한 답을 위해 복잡한 문제를 최대한 단순하게 나누어라, 관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순서적 질서와 자연적 경과에 대한 적절한 관심 지속,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정교한 사실들을 잘 살펴라)

*<제일 철학의 성찰>=> 이성적 자아에서 세계와 지식의 기초 발견 시도(수학적 증명에 뒤지지 않을만큼의 완전한 확실성 추구/ 이 확실성은 절대적인 것으로 생득적 마음에 있는 공리처럼 자명한 진리여야 한다->여기서 회의론이 나옴 )

*6가지 근본적 정서: 놀라움, 사랑, 미움, 욕망, 기쁨, 슬픔(최고 정서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다!)

* 천재 철학자 데카르트의 신념

(1) 수사학, 시학, 수학의 중요성 인식하였으나 반발도 표현

(2) 신학을 배운 자나 무지한 자나 한결같이 하늘에 이를 수 있는 열린 길이 있음을 존중하며 경외

(3) 신학의 계시 진리가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생각

(4) 철학의 확실성에 대한 회의

(5) 따라서 철학적 원리들에 기초한 과학도 문제

C.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17~18세기) 사상 등장

" Sapere Aude."

(아는데 용감하라)

“18 세기 유럽은

계몽의 시대였다 ”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강조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1. 계몽주의

​​

1) 계몽주의는 17-8세기 발흥한 사상으로 과학기술과 합리적 세계관으로 미신과 무지에서 깨어난 인간이 살아갈 새로운 정신세계와 문화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사상으로 참된 의미의 근대를 여는 정신적 운동이었다.

2) "계몽주의의 아버지" 프랑스 철학자, 사상가, 정치가였던 볼테르(1694-1778)가 영국 무혈혁명(1688, The Bloodless Revolution)의 결과를 영국서 지낸 추방 기간(1726-1729)에 목격하다!

3) 이 사상은 탈기독교화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프랑스 유명인사들이 잠든 팡테온 지하의 볼테르 기념상

2. 계몽주의의 이상

1) 전통과 봉건적 구습과 미신과 독단에 매인 몽매(夢寐)를 자연의 빛 즉 이성에 비추어 인간의 존엄을 자각하고자하는데 두었다. 즉 계몽적 주체는 이성적 자아(rational subject)였다.

2) 계몽주의의 유토피아적 희망을 나타내는 5가지 말: 이성, 자연, 행복, 진보 그리고 자유

3.계몽주의의 특징

1) 이론적인 면=과학적 자연주의, 유물론적 실증주의, 전통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 이성의 표준 시도

2) 윤리적 측면=상대주의적 이성, 공리주의(국민 행복 총량이 클수록 좋은 사회)

3) 종교적 측면=기성종교 배격, 이성종교 내지 무신론

4) 역사=진보적 이상

5) 계몽주의의 수단=이성의 개혁을 실행하는 주요 수단은 교육이다!(루소-페스탈로치)

4. 계몽주의의 의의

1) 인간 이성의 신뢰: 하나님 없이 가능해진 것들이 많음을 발견(예:천동설)

2) 휴머니즘(인본주의, 인간주의, 인도주의) 시대의 체계화 본격화 개막(19세기 전성기)

3) 구애 받지 않는 성실함으로 지적 기능을 발휘하려는 영혼의 결단(칸트)

5. 계몽주의의 영향

1)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미숙의 굴레(주로 기독교)를 벗는 것

2) Aude sapere(아는데 용감하라)

3) 종교에서 인간으로 사상의 중심 이동:

광범위한 지적 자율성 아래 신앙과 계시를 노골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볼테르 같은 반기독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인간 스스로의 영광 추구 시작

6. 기독교에의 영향

1) 그리스도와 다른 인간들 사이의 좁아진 존재론적 틈

2) 부활에 대한 점증하는 역사적 회의 주의 등장

3) 기적에 대한 비평(데이빗 흄의 <기적에 대한 에세이>, 1748 등)

4) 교리 비평의 시작(어거스틴의 원죄론, 대속 개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사상 비평)

5) 인본주의에 굴복한 19C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을 예비

*신앙의 목적은 인간화(humanization)

* 신앙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

* 축복위주의 보수적 신비신앙도 알고 보면 미신적 인본주의이다.

