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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성삼위일체의 하나님(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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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Ⅰ. 하나님의 성경적 진술들

1. 자존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자존성(aseity)

(1) I am who I am.

(2) I will be that I will be(존재할 자로 존재할 것이라)

(3) 독립성(independence)-자기-실존, 자기-충족, 자기-함유

(4) 모든 것 소유

(5) 피조물들의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6) 청지기 피조물

2)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셨는가?

(1) 하나님은 비육체적-우신 예수님(성육신의 신비)

(2) 영원한 작정 속 감정

(3) 피조물이 아니신 "하나님의 감정"

(4)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부적절한 감정(향수병, 내일 염려, 고통, 강박감, 중독, 열정의 파도, 감정 부족, 공감 부족 등)

3)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실 수 있는가?

(1) 십자가 지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열정

(2) 사랑의 본성 속 고통

(3) 고통에 동정하시는 하나님(십자가 위에서의 어떤 상해나 상실의 고통)

(4) 예수는 한 인격 안에 연합된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가지 완전한 본성들을 소유하신다(칼케돈회의, 451년)

4) 신적 실존의 네 가지 양식

(1) 하나님은 무시간적, 비공간적, 초월적 실존 가운데 슬픈 사건을 작정하시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평가하신다.

(2)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과 함께 일시적 패배를 겪으신다.

(3) 하나님은 신현적 임재에서 자신의 백성들이 고뇌에 지쳐 있을 때 고뇌하신다(사 63:9)

(4) 성육신에서 아들은 육체적인 아픔, 박탈, 그리고 죽음이라는 상해와 상실의 고통을 당하신다.

Ⅱ.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 안에 셋인 삼위일체 하나님

1) 삼위일체 근거들

2)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3) 하나님과 신들

4) 일신론에 대한 현대 비판들

5)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 복수성

삼위가 하나님이신 그 일체성

1) 기능적 그리고 존재론적 기독론들 : 바람과 바다도 순종케 하시는 그리스도(마 8:27)

2) 예수님의 신성을 당연시 여김: 창조주 예수(요 1:3, 고전 8:6)

3) 그리스도, 언약의 주님: 여호와-퀴리오스-주님

4)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나의 아버지"(마 25:34; 26:29; 눅 24:49; 요 14:23)

5) 예수, 그리스도 : 기름부음 받은 자(선지자-> 왕상 19:10, 제사장-> 출 29:7, 왕->삼상 10:1)

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 요 1:1(테초에 말씀); 요 1:18(하나님을 본 사람); 요 20:28(나의 주 나의 하나님)

7) 그리스도의 다른 칭호들: 인자(단 7:13-14, 요 8:28), 말씀, 하나님의 형상, 구원자, 구속자, 거룩한 자,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그리고 시작과 끝

8) 예수님의 신적 속성들: 요 14:6->길이요 진리요 생명, 지혜, 지식, 권능, 권위

9) 예수님의 신적 행위들: 용서 선포(사 43:25; 44:22; 막 25:7; 예수 이름으로 사도들의 선포-> 행 5:31), 마지막 심판 사역(계 2:23, 요 5:22)

10)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신 예수님: 동등한 존경(요 5:23), 엎드려 "절 함"("프로스퀴네오")과 예배(마 2:2; 요 9:38)

11) 의심스러운 문제 본문들 : 아버지와 아들은 기독교 예배 대상(고전 8:6),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첫 번째 피조물이 아닌, 부활에 있어서 예수님의 우위성(골 1:15)

12) 성령의 신성: 신적 속성(사 11:2), 거룩, 영원, 전지, 지혜, 편재, 불가해적 성령

존재론적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

1) 존재론적(내재적) 삼위일체: 창조와는 별개로 필연적, 영원히 실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

2) 경륜적 삼위일체: 참조, 섭리, 구속 역사를 통해서 수행되었던 창조와 관련된 삼위일체

※ 삼위일체의 요약

(1)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2)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다

(3) 세 위격은 각각 충만한 하나님이시다.

