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무엇인가(조덕영 교수)
본 내용은 <조직신학원론> 강의 첫 수업을 위한 신학 기초 자료입니다.
훌륭한 기독사상가들을
만나는 것은
그들의 훌륭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유사하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대 교수, 주 교재 "신학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1. 신학의 작업 가설적 정의(A Working Definition of Theology)
1) theology= "theos"(神)+ "logos"(理性, 知慧, 思考)
2) 文字的으로 神學은 "모든 인간이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
3) S. Granz: 모든 사람은 신학자다(Everyone is a theologian). 사람은 누구나 전제(前提) 가운데 살아간다(“무신론자는 무신론을 전제한 신학자”).
4) John Macquarrie(dhrtmvjemeo): "신학은 하나의 종교적 신앙에 참여하고 이를 성찰함으로써 가장 명확하고 일관된 언어로 이 신앙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을 추구하는 연구다."
5) 무신론신학(atheology): '신은 죽었다."(1960년대 등장)
6) Divinity: '하나님'과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노력하는 사고 체계'
7) 페미니스트 신학도 등장(thealogy)
8) 신학은 신앙의 과학(학문)이다.
2. 침례교 신학자 밀라드 에릭슨(노스웨스턴대 박사, 조직신학, 뮌헨대 연구, 베델신학대학원 학장 역임)
1) 시대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신학(찰스 핫지, A. Strong<1836-1921, 예일대,로체스터, 베를린 수학, 로체스터대-침례교 목회>, 루이스 벌콥을 넘어)
2) 복음주의 학자들이 해석학 분야에서 이루어놓은 작업과 결과들을 활용, 현대 문화 속 인식, 재진술
3) 고전적인 정통주의
4) 성서 권위와 현대 사이의 미묘한 균형(전자를 선택)
5) 초창기 버나드 램(캘리포니아 버클리 서부 침례신학교 교수, 조직신학) 영향
6) 박사과정 중 윌리엄 호던(루터신학교 학장, 노스웨스턴 대와 개릿신학교) 영향
7) 판넨 베르크 영향(독일 뮌헨대 박사 후 과정)
8) 온타리오 헤밀턴 맥마스터 신학교 클락 피녹("철저해야 한다는 관념에 노예가 되지 말라", "책을 전화번호부처럼 읽게 하지 말고, 찬송가처럼 노래하게 하라".)
3. 하나님을 연구하는 일
하나님의 피조물, 특별히 인간과 그의 상태, 그리고 인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려는 것
1) 신학은 성경적이다.
2) 신학은 조직적(체계적)이다.
3) 신학은 또한 일반문화와 학문의 주제들(기원, 과학, 심리학, 역사 철학과 섭리 등과)과 관련된다.
4) 신학은 또한 현대적이어야 한다(위험성 존재).
5) 마지막으로 신학은 실천적이어야 한다.
4. 신학의 구조
1) 성서학
2) 조직신학
기독교 진리를 체계적으로 해명하고 변증하며, 보다 성경적으로 수립해나가려는 학문.