* 인간은 신을 섬기기 위한 노예가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행복과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 위대한 존재가 되다.

* 주후 2천년 가까운 연대기적 날에 대한 확신은 가능한가?

* 나사렛 예수의 역사가 어떻게 본질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가하는 형이상학적 문제?

* 1세기 팔레스타인과 현대 서구 사회의 문화적 간격 연결이 가능한가하는 존재론적 문제(알리스터 맥그라스).

7. 인본주의 자율의 결과: 인본주의 자율의 어두운 면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

신앙의 자율화 시작

2) 소외!(alienation):

인간 이성의 종착역은 결국 불안, 초조, 죄와 죽음 앞에 막다른 골목 같은 것!

3) 인간의 radical은 실은 조급함의 발로(하나님 없는 조급한 계몽사상의 이성과 자유와 인권의 종착지는 비극):

프랑스 인권변호사 로베스피에르(1758.05.06. ~ 1794.07.28.)의 단두대 역설!(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자유와 인권을 전하는 의로운 탈북자들을 핍박하고, 최악의 반인권 지도자 김정은은 두둔하는 역설)

-여기서는 역사 속 유럽의 상황(우리가 배운 르네상스, 기계적 세계관, 계몽주의)를 배경으로 주요 인물들을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Ⅰ. 임마누엘 칸트-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1) 생애

*1724, 독일 쾨니히스베르그에서 경건한 청교도 가정 출생

*쾨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수학, 자연과학, 신학, 철학 수학

*1775, 대학 강사

*1781, 순수이성비판

*1790, 판단력 비판

*1793, 종교론

*1796, 대학 은퇴

*1804, 세상을 뜨다. 평생 독신

2) 칸트 사상

*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성

* 순수 이성으로는 종교를 파악할 수 없다

* 도덕 성립의 요소: 자유, 영혼불멸, 하나님

* 불가지론자

* 현상계(감각 경험)와 본체계(영혼, 천사, 하나님)

3) 실천철학

* 인간 감성에서 완전 분리된 것이 순수이성

* 그런데 순수 이성은 실재 규정이 어렵다

* 그러나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는 이성적 결정을 감성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성이 의지를 가지고 명령을 내린다. 여기서 자연을 초월한 자유가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

* 영혼불멸과 도덕률 속에서 신의 존재를 체감함

4) 종교론

* 계시가 아닌 이성 안에서의 종교, 도덕 종교

* 인간의 범죄 의식과 의무 의식에서 나오는 양심

* 정언명령

(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

“너는 할 수 있기 때문에 해야한다”

(Du sollst, also du cannst)

"네 행위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동하라!"

*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음

* “최고선은 행복과 결합한 덕이다”

Ⅱ. 헤겔- 사변 이성 속에서 내재 하시는 하나님

1) 생애

* 1770, 독일 슈트트가르트 생

* 튀빙겐대에서 철학, 신학 공부

* 쉘링 추천으로 예나대 교수, 하이델베르그 철학 교수

* 1818, 베를린대학 철학 교수

2) 철학

* 신학과 철학의 병합 시도(하나님은 절대 정신)

* 철학을 과학보다 상위에 두다

* 철학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려 하다(절대정신의 자아실현 과정-정,반,합으로 진행)

* 범신론자

*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 가장 높고 완전한 종교

* 존재론적 일원론

* 유물론 철학과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영향

* 헤겔은 기독교의 최대 원수다(신사훈 박사)

Ⅲ. 슐라이엘마허-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 현대신학의 아버지

* 19세기 대이단자

1) 생애

* 1768,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개혁교회 목사 아들(친가 외가 모두 목사 집안)

* 아버지는 프러시아 군대 군목(모라비안 공동체와 만남 사건)

* 1783, 모라비안 교단 학교 입학 철저한 경건 훈련(문학과 철학 서적 탐독 시기)

* 회의 시작- ‘인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인가?

