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인간관
조덕영 박사
1.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는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한, 사도 바울이 말하듯 인간의 본성은 핑계할 수 없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생각은 쓸모없고 마음은 어리석어 어두워졌다고 했다(롬1:21).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으며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존재라고 했다(롬1:21-23).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소멸되어 버릴 것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다. 구약 시대뿐 아니라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에도 샤머니즘과 토템과 물신숭배(der Feitischismus)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셨다.
이같은 인간의 어리석음은 첨단과학기술 시대를 자처하는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하다. 우리 사회 속에서도 고급 승용차 앞에 놓인 돼지 머리나 정부 행사에 고사(告祀)를 위한 떡이나 기관 단체 행사와 제사에 동물의 머리 고기가 등장하는 것이 여전히 낯설지 않다. 하늘에나 땅에나 거짓 신들이 많고 많은 신(神)과 주(主)가 있고 그것을 따르는 어리석은 피조물들이 여전히 허다하다. 바울은 인간의 마음이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보다 피조 세계의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연의 양상들을 섬기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2. 창조주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내어 버려두셨다”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롬1:24, 26, 28). 사람들이 하나님과 참 된 진리를 찾으려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패한 마음으로 합당치 못한 악한 일을 하도록 내어버려두셨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그대로 내어 버려두자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시작했다(롬1:25). 진리를 거짓과 맞바꾸었다.
바울은 오늘날까지 결혼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여 순리를 역리로 쓰는 동성애도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결과라고 했다(롬1:26).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보아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도 이 이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정욕대로 사는 것에 대해 바울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면서 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한 보응(대가)이 있다고 했다. 그 보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바울은 설명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보응, 법적 규제, 동성 간 불편한 동거, 잉태하지 못함, 동성 간 연애로 인해 발생하는 문화적, 심리적, 육체적 불편함과 불균형, 그리고 예기치 못한 질병의 초래 등 보응은 많다.
지금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정치인들이나 우매한 대중들이 있다. 군 생활을 체험한 남자들에게 있어 군 생활 중 당하는 가장 곤혹스러운 상황과 경험은 바로 동성애 성향의 상관을 만나는 것이다. 전혀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들이 일방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적 행위는 불쾌함뿐이요 어떤 병사에게는 자살의 충동을 일으킬 만큼 혐오스러운 체험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당하고 감싸라고? 군 생활을 경험해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 마귀와 귀신과 독사의 새끼들을 감싸라고 하셨던가? 도착(倒錯)을 정상이라 말하면 안 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은 사랑해야 하나 죄와 죄인은 보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이다.
이밖에도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함,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으로 가득한 자들과 수군거리며 서로 헐뜯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건방지고 교만하며 자랑하고 악한 일을 꾸며 대고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미련하며 언약을 배신하거나 인정도 없고 무자비한 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들이 행하는 결과물들이다(롬1:29-31). 하나님의 법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없이 알려주고 경고한다. 그런데 어그러진 인간은 자기들만 이런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두둔까지 한다(롬1:32). 인간을 물질에 불과한 유물론적 일원론적 존재로 믿는 공산주의자들이 상습적으로 거짓말과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의 존재인가. 그렇다! 인간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고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다. 정부가 한반도 대운하를 밀어붙일 때 그 정당성을 설파한 것은 일부 지식인들, 과학자들이었다. 최근 방사성 물질 검출로 대량 회수 소동이 일어난 건강 침대 소동도 음이온이 건강에 이롭다는 일부 방송 의사들의 음이온 예찬에서부터 착안된 광고 결과물이었다. 임산부의 입덧을 드디어 잡았다고 과학의 성과를 찬양하던 진통제 탈리도마이드는 수많은 사지(四肢) 기형의 태아로 인해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 보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그 보응을 충분히 달게 받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다.
3. 바울의 육체론-연약한 육체와 신령한 몸
바울은 육체(육신)라는 말을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F.F. Bruce)는 육체의 용법에 대해 (1) “사람의 신체”(롬2:28; 고후12:7; 갈4:13; 갈2:29), (2) “인간의 혈통 또는 혈연 관계”(롬1:3, 9:3, 5, 11:14), (3) 단순한 “인류”(갈2:16; 롬3:20; 고전1:29)라는 의미로 구분하였다. 주석가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 문제를 좀 더 신학적으로 접근한다.
먼저 그는 신령한 몸과 대조하여 육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전15:44-46). 이 육체는 질병에도 고통 받을 수 있는 연약한 몸이다(갈4:13). 바울은 예수도 이 연약한 육체로 인해 육체적 죽음을 맞아(골1:22) 화목 제물이 되었다고 했다. 즉 이 몸(육체, sarx)는 쳐서 복종시켜야 되는 연약한 몸이다. 그런데 이 육체는 또 다른 성향을 보인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en sarki) 행하나 육체대로(육신의 생각대로, kata sarka) 싸우지 아니하노니”(고후10:3). 이 몸(육체)은 또 다른 경향성, 즉 중의적 요소와 의미가 있음을 언급한다.
사람의 본능에 속한 육체는 첫째 아담에게서 온 것이요(고전2“14) 신령한 생명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육신의 몸은 신령한 생활에 적합지 않으므로 ”사람의 몸“이라 하고 신령한 몸은 ”부활의 몸“이라 하였다. 겉으로 보면 다 같은 육체이나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 이 육체의 몸은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엡6:5).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한다고 우리 몸의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육체의 상전이 장악할 수 없는 몸이 있다. 바로 진정한 하늘의 주인이 다스릴 신령한 몸이다.