1) 조직신학(벌콥, 핫지, 스트롱 등)
2) 신학 체계(반 틸, 변증학에서 System of Truth)
3) 교의 신학(박형용 박사)
4) 교리학(바빙크, 호크마,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5) 기독교신학Christian Theology(에릭슨)
6) 신학, 신론(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학문)
조직신학의 방법
1) 성경 자료들의 수집
2) 성경 자료들의 통합
3) 성경 교훈들의 의미 분석("born again", 요 3:7)
4) 역사적인 논법들에 대한 조사(역사신학과의 호환)
5) 교리의 본질을 확인하는 일(영원하고 불변한 본질적인 것과 문화적 상황,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6) 성경 이외 자료로부터의 조명(롬 1:20, 외경, 보완적 자료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조화)
7) 교리의 현대적 표현(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 프란시스 쉐퍼의 "철학과 문화", 본회퍼의 "값싼 은혜", 상황화, 신학의 "길이"<시간, 역사>와 "폭"<환경과 문화>, "높이"<어거스틴, 칼빈, 슐라이엘 마허, 바르트 수준>, 복음은 늘 "거리끼고" "미련한 것", 고전 1:23)
8) 신학의 중심 모티프(루터의 십자가 신학, 칼빈의 하나님의 주권, 틸리히의 존재의 근거, 스웨덴 룬트학파의 "하나님의 사랑", 오스카 쿨만의 "이미와 아직",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향하여)
9) 다양한 주제들
조직신학의 기능(임무)
1) 절대의존감정(슐라이엘마허)
2) 기독교신학을 학문적으로 이해(도적적, 주관주의적, 리츨)
3) 기독교의 우월성과 참 된 의미(상대주의, 트뢸치)
4)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언어 조사, 신적 계시와 일치하는 가 확증, 교의들의 상호 관계(칼 바르트)
5) 절대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학문적 형식으로 표현하며, 기독교 교리 전부를 포괄하는 작업(찰스 핫지)
6)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정확하게 계시에 의존하여 지적으로 재생하는 것(헤르만 바빙크)
7)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계시를 통해 명석한 통찰로 연구하나 신학 각 분야의 유기적 총체를 고려(아브라함 카이퍼)
8) 신앙 고백에 구현된 교의들을 성경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조직하며 증명하고, 비평 보충(벌콥)
9) 교리에 대한 건설적 연구, 증명적,변호적 임무, 비평적 임무, 전도적 임무(박형용 박사)
3) 역사신학
4) 목회신학
5) 철학적 신학
5. 신학적 진술들의 권위의 정도
1) 성경의 직접적 진술에 가장 큰 비중을 둘 것
2) 성경의 직접적 함축된 의미에도 역시 비중
3) 성경의 개연적 함의들(잠정적인 것들)
4) 성경의 귀납적 결론들
5)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것
6) 성경의 모호하거나 불분명한 부분들로부터 단정적인 중요한 결론을 유도하는 위험성.
6. 신앙의 본질
1) 신앙과 지식
2) 신앙과 구원
3) 아퀴나스와 마르틴 루터 비교
7.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는 가
1)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ologica)에 나타난 신 존재에 대한 5가지 증명들(다섯 가지의 길)
신은 그 존재가 자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하고 요청된다. 안셀무스가 신의 본성이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존재를 도출시킬 수있다고 본 반면, 아퀴나스는 인간이 신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로부터 존재를 도출하는 존재론적 논증의 진행 방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 고유한 영향과 결과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이 원인이 되는 결과들을 보여줌으로써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은 발생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퀴나스는 세계의 시작이 있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창조론교리는 입증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논증은 잠세태의 현실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1)첫째 방식
순수 현실태(actus prus;잠세태가 전혀 없는 상태)에 이른 존재의 우선성을 드러냄. 이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초의 부동의 동자(원동자)와 유사하다.
(2)둘째 방식
신은 최초의 동력(causa efficiens)이다.
그러므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부차적인 동력인들은 원인성을 지니기 위해 신과 동인적 인과성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세계 안에 널려있는 동력인들이란 \'부차적인 원인들\'일 뿐이다.
(3)셋째 방식
신은 필연 존재(ens a se)이다.
아퀴나스는 신의 본질에 대한 인간의 지식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는 가정은 거부한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는 모든 다른 존재자들과 세계 전체로부터의 신의 차별성을 발생과 소멸을 초월하는 신의 특성에서 찾으려 했으므로 신과 피조물을 구별하는데 시간적인 차원이 관여한다. 신은 시작과 종말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세계의 한부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4)넷째 방식
신은 스스로 있는 존재(esse per se)이다.
이것은 네 번째 방식과 관련된다. 신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온갖 제한된 완전성의 원천이다.
(5)다섯째 방식
신은 만물이 잠세태로부터 현실 세태로 질서적으로 운동하는 변화 과정의 원천이면서 지향하는 바의 목적(casua finalis)이다.
아퀴나스는 다섯 가지 증명방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이 동자 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초월적으로 신에 대한 성격을 규정한다.