* 1787, 신학교 중퇴, 할레대학 입학(철학 서적에 몰두 시기)

* 1789, 대학 졸업 후 침체, 건강 문제

* 1790-1793, 귀족 가정 가정교사(신앙 회복 시기)

* 1794, 목사 고시 합격 목사 안수

* 1796, 병원 원목

* 1799, 종교론 출간(종교를 멸시하는 지성인들에게 종교 변증)

* 1804, 할레대학 교수, 설교자

2) 종교적 배경

* 개혁주의와 경건주의 전통

* 개혁교회 목사 안수

* 15세 때 종교 감정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과 교류

(1)종교 감정 (2) 종교와 철학 구분 (3) 그리스도 중심 신학 (4) 경건주의 (5) 할레대 (6) 루터교 유산

3) 철학적 배경

* 칸트에 심취

* 플라톤에 심취

* 계몽주의 영향

4) 신학 방법

* 계몽주의의 도전

* 인간 정신에 주목(knowing, doing, feeling)

*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다”

* 위로부터의 신학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신학: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삼음, 특별히 절대의존감정.

5) 기독론

(1) 역사 보다 경험, 의식에 의존

(2) 교회 전통 용어와 성서적 용어에 소극적 태도

->신성보다 신의식

(3) 그리스도 양성 교리 부정

(4) 양성 교류 교리 부정

(5) 동정녀 탄생 비판적

(6) 부활, 승천, 재임에 대해 회의적

6) 속죄론

(1) 징벌 속죄론을 거부하고 십자가보다 그리스도의 인격 즉 하나님 의식

(2) 그리스도 구속 사역이란 그리스도와 신자의 공동생활

(3)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 사역 본질이 아니다

(4) 주관적 인간중심적 속죄론

(5) 성경보다 인간 중심 해석

7) 죄론

(1)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보다 인간 영육 간에 나타나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 일어난다

(2) 죄 의식은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다.

(3) 즉 죄는 구속이 필요성을 위해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므로 죄의 창시자는 하나님

8) 슐라이엘 마허의 오류

(1) 범신론자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모호한 진술

범신론: 초월성 부정 내재성만 강조, 하나님과 자연 동일시

이신론: 내재성 부정 초월성만 강조, 18세기 자연신학자들, 섭리주의 부정

스피노자에 대한 동경(종교론에서 스피노자 찬양)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 회의적

(2) 주관주의

하나님은 오직 신자의 감정 속에서 알 수 있다

(3) 불가지론자

하나님의 본성은 알 수 없다

​​

Ⅳ.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과 고전적 자유주의

1) 고전적 자유주의

(1) 개신교 고전적 자유주의는 리츨과 동의어

(2) 기독교 신조를 현대적 지식의 qc 아래서 평가

(3) 전통적 신조들 비판과 재구성

(4) 실천과 윤리에 초점

(5) 신학의 기초를 절대적 권위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음

(6) 초월 간과, 신적 내재성에 집중

2) 리츨 생애

(1) 독일 본(Bonn) 루터파 유명 목사 아들

(2) 철저한 종교교육

(3) 본 대학 입학(1839)

(4) 할레대 입학: 톨룩(1799-1877), J. 뮐러(1801-1878) 등에 대해 배움

(5) 하이델베르그에서 로데(1799-1867)와 친교

(6) 튀빙겐에서 신약 비평가 바우어(1792-1860)이 강의를 듣다

(7) 본 대학 강사(1846), 조직신학 강의(1852), 정교수(1859), 괴팅겐 대 교수(1864)

(8) 아내 사망(1869), 이후 20년 동안 아들과 독신 생활

(9) 괴팅겐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1889)

3) 리츨의 신학 방법

(1)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포위 당한 시대적 상황

(2) 신학과 과학 사이의 갈등과 오해(과학적 유형=과학은 비주관적 인식 추구, 종교적 유형= 실재에 대한 가치 판단 추구)

(3) 즉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증명들은 과학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신학은 최고의 선을 성취하기 위한 인간의 도덕적 삶에 한해서 하나님에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 안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단적 종교경험 및 도덕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이다.

(4)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성경 전체가 아니라 건전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통해 얻은 ‘사도적 사상 체계’(apostolic circle of idea)이다.