바울은 율법적 관점에서는 육체적으로 누구보다 신뢰할만한 인물이었다(빌3:4).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순수 이스라엘 사람이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으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열심을 내었던 율법에 비추어 보면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육체가 전부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율법에 매달린 이 육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마치 배설물이요 쓸모없는 쓰레기나 다름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육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육체조차 의롭게 된다(빌3:9). 그래서 바클레이는 바울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롬7:5)라고 말한 표현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율법적 싸움을 벌이던 때요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얻으려다가 오직 좌절과 패배와 절망을 맞볼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말한다.
바클레이는 이 몸(육체, 육신, sarx)과 유사한 또 한 단어를 지적한다. 바로 사르키코스(sarkikos)이다. 바울은 불신자도 아니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도 아닌, 제 3의 인간 곧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아이처럼 여전히 단단한 것이 아닌 젖을 먹고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병든 육체가 육신의 질서를 잃어버리듯 교회도 시기와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고전3:3-4). 성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설명한 단어라 볼 수 있겠다. 육신을 따라 생각하는 것(롬8:6)과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죽는 것이요(롬8:12, 13) 죄 아래 팔린 삶이다(롬7:1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벗어버려야 한다(엡4:2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갈5:24).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멸해야 한다(롬6:6).
4. 인간의 의식주 문제(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빼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빌4:12). 하지만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의 세상이요 모든 창조 세상은 그리스도가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섭리의 땅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이 바울의 사역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매일 닥치는 섭생에 관한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다양한 음식 규례를 다루지 않던가. 고린도 지역에서 이 문제가 정면으로 발생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헬라의 고린도지역은 우상과 잡신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시장에 출하되는 육류들 대부분은 온갖 잡신들을 향한 음란한 제사 속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바울에게 질문하였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심각한 이슈이기도 했다(행15장, 롬14-15장). 고린도전서 8장 본문을 통해 이 우상에 바쳐진 제사 음식과 먹거리 전반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1) 첫째 우상(idol)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8: 1-7절).
당시 고린도사람들은 우상에 대해 약간의 지식들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서로 고기를 먹어도 되느니 먹으면 안 되느니 논쟁을 벌였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 지식(여기서 지식은 남보다 별난 신비적 지식 즉 영지주의적 지식을 말함)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2) 지식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사랑이다. 3) 지식이 있다고 생각(자랑)하는 자들은 실은 당연히 알만한 것도 잘 모르는 자들이다. 4)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5) 따라서 하나님이 알아주는(인정하는) 사람이 참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인간의 길흉화복, 흥망성쇠, 생사를 주관하지 못한다.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대단하게 여길 필요도, 겁낼 필요도, 거리낄 필요도 없다. 제사 음식이든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든 먹든 안 먹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닌가(6절).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사실 믿는 이의 논쟁거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이방인들이나 따질 문제이다. 속되고 부정 탄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나 두려움을 줄 뿐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2) 둘째 식물은 우리를 세우지 못 한다- 먹거리의 유익은 아주 작은 유익에 불과할 뿐이다(8절).
이것을 일반은총이라 한다. 즉 믿지 않는 이들도 누릴 수 있는 자연 은총이다. 물론 인간에게 바른 먹거리의 유익은 분명 있다(단 10장). 평범하게 먹든 잘 먹든 작은 유익일 뿐이요 영생을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다만 약간의 유익(수명 연장, 육체적 건강)이 있을 뿐이다. 건강하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시90:10). 세우지 못 한다는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질상, 잘 먹는 유럽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우상 식물을 먹는 자들이나 먹지 않는 자들이나 식물은 우리의 영적 삶을 세우는 일과 별 관련이 없다. 음식은 선하지만, 거룩과 무관하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정결하지도, 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 경건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다. 다만,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할 뿐이다.
(3)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 믿음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라(9-12절).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므로 먹든지 안 먹든지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자유 하더라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 믿음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믿음이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고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약한 자를 실족케 함은 아주 큰 죄이다(마18:6). 자유하다고 목사가 거리낌 없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을 보고 초신자들이 멋대로 따라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이 발생한다. 사실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보양식조차 함부로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경우가 있으나 때론 조심해야 한다. 필자는 애완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어느 기독언론 기자가 사철탕 등 보양식 즐기는 교회지도자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4)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앙 지식보다 앞선 복음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다(13절).
먹어도 아무 상관없는 이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떤 개인적 처방을 하고 있을까? 바울은 무엇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절제한다. 복음만 전해진다면 고기 한 점 덜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것이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대선배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필자는 과거 부산에 집회를 갔다가 하루 세끼를 모두 회만 먹은 적이 있다. 집회 장소와 대접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 내륙 지방 출신 사람이라 회를 그다지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내게는 아주 큰 고역(苦役)이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었지만(1-3절) 대접해주시는 분들의 준비된 사랑을 생각해서 거부 하지 못하고 필자는 하루 종일 회를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학적 지식과 처방보다 사랑이 먼저였다. 사도 바울은 먹어도 상관없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형제들을 위한 배려로 평생 먹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강아지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형제들을 위해 사철탕 먹기를 금할 수 있을까? 이것이 범인(凡人)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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