신은 순수현실태로 운동의 제일 원인(제1 증명)이며, 만물의 궁극적인 목적(제5 증명)이며 도한 제일의 동력인(제2 증명)이며, 동시에 모든 완전성의 원형적 또는 형상적 원인( 제4증명)이다.
무엇보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세계의 한부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제 3증명).
아퀴나스는 이성을 토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 철학적 추론에 입각해서 인의 속성들에 대해 논증한다. 즉 신의 자존성으로부터 다른 완전성을 도출한다. 독자적 단일성, 진리성, 무한성, 방대성, 편재성 그릭소 영원성 등이 그것이다.
8. 신학 언어의 본성
1) 유비(類比, 類推; Analogia)
유비란 두 개의 사물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속성도 유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존재성의 차원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유비(한 영역에서 어떤 원칙이 통하면 다른 유사한 영역에서도 그 운칙이 통할 수 있다고 보는 사유)의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유비의 중요성 두 가지(맥그라스)
첫째 유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하나님 편에서의 양보”).
둘째 유비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억에 잘 각인되는 특징이 있다.
(1) 비례(proportionality)의 유비:
종류가 다른 두 가지 대상 속에서 서로 일치하는 특성들 들여다보기(예: 개의 충성심과 인간의 충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즉 두 대상 사이에는 일정한 유비가 있을 뿐이다)
(2) 속성(attribution)의 유비 :
예를 들면 선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막 10:18). 그런데 이 선함이라는 단어의 인간적 이해는 인간의 선한 속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런데 ‘인간 피조물이 선하다’는 이해의 수준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속성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불완전한 실재의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완전한 속성 이해가 아닌 속성의 유비만이 있을 뿐이다.
(3) 존재(entis)의 유비: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 관련.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과 창조된 세상 사이에는 상응 또는 유비가 존재한다는 입장. 일반적으로는 두 존재나 사물이 전적으로 다르다 해도 하나에게 적용 되는 용어가 다른 하나에도 어떤 경우에는 적용될 수 있는 관계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4)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이것은 주로 신학자 칼 바르트와 연관된 이론으로 하나님과 창조된 세상 사이에는 어떤 상응 관계도 없으므로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자기계시에 근거해서 유비가 성립된다는 주장. 칼 바르트의 입장이 이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2) 메타포
3) 적응의 원리
9. 신학에서의 참여와 중립성
1) 기독교 진리의 시대화 작업: 시대에 뒤떨어진 기독교(?)
(1) 루돌프 불트만의 "신약성서와 신화"
(2) 삼층 구조(하늘, 땅, 마귀와 귀신들의 지옥)의 세계관
(3) 코페르니쿠스(1473-1543, 지동설)의 등장
(4) 질병과 귀신들림과 쪽팡이와 바이러스 대소동(기도의 용사들 모두 어디로?)
(5) 성경 속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운송 수단과 현대 기기들
2) 기독교의 항구적인 것들
(1) 교회(제도적 요소들)
(2) 하나님의 사역
(3) 경험들(육체적 부활, 영혼 불멸, 심판 등 본질적 경험들)
(4) 교리들(역사적 핵심 교리들, 그레샴 메이천)
(5) 삶의 방식(기독교 윤리)
3) 시대에 맞는 신학을 만드는 두 가지 방법(윌리엄 홀던William Hordern, President and Professor at Lutheran Theological Seminary)
(1) 변혁자들transformer(급진론자들): 자유주의, 현대주의, 사신신학자(알타이저, 해밀턴, 반 뷰렌), world come of ages(본 회퍼)
(2) 번역자들traslator(기독교 메시지의 본질 유지를 위한 신학자들)
4) 항구적 진리의 기준 속 작업
(1) 여러 문화 속 항구적 불변의 것들(성경의 항구적 진리)
(2) 보편적 상황(귀납적 특수 상황이 아닌 근본 정신을 이해할 것)
(3) 기초가 되는 항구적 요소 분별력(구원, 결혼의 영속성)
(4) 본질적인 것과 경험과의 연결성(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고전 15:17)
(5) 점진적인 계시 발전 과정과 최종형태(해 마다 드리는 대제사장의 구약적 피 제사<히 9:1-10>와 사역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12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10.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증거Evidence of knowing God(J.I. 패커)
1)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에너지(Those who know great energy for God)가 있다
2)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생각들(great thoughts of God)이 있다
3)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담대함(great boldness for God)을 보여준다.