(5) 리츨이 방법은 칸트 철학과 유사(형이상학을 배제하고 가능한 한 윤리학에 연관시키려함)

(6)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행한 일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칸트와 다름

(7) 칸트의 phenomena와 noumena 구분을 거부

4) 리츨의 신론(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1) 그의 신학적 방법에 따라 인격적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에 따른 가치 판단에 관심

(2) 즉 하나님 자체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많은 관심

(3)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선일 뿐이다.

(4)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초월보다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에 집중

5) 죄와 구원

(1) 종교적 초점은 죄인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선언 곧 칭의

(2) 윤리적 초점은 화해된 사람을 향해 그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현하라고 부르신다고 봄

(3) 리츨에게 있어 구원은 이 두 가지를 포함한다

6) 기독론

(1) 전통적 기독론 무관심

(2) 부인한 것은 아님

(3) 역사적 그리스도로부터 시작= 교리, 인격에 대한 추상적 이론을 부정

(4)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이상이며 기독교 창시자이며 믿음의 창조자이다(맥킨토시 책, 현대신학의 유형들, 164).

(5) 그리스도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문제를 역사적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해석하려는 몸부림의 신학자였음

7) 평가

(1) 신학적 연구를 가치 판단의 영역에 국한

(2)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

(3) 예수를 인간적, 종교적, 윤리적 이상으로 환원 시킴

Ⅴ. 아돌프 하르낙

(1) 베를린대 교수(1889-1930)

(2) 교부신학 권위자

(3) 성경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아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

(4) 문화와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통한 실용적 기독교

(5) 헬라화 된 기독교에서 복음의 재발견 주장(극단적 자유주의 신학)

Ⅵ. 헤르만(1846-1922)

(1) 할레대 강의, 1879년 마르부르그 대 조직신학교수

(2) 철학 칸트, 신학 리츨 영향

(3) 바르트, 불트만, 메이천의 스승

https://blog.naver.com/davidycho/220321436831

 
 

Ⅶ. 칼 바르트(1886-1968, 하나님의 자유로서의 초월성)

20세기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칼 바르트처럼 한국 신학 안에서 극명하게 평가가 나누어지는 신학자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실존주의, 기독론중심의 신학자, 신정통주의, 변증법적 신학, 위기의 신학, 반자연신학주의자, 신보편구원설 등 그를 지칭하는 신학의 색깔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국내적으로 바르트 신학은

비판적인 교단(예장 고신, 합동, 합신, 예장 개혁, 예성 등)이 있는 가하면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교단(예장 통합, 기성, 한신 등)의 신학자들로 나누어집니다.

또한 같은 교단 안에서도 신학자들마다 바르트에 대한 입장이 서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 강좌는

바르트에 대한 개인적인 직접적인 옹호나 비판이 아닌

배우는 목회학 과정의 신학도들에게 단순한 정보 제공을 통해

앞으로 여러분들의 바른 신학적 판단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1. 생애

1) 1886. 5.10. 스위스 바젤 개혁파 교회 목사(Fritz 바르트) 장남. 소년, 청년기 베른.

2) 1904. 베를린대. 종교사학파 구약학 궁켈(1862-1932), 하르낙(1851-1930) 사사

3) 튀빙겐에서 보수신학자 슐라터(1852-1938), 바르부르그 대학 헤르만 사사(당시 불트만, 고가르텐 동문)

4) 1911-21. 스위스 자펜빌 목회

5) 1911년 로마서 주석 출판("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과 인간, 시간과 영원 사이의 간극"-변증법 사용-,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가톨릭 신학자 Karl Adams)

6) 1921 괴팅겐 대, 1925 뮌스터 대 교수, 1930 본 대학 교수 취임(1932, 모차르트 음악 들으며 <교회교의학> 집필 시작 1968까지 계속, 8천면에 달하는 12권 미완성 저서)

7) 1933년, 나치가 복음교회 사실상 지배(롬 13:1). 1933년 복음교회는 75% 나치 지지

8) 당시 제자 본 회퍼(1906-1945)- 본 대학

9) 1934. 5. 31. 바르멘 선언 주도- 5개 조항(히틀러 정권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와 고백 교회 운동)-외국인으로 추방