(4) 각 위격은 서로 구분된다.

(5) 셋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영원토록 서로 관련된다.

종속설

1) 아리우스의 존재론적 종속(부인)

2) 위격들의 경륜적 종속

3) 역할의 영원한 종속

4) 종속보다 하나님의 겸손

삼위일체 모델들

1) 어거스틴의 심리적 삼위일체(사랑, 받는 자, 하는 자/ 지능, 기억, 의지)

2) 자연적 지식이 아닌 믿음의 문제(자연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3) 사회적 삼위일체론: 인간 수준에 근거한 상호 인격 파악하려는 견해

삼위일체 유비들

1) 내재의 세계 안에 삼위일체 흔적이 있는가?

2) 창조된 세상 전부는 삼위일체의 흔적들이다(프레임)

 

Ⅲ. 자연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 있는가?

예수 계시 속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삼위일체 흔적', Vestigium Trinitatis)

인간은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다. 육체라는 제한적 조건 속에서 인간은 초월적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의식할 뿐이다. 계시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인식이란 주로 유비(analogia)를 통해 전해진다. 초월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그 흔적이 피조세계 속에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롬 1:20). 토마스 아퀴나스도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원인이기에 그 결과로서 창조 질서 속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유사성”(similitudo)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도 자연 계시 안에서 우리 인류에게 당연히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주시지 않았을까 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

어거스틴은 이 희망을 가진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어거스틴이 주목한 것은 하나님이 이성을 만드시고 이성을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분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자연은 정교하다. 자연을 대충 만드셨을 리가 없다. 자연 계시라고 불충분하게 주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자연 계시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조차 정밀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있다. 사람의 지성과 추론 능력은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크게 다르다.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 스티븐 에반스(C. Stephen Evans)는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성은 당연히 복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이 복음의 방해물인 것은 아니다. 이성은 복음의 조력자이다.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 이성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상식이 무시된 곳에 복음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상식을 무시한 곳에 나타나는 성경 이외의 새로운 직통 계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부족함에도 우리 인간은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복음을 결코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를 그렇게 철저히 비판한 이유다. 하지만 이성도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선하신 도구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천착(穿鑿)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분명 세상에는 신적 흔적(痕迹)이 계시되고 남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자연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찾기로 나아간다.

물론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우매한 시도로 여기는 반론이 늘 있었다. 현대신학자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었다.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터툴리안(Tertull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 나무줄기․ 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 시내․ 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가 나타나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중요한 전제와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2)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3)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 ’와 ‘사랑받는 대상’ 과 ‘사랑’이라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제 8권). 또 사람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마음’과 ‘마음이 그 자체를 아는 그 지식’과 ‘마음이 자체와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 동등하며 한 본질이다”(9권). 더 나아가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이다”(제 10권). 그리고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눈에 인상으로 박히는 그 형태’와 ‘이 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으로 되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제 11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들이 많았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가 본 삼위일체 흔적

미국 창조연구소(ICR)의 소장이었던 ‘창조과학’운동의 원조인 헨리 모리스(H. M. Morris)는 우주와 만물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의 예증으로 ‘공간, 물질,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우주,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지는 시간, ‘본성, 본체,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등을 내세웠다. 그 외에 세 잎사귀의 클로버, 삼각형과 같이 세 개의 것이 모여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사물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 삼원색의 ‘빨강, 노랑, 파랑’ 등을 들었다. 과학자다운 발상이기는 하나 너무 단순하고 불충분하며 잘못하다가는 양태론자라고 오해를 살만한 주장이다.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자적 관심으로 초월의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다가 미숙한 신학적 불랙홀로 빠져들고 마는 경우가 많은 데 모리스에게서도 바로 그런 점이 보인다. 내재의 학문(과학)으로 초월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늘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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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자연 계시 속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삼위일체 흔적)