4)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감(great contentment in God)을 가진다.
11. 적응(accommodation)
1) 맥그래스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3 가지 칼빈의 공헌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칼빈은 자연에 대한 과학연구에 대해 긍정적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둘째, 칼빈은 과학 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한 인물이다.
셋째, 칼빈은 성경을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보통학교를 개설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적응의 방법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할 때 겪는 것과 동일한 문제에 부딪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낮추어 내려 오사 우리의 연약한 점에 자신을 맞추신다. 이것은 유아원 선생님이 유아 언어로 말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면서 자녀들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제한 된 지성의 어린 아이에게 그들의 이해와 경험을 능가하는 말과 개념을 사용할 경우 의사 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 수준에 맞는 방법이 요구된다. 이 접근 방법은 칼빈에 의해 적응이라는 용어로 언급된다.
적응(Accommodation)은 라틴어의 수사학자나 법학자들이 청중들의 상황, 구조, 성격, 지적수준, 감정 상태 등에 적응 시키며, 조절하며 적합하게 진행하는 사용법이다. 이 적응의 원리를 일찍부터 이용한 사람 중에는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교부들이 있었다.
칼빈은 신학 언어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칼빈은 “신인동형설”(anthrophomorphism)의 언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신인동형적으로 손과 발이 달린 한 인간으로 언급하거나 희생 제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이 적응의 원리에 근거할 때 이해가 가능해진다. 적응의 방법은 일상의 언어와 전문가 사이의 담론의 긴장을 해소하는 도구가 된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어거스틴의 장황한 설명을 반대했다. 칼빈은 신인동형설이라는 언어 자체는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그런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2) 창세기 1장 주석에 나타난 해석 방법으로서의 칼빈의 적응(accommodation)
창조에 대해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의 이해를 받아들인다. 이들 견해의 특징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칼빈에게 있어 물체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이요 완벽한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므로서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단지 미개인까지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 방식으로 성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해와 달에 대해 칼빈은 창세기가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밝게 우리들에게 비추는지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비한 세계를 더욱 탐구하려면 성경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보기에 창세기를 서술한 모세는 과학의 언어가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만일 모세가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에게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들의 수준과 능력에 적응한다. 이것을 문자적 묘사로 보면 안 된다. 창세기의 기자는 학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원시적인 사람들의 교사로도 임명되었다. 그 때문에 창세기 저자는 배우지 못한 조잡한 교육 수준의 입장에 서지 않고는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김성봉 박사는 칼빈의 적응의 방법이 현재의 삶을 위한 목회적 관심까지 염두에 둔 해석 방법임을 논증한다. 그렇게 볼 때에 칼빈에게 있어 창조의 6 일은 24 시간의 여섯 단위가 아니었다. 칼빈은 순간 창조 개념을 반대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4 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다. 확장된 시간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사고 방식에 적응한 것이었다. 칼빈은 그에 따라 궁창 위의 물도 구름에 적응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창조과학(creation science)과 조금 다른 해석 방법이다. 즉 칼빈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적응된 것이다.