10) 고향 바젤로 돌아와 신학 강의

11) 종전 후 다시 독일(1946-47) 교의학 강의

12) 바젤대 강의, 1968. 12.10일 83세 일기로 세상 뜨다. 명예박사는 많으나 학위는 못함

2, 신학적 방법(긍정과 부정)

1) 부정: 자연신학에 대한 회피

2) 긍정: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만남

3. 하나님 말씀과 성경

1) 하나님 말씀 세 가지(계시·복음 자체로서의 그리스도, 성경, 교회의 복음 선포 곧 설교)

2)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구분

4. 그리스도 중심적 삼위일체 신학

1) 바르트 신학 구조의 핵심(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신학의 기본으로 간주-네 가지 주제=(1) 하나님의 말씀론, (2) 신론, (3) 창조론, (4) 화해론==> 성령은 제 2장 하나님의 계시 제 1부분 §12. 성령 하나님과 제 3Part 성령의 유출 §16. 계시의 주관적 실재와 계시의 주관적 실현가능성으로서의 성령 등에서 다루고 있다)

2) 삼위일체 회복(존재 양태Seinsweise로서 위격보다 양태라는 말을 좋아함)

5.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1) 신적 탁월성으로서의 자유로운 사랑

2)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

6. 선택 교리

1) 예수 그리스도만이 배척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2) 보편적 구원apokatastasis 문제에 대한 에밀 부룬너의 질문에 답변 거부

칼 바르트(사진 우편)와 불트만(유광웅 교수님 제공)

7. 바르트의 성령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너무나 힘들기만 하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로 인해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시대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분이 계신지를 알도록

눈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 우리에게로 돌이키소서!"

"Komm, Schöpfer, Geist" (K. Barth & E. Therneysen, "Come, Creator, Ghost", 1924, 170)

-"Komm, Gott Schöpfer, Heiliger Geist"

( "Come, God Creator, Holy Ghost")-

<라틴어 "Veni Creator Spiritus"를

기반으로

마틴 루터가 쓴

오순절을 위한 루터교 찬송>

https://blog.naver.com/davidycho/221632019969

 

개신교 최초 예배 풍경의 원형이 남아있는 독일 북부 한자동맹 도시 뤼벡의 루터교회 예배 풍경(동영상)

한자동맹의 도시 뤼벡의 개신교 루터파교회 개신교 최초 예배 풍경의 원형이 남아있는 독일 북부 한자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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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인식(Gottes Erkenntnis)의 주체로서의 성령

(1) 계시: 성령은 계시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을 혼동하는 신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대한 비판(<로마서 강해 1판>, 1919)

(2) 구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갈 4:6; 롬 8:9; 빌 1:19; 벧전 1:11)이다.

*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결단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의 결단을 통해 새 창조의 길을 여시는 영

* 즉 죄로 물든 세상과 부활 하신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시는 새로운 세계 사이의 결단.

*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이라는 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영이시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성령이 그 계시의 주체다.

(3)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하는 영’이다.

바르트의 성령론은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에 있도록 하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 Nachfolge)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에게 있어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는 새롭게 하는 영이다.

2)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Der Heilige Geist und das christliche Leben, 1928, 뮌스터)

(1) 창조주 :

창조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인간이 개념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한 현실이자 현존과 작용에서 계시의 사건 안에 있는 주관적 측면

(2) 화해자(화목자, Versöhner) :

*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심판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통해 스스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성령 앞에 설 때 인간은 죄로써 하나님에 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하지만 은총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말씀을 통해, 혹은 그리스도를 위해” 칭의와 성화의 주체이다. 인간은 이에 순종함으로 응답할 수 있다.

(3) 구원자(Erlöser) :

* 성령은 약속의 영이다.

*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희망 속에서 진리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인도되며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 즉 성령은 인간에게 “오시는 분”으로 존재하신다. 죽 성령은 주어진 것(선물, datum)이 아니라 주어지시는 분(dandum)이며, 이미 성취된 것이 아니라 ‘약속’(verheißung)으로 알려지는 분이다(Der Heilige Geist und das christliche Leben, 1928, 465).