예수는 복음서 속에서 자신의 신적 속성과 신적 사역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의 영원성(요 1:1; 8:58; 17:5), 전지전능함(마 9:4; 16:21; 마 28:18, 20; 막 5:11-15; 눅 6:8; 7:14; 요 1:48; 2:25; 4:29; 11:38-44; 21:17; 16:30), 무소부재하심(마 18:20; 28:20; 요 1:18; 3:13)은 신적 속성을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그가 스스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의 원천이라고 계시한 것도 신적 속성을 증거하며 다른 인간과 달리 그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Vere Homo)인 것도 신적 속성을 가진 분임을 증거 한다(눅 4:34; 요 6:69; 8:29, 46).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것도(요 5:18)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Vere Deus, 요 10:30)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17-23, 36-37, 43, 45).

예수께서 자연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거 하려한 구체적 모습은 복음서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는 분명 초월의 삼위일체를 자신이 창조한 내재(內在)의 자연을 통한 한계를 지닌 유비의 방식으로 증거 하려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자신이 바로 삼위일체가 아니신가. 피조물 안에 인간이 유비의 방식으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완전하고 온전한 계시는 아니나 인간은 그 흔적의 부스러기를 하나둘 찾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예수와 신학자 사이의 간극이다. 그리고 일부 신학자들이 그렇게 찾고자 하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에 대해 예수가 구체적 언급 없이 침묵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자연 계시가 지닌 유비의 이 신학적 해석의 고민과 괴리에 대해 맥그라스는 정통 교리라는 신학적 매트릭스(matrix)와 단 하나의 고립된 유비 형태의 해석이 아닌 서로 상호 관계성을 가진 이미지를 통해 과대 해석 되는 실수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다고 본다.

나가면서

성경을 통해 예수의 자연 계시는 두 가지 측면 즉 자신이 곧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속 계시를 향한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신학이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켜 왔다’는 생각이 20 세기 신학을 지배하여 온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 신학자들이 자연 계시의 합리성을 알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라거나 무지한 신학자라는 공격을 염려하여 자연 신학이라는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자연 계시의 유용성조차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극단적인 부정적 견해에 대해 바르트의 그 같은 비판은 (1) 바르트의 부적절한 성경적 해석에 기초하며 (2) 바르트 자신이 개혁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주장이나 칼빈이 자연 신학에 대해 반대자의 입장에 있었다고 해석하는 바르트의 견해는 모두 잘못이요 (3)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부정적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20 세기 주요 신학에 있어 자연 계시와 자연 신학을 보는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예수의 자연 계시를 별도로 추적한 본격적 연구가 신학의 주변에서 전혀 눈에 띠지를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대해 어떤 구도로 바라보시고 해석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그 일반 계시가 어떻게 구속의 계시로 연결되는 지 추적해 보는 작업은 언젠가 개인적으로 꼭 한번쯤 시도해 보고 싶은 작업이었다. 자연 계시에 대한 정리는 조직 신학의 한 분야로 일부 정리된 것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나 예수 스스로 자연을 바라 본 자연 계시에 대한 언급과 예수 사역에 나타난 자연 계시적 측면을 별도로 정리하는 신학적 작업이 없었다는 점이 연구의 당위성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오랫 동안 신학이 무관심하게 방치해 온 이 같은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마치 주행의 난코스를 달리는 듯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창조 세상 전반에 대한 외면과 방치는 자연적 참사를 불러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메르스 소동이나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 교훈에서 그것을 이미 절실하게 체험하였다.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가 바라보고 언급하고 사역한 공생애를 통한 창조 계시(자연 계시)를 밝혀보고 구속 계시로 연결하기 위한 접촉점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예수의 자연 계시에 대한 추적은 신학적 미로이기는 해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적 유비

1) 삼위일체는 상징이다(실체 안의 삼중적 구조->헤겔)