칼빈의 시대 루터란주의자들은 이미 지동설을 책망하고 있었다. 칼빈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주장을 창세기 주석에서 비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듯 이것은 화이트의 일방적 주장일 뿐 창세기 주석 어디에도 이런 구체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앞으로 좀더 검토해볼 여지를 남기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설령 칼빈이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잘못 해석 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고 본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달이 불명료한 물체라는 것을 인정하나 캄캄한 물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은 달이 불타고 있는 물체일 것이라 보았다. 즉 달은 발광체라고 말한다. 성경이 달을 광명(창 1:15-16)이라고 부르니 성경에 적응하면 달이 광명이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천문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물론 지구도 광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달이나 지구가 그 중심에 뜨거운 마그마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또한 그 실체에 대한 해답이 간단하지는 않다. 즉 발광체든 아니든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과학자들의 견해도 결국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도 당연히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과학자들을 모두 오류 투성이의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칼빈도 당연히 제한적 지식 아래 잘못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적응 이론 아래에서 칼빈은 자신이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에 대해 자유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런 것이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성경 주석이 미숙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철저하게 연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탁월한 성경 원문 연구가였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당시 유럽의 인문주의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대충 넘어가는 수준의 능력이나 성품을 지닌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칼빈은 성령이 “저속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리들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막아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는 쪽을 선택했다”고 주석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떠는 방식으로 몸을 떠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칼빈이 보기에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지동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서 수학적 물리적으로 난해한 점들까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3) 진화론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었을까? 생물의 “종류(min)”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1절에 처음 나타난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종류대로의 창조의 문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종류는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Elohim, 40회)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10회)이다. 그럼에도 칼빈은 이 언어를 아주 일반적으로 평이하게 서술한다. 진화론은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자연 과학의 주요 이슈가 된다. 칼빈의 시대는 아직 진화론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대였다.
칼빈은 종류대로라는 이 단어를 주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석을 기록하는데 있어 당시의 수준에서 단순한 언어로 묘사하려는 입장을 지속한 듯하다.
칼빈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불충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 계시란 칼빈에게 있어 약간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러한 광명 속에서 명백히 계시되어지지만 우리의 눈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내적 계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설명한다(롬 1:19). 칼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4) 현대 과학과 적응 방법의 사용
적응의 방법은 여전히 유효한가? 맥그래스는 “적응”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핵심적인 중요한 논제는 아니었으나 성서 해석과 신학 구조와 관련되어 지속적인 이슈였다고 주장한다. 딜렌버거(John Dillenberger)가 보기에도 적응의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자연 과학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슈의 하나였다.
칼빈은 결코 과학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열린 신학자였으며 과학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자였다. 물론 칼빈도 간혹 과학적 이론을 바르게 그의 해석에 사용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적응의 방법 아래에서 그런 작은 오류는 그의 신앙이나 성경 해석 방법에 누(累)가 될 수 없었다. 칼빈은 성서의 기록자들조차 “잘못된 견해에 적응하면서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과학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하나님의 지혜를 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 계시로 재해석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였다. 과학의 문제에 있어 해석 방법과 관련하여 적응의 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 칼빈은 과학 혁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를 살면서 적응이라는 해석 방법을 통해 성경 해석이 모든 역사, 온누리를 향한 적응된 해석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저작에 일관적으로 흐르게 적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칼빈이 보기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도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될 신학자는 아니었다. 과학의 생소한 이론이나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적응의 방법은 때를 기다린다. 그는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보았던 것이다.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때 우리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의도적이지 않은 이상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하나님조차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하여 낮아지셨는데 우리 인간이 어찌 실수가 없겠는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어떤 근본주의적 분리주의 경향도 교만의 반영일 수 있다. 칼빈은 이점을 잘 아는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칼빈 시대나 모세 시대만의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상황과 과학의 발달을 분명 예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성경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현재의 책이요 미래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학 만능, 과학주의가 만연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적응은 어떤 것일까? 또 미래에의 적응은 무엇일까?
적응이란 단순히 소극적인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는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였고 학문의 영역을 회복 시켰을 뿐 아니라 학문을 부자유스러운 속박에서 건져내었고 칼빈주의는 학문적 갈등에 대한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학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학문의 최종적 결과 또한 학문의 자유 아래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적극적으로 과학의 문제에 뛰어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쟁과 협상 없이 승리하는 전쟁이란 없다. 칼빈이 말한 ‘성령의 겸손(condescension)’에 의지하여 학문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겸손히 기다리는 것과 복음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양보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진리는 적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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