뤼벡의 교회 풍경

3) 성령과 교회

(1) 성령은 교회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한다

(2)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즉 자신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식인 거룩하시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창조하시고 날마다 새롭게 만드시는 일깨우시는 영이시다.

(3) 성령은 공동체를 세우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친교로 이끄시는 영이다.

(4) 이 특별한 공동체는 성령을 통한 특별한 결속을 통해 고양(高揚) 되어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 일어난다.

(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령은 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 교회가 되도록 격려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예수 자신이 주체이시다. 이렇게 예수의 영이 살아있는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개신교 초기 풍경이 남아있는 독일 뤼벡의 마리엔 교회(루터파)

4) 성령과 자유

(1)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신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성령의 자유:

신성(Gottheit)은 하나님의 자유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전제조건이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신성을 통해 하느님은 하느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본래적 하나님 자신이다.

(2) 자유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즉 성령은 ‘주격’, ‘주관적 동기’로서 다른 두 존재 방식(성부·성자)와 함께 세계의 영도, 교회의 영도, 한 그리스도인의 영도 아닌 자유하신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 자신이다.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현 발현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경배되고 존경 받을 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성, 즉 자유의 영의 특성이다.

(3) 헬라어 프뉴마(Πνεύμα, 히브리어 "루아흐")를 통해 본 성령의 자유:

* 기운, 입김, 숨, 폭풍, 바람, 영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성령의 어원을 통해 예수님은 요한복은 3장 8절에서 성령의 자유를 말씀하신다.

*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와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의 성령의 자유로운 특성을 알 수 있게 한다.

(4) 경륜적 삼위일체 속 인간을 향한 자유의 영 :

성령은 인간을 “성령을 받고 성령을 소유하며 성령 안에서 살게 한다”.

(5) 진리의 영 안에서 비로소 자유인이 된 인간 :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길이요 진리인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체로 되지 않고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요 8:32).

(6) 즉 성령의 사역은 자유가 없는 것에서는 전혀 역사하지 않는다.

(7)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 창조하신 하나님

5) 성령과 성경

(1) 하느님 말씀 신학자로서의 바르트: 선포된 말씀(설교-성령), 기록된 말씀(성자), 계시된 말씀(계시-성부)

(2) 성부-성자-성령의 일반적 순서가 아닌 선포된 말씀으로 시작하는 바르트의 성령론 전개 : 성경의 말씀 선포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인식을 가능케 해 주는 성령

(3) 인간은 결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됨은 우리 인간의 판단이나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지와 결정과 주권에 달려 있다. 성경은 성령을 증거하는 책이다.

(4) 문자(γράμμα)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성령의 역사(조명)가 없으면 성경이 아무리 그 근원이 거룩하고 그 영광이 클지라도 그 글을 읽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고후 3:14).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5)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령의 역사 :

* 성령은 성경의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역사한다.

*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성령에 두지 않고 교회에 두었다. 정통주의는 문자에 성령을 국한시킴으로 하나님의 자유한 은총을 상실하였고, 슐라이엘 마허는 감정과 신앙에 말씀을 혼합하여 “주관주의”에 빠져버렸다.

7. 평가

1) 초월성의 회복

2) 세상과 인간 희생: 하나님을 큰소리로 말하며 정작 하나님의 세상과 자연과 인간에 대해 말하려 했던 실수

Ⅷ. 에밀 부룬너(Emil Brunner, 1889-1966)-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의 초월성

1. 생애

1) 1889. 12.23 스위스 취리히 출생

2) 취리히, 베를린 대학-칸트 관념 철학

3) 1913. 취리히대에서 칸트와 훗설 연구를 통해 신학박사

4) 1919 미 뉴욕 유니온 대학교수

5) 1924 모교 교수

6) 1938-1939 프린스턴 강의

7) 일본 국제대(1953) 교수 중 한국 잠시 방문

8) 1966 고향에서 사망

2. 신학적 관심사

1) 자유주의 신학 반대

2) 슐라이엘 마허 비판

3. Biblical Personalisn

1)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이다.