2) 세상 모든 것이 삼위일체의 흔적이다(코넬리우스 반 틸)

3) 실재론자들은 특별한 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축소, 유명론자들은 그 반대

4) 물리학의 미립자, 파동, 장의 삼중적 관계(포이트레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주권

1) 예배: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예배

2) 구원: 피조물 예수는 구원 불가

3) 컨트롤: 주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배

4) 권위: 피조물 인간과 다른 삼위일체의 권위

5) 임재:

(1) 창조주-피조물 관계의 관점에 관련 되어 있는 삼위일체 교리

(2) 모든 방법으로 우리 역사로 들어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Ⅳ. 삼위일체론(교리)의 역사

1. 이레네우스(130-200):

1) 폴리캅 제자, 최초 조직신학자 칭호, 영지주의 반대,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

2) 영지주의와의 투쟁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삼위일체론 전개

3) 이레니우스의 삼위일체론적 중재론(참조: 박찬호 교수)

(1) 이레니우스는 기독교적 구원 개념을 적절한 창조 신학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름 아래 묶어질 수 있는 그러한 이단들의 형태를 통해 그 자신 직면하게 된 위기 가운데 창조론에 관한 그의 위대한 공헌. 영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는 구원을 성육신의 결과로 보았다.

(2) 건톤이 본 이레니우스의 관심사 두 가지

첫째, 물질을 포함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다.

두 번째, 이레니우스의 창조 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이레니우스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에 대한 확신. 이레니우스는 무로부터 창조 교리를 가르친 첫 번째 사람은 아니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Theophilus of Antioch)나 다른 사람들이 이레니우스보다 먼저 그런 주장(Gerald May)을 함.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무로부터 창조를 철저하게 주장. “정말이지 사람은 무로부터 어떤 것을 만들 수 없고 단지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부터만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있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시다. 하나님 자신은 창조의 실체를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존재하게 하셨다” (Against the Heresies, 2.10.4).

(3) 건톤이 본 이레네우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창조론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그 형성에 있어 거의 삼위일체론적이지 않은 창조론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있어왔는데 그 상세한 부분에 있어서 창조론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훼손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측면이 결정적이다.

첫째, 삼위일체론적인 모체(matrix)가 이레니우스로 하여금 중재의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레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두 손인 성자와 성령을 통해 창조하셨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이레니우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아닌 존재들과 관계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번째 측면은 동일한 실체의 다른 면, 즉 피조된 우주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자유를 드러내준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을 통해 창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그 자신과 세계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의 신들이나 신플라톤주의의 일자와 다르다. 즉 성부와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두 손을 통해 창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존재의 등급(degrees of being)이라고 하는 헬라적인 교리를 극복한 중재의 신학이다. 성자와 성령이 신적인 것과 피조 세계 사이를 중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중간적인 존재가 있을 필요가 없다.

(4)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다른 것, 즉 피조된 질서라고 하는 단지 두 가지 존재의 등급만이 존재한다는 고전적 기독교 존재론이 여기에서 역사 속에 등장한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진실로 실재적이다. 하지만 창조는 계속해서 자신의 ‘두 손으로’ 붙들고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실재적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자유와 모든 만들어진 것들의 선함의 확증이라 하는 이 양자를 함께 주장할 수 있었다. 다음의 본문은 이 두 가지 주제를 함께 보여준다.

우리를 만드시거나 우리를 형성하신 분은... 천사들이 아니었다.... 주님의 로고스 이외의 그 어떤 누구나 만물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어떤 능력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 자신의 손을 소유하지 않으신 것처럼... 이들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 그들 안에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만물을 만드신 말씀과 지혜, 성자와 성령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4.20.1).

(5) 따라서 이레니우스에게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확립할 수 있는 확신과 이유를 부여해준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총괄갱신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는 창조와 구속의 경륜은 모든 피조된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드러내준다.