2)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나 지식은 반드시 이 ‘당신’에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3) 결과적으로 자연과학이 진리의 표준, 자율적 이성이 실재를 인식하는 유일의 적절한 방법이 되어버림

4. 만남으로서의 계시

1) 하나님을 객체화 시키지 말라

하나님에 대한 말이나 명제는 결코 계시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2)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진리가 참이다

3) 따라서 계시와 성경 동일시 반대

5. 바르트와의 논쟁

1) 브룬너의 <자연과 은총>과 칼 바르트의 Nein!

2) 자연신학 논쟁

3) 바르트의 만인구원설 비판

6. 평가

1) 개혁신학을 현대적으로 재조명

2) 계시에 대한 인격적 이해

3) 정통주의 성경과 거부

4) 창조, 차락, 홍수, 바벨탑 사건을 역사적 사건이 아닌 신화라 함

5) 예수가 가르친 내용과 사도가 가르친 내용은 다르다

6) 성경 해석에 있어 원역사(Urgeschichte)와 일반역사(Historie) 구분

6) 신정통주의

대표적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바르트 전기집에서)

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케리그마의 초월성

1. 생애

1) 복음주의 루터파 목사(아프리카 선교사) 아들

2) 하르낙, 양식비평 궁켈 사사

3) 기독교 실존주의

2, 신앙과 역사적 예수

1) 양식 비평

2) 역사의 예수에 대해 부정적

3. 종말론

1) 초기 기독공동체의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종말적 착각

2) 현재적, 실존적 존재로서의 종말론

4. 신화론

1) 신화로 덮여있는 책 성경

2) 비신화화 해야

5. 해석학

1) 해석을 위한 전이해

2)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

6. 하나님의 초월

1) 고전적 우주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모순

2) 실존적 하나님 만남

7. 실존주의와 신학:

신정통주의적

8. 하이덱거와 신학성경:

하이덱거의 실존적 철학

9. 실존주의와 범주들:

실존과 세계 구분

10. 본래적 실존: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

11. 역사 개념:

히스토리와 게쉬히테 구분

12. 신앙과 복음: 케리그마

13. 비판: 성경 권위에 대한 추락

14. 일방적인 주해: 실존주의를 통한 단순화된 주해

15. 사유화된 신앙: 복음이 메시지에 대한 좁은 이해

16. 왜곡된 하나님: 무한한 질적 차이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 왜곡

17. 결론

1) 친구인 칼 바르트와 함께 독일 개신교 신학 지평 재형성

2) 역사적 기독교 파괴

3) 기독교 초자연주의 완전 배제

4) 실존주의를 통한 성경 왜곡

Ⅹ.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1) 사도 바울을 신비주의자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접근한 인물

2)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렸던 신학자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3) 슈바이처는 인간이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단절이 극복된 것으로 보고, 아직은 지상적이고 시간적인 것 안에 존재하지만 자신이 초지상적인 것과 영원한 것 안에 들어가게 됨을 체험하게 됨을 체험하는 모든 것을 신비주의로 보았다.

4) 사도 바울은 예수의 메시야적 통치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의 선민들의 부활도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만큼 성례와 윤리, 율법, 칭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모두 종말론적이며 신비주의인 것이다.

5) 원시 종교에 나타난 원시적 신비주의가 마술적인 반면, 인류가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깊은 사유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는 좀 더 고도화한 철학(플라톤, 스토아,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헤겔 등)이나 힌두교의 브라만(Brahman)이나 부처(Buddha)에게서 보이는 신비한 요소를 사유 신비주의라 하였다.

6) 슈바이처는 바울의 신비주의는 이 두 신비주의 사이에 위치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7) 슈바이처는 사도 바울이 받은 계시를 초월 계시로서의 신비와 진리로 보기를 회피하여 보다 높은 신비주의와 보다 낮은 신비주의가 혼재한 신(神)-신비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8) 기독교 신앙에 있어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단어나 신학사(史)에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신앙과 신학의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신의 믿음 부족을 나타내거나 신학적 미숙의 표현일 경우 신앙과 교리를 왜곡할 가능성을 지님을 늘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9) 그런 면에서 슈바이처 신학에는 초월적 복음의 요소보다 내재적 학문의 향기가 난다. 비록 슈바이처가 세상에 잘 알려진 아프리카의 성자인지는 모르나 바른 신앙의 신학자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10) 진정한 신비는 신비주의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신비는 사실 "그의 말씀" 안에 있고 말씀의 역사 속에 있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

“예수 부활의 증거들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 주장하는 기적들보다 더 월등하다. 부활의 증거는 대부분 다른 기적 사건들에서 제시한 증거들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르다고 생각한다.”-20세기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에서 2004년 유신론자로 돌아선 철학자 앤서니 플루(Antony Flew)-

예수 부활 사건에는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4가지 사실이 있다.

1. 먼저 ‘예수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후 무덤에 묻혔다’는 것으로,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성경을 신화로 가득찬 책이라 평가 절하하고,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하며 신약성경의 역사성에 회의주의적이었던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조차 예수님이 무덤에서 장사되는 장면은 전설적 요소가 전혀 없는 역사적 보고라 평가.

2. 둘째 ‘예수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 발견되었다’. 일부 ‘예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의심하나, 병사들은 이 같은 일을 경계하여 무덤을 철저히 지켰고 시신이 사라진 것을 안 뒤, 오히려 제자들이 당황했으며 시신을 중시하는 유대인들로서 훔쳐갈 이유가 없었다. 또한 최초의 목격자가 당시 법적 효력이 없는 여인들이었으며, 스스로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3. 셋째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오백 명이 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고전 15:6). 이는 예수 부활에 부정적이거나 이를 ‘전설’로 취급하는 바트 어만(Bart Ehrman)과 게르드 뤼데만(Gerd Ludemann)조차 역사적 확실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에 <초대교회의 복음전도>, <마태복음 강해> 등을 쓴 영국 저명 신학자 마이클 그린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출현은 고대의 어떤 사건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건이다. 합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출현하셨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살아나신 주를 보았노라’.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고백했다”고 설명했다.

4. 마지막으로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경험은 예수 제자들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예수 십자가 죽음 후 흩어졌거나 몸을 숨겼던 제자들이 갑자기 완전히 달라진 이유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 부활을 증거했는데, 거짓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다.

예수부활의 증거가 있을까?

부활은 단지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믿음일까?

성경은 분명 부활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19장 39-40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체는 돌아가신 후 유대의 장례 풍습에 따라 향유를 바르고 세마포로 단단히 싸매졌다. 시체는 돌무덤에 안치되고 입구는 큰돌로 단단하게 밀폐되었다. 그리고는 잘 훈련된 로마의 군사들이 무덤 입구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예수가 살았을 때 ‘사흘 후 다시 살아나리라’ 하였으므로 사흘동안 무덤을 굳게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하고 있다. 그러니 로마군인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몰래 치워버려서 부활의 큰 소동을 벌였을 리는 전혀 없다.

성경은 큰 지진이 나서 돌무덤을 굴려버리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다른 제자들과 오 백여 형제와 야고보와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셨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일관되게 전하고 있다.

더욱 부활을 확신하게 만드는 또 한가지는 바로 부활 후 예수님 제자들에게 일어난 행동의 변화이다.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하셨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 줄행랑을 쳤던 졸장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곁에서 3년 동안 교육받고 수많은 기적을 함께 체험한 그들이 정작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담대하게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대제사장 집 뜰까지 따라간 제자는 겨우 베드로 한 사람뿐이었다. 베드로도 두려움에 일행과 멀찍이 떨어져서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베드로는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커다란 과오를 범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두려움 많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부활을 거짓으로 퍼뜨리기 위해 작당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예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을 위하여 누가 죽을 수 있었겠는가!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는 담대히 부활을 증거하다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였다. 어떻게 거짓 믿음 때문에 목숨을 마칠 수 있었겠는가!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다. 즉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1960년대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사람은 예수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 모든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그만 거꾸로 예수님 부활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은 바뀔 수 없다. 다만 이제 바뀐 것은 내 해석이다’라고 고백 한 후, 거꾸로 예수님 부활의 전도자가 되었다. <돌을 옮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유명한 책이 바로 그 책이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의 고백에서 분명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쫓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위임을 친히 보았다(벧후 1:16)”

예수님 부활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원 자체가 전혀 다름을 웅변하는 사건이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을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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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