2. 터툴리안(160-225):

1) 삼위일체 교리에 공헌한 세 사람(터툴리안, 어거스틴, 칼빈-벤저민 워필드)

2) "프락세아스 논박"(Adversus Praxean, 213년 경)을 통해 성부수난설(일종의 양태론) 비판하면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전개

3)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김석환 교수>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satisfactio) 등은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Hand me the master!”, 키프리안).

3.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185-254):

1) 삼위일체 교리에 공헌, 하지만 성자종속절(Subordinationism)의 오류.

2) 오리겐이 본 창조주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세상이나 인간이나 물질과 어떻게 다른가? 오리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비육체적 존재임을 세 번이나 강조한다. 육체는 피조물의 특성을 반영하는 단어다. 오리겐은 하나님을 육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소개한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빛이라고 했다고 하나님을 이 세상 태양 빛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성령을 육체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 시대인 오늘날 성령을 마치 파워풀한 존재로 여기는 만유내재신(萬有內在神)적 성령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주로 과정신학자들이나 신사도운동가,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을 파워 에너지나 불처럼 여겨 안수 행위로 신자들을 쓰러뜨리거나 ‘불 받으라’는 식으로 인격적 하나님이신 성령을 도구화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오리겐 시대만도 못한 미숙한 성경 해석이 여전히 통용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오리겐은 오히려 하나님을 어떤 육체라거나 육체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분은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덧붙일 수 없는 단순한 지성적 본성이시다. 헬라 철학의 단어를 빌리면 그분은 전적으로 유일성(唯一性, monas), 말하자면 일성(一性, henas)인 분이다. 그렇다고 오리겐이 철학의 하나님을 믿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헬라 철학이 말하는 완전한 통일성과 절대적 불변성을 가진 순수한 정신적 본질로서 우주의 만유 너머에 존재하면서 모든 만물의 영원한 창조주는 이성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물질로부터 세계를 형성하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게(Demiurge)를 믿는 헬라 철학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었다. 신은 자신의 뜻대로 우주를 존재하게 하였고 우주의 본성을 작정하고 만든 것이다.

창조에 대한 오리겐의 기독론적 접근

이 현상 세계를 성부 하나님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성자 로고스(Logos)로 인한 것이다. 오리겐은 창세기 1장 강해부터 창조의 기독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이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 11:27). 이 성자 하나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장자로 ‘지혜’와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한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힘이시며 지혜”(고전 1:24)라 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실체가 없는 존재로 여기면 안 된다. 오리겐은 요한복음 주해를 통해 오늘날 이단으로 정죄된 양태론을 부정하고 있다. 성자는 말씀이며 성부의 모상이다. 이 제 2위의 신이 물질세계를 존재하게 한 창조에 관여한 신의 아들이었다(요 1:3). 그 분이 또한 모든 사람이 구원자이다.

성령에 대한 오리겐의 낯선 해석

오리겐은 성령께서 로고스로 말미암아(through) 지은바 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성령을 아들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 오리겐이 분명 세 위격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성부가 성자보다 뛰어나고 성자는 성령보다 뛰어나다고 본 것은 삼위일체에 “위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정통 교리와 벗어난 낯선 주장인 것이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나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개념은 정통 교리가 아니다. 일종의 층위를 나눈 삼위일체론은 일종의 ‘종속설(Subordinationism)’ 이 되어버리게 된다. 이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층위를 종속적 관계로 구분한 것은 공교회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기독론에 있어 아리우스(Arius)의 유사본질(類似本質)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주석』(Commentary on Hwbrew)을 통해 동일본질(homoousios)의 교리를 발전시킨 오리겐이 종속설(surbodination)로 귀착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리겐은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 성령은 성화의 은총을 베푸신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즉 거룩한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서 은혜를 받을 가치 있는 자들에게 향한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은혜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한다. 오리겐이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보는 군주신론이나 양태론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한 세 본체(位格, hypostases) 혹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속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오리겐이 신학의 한계를 보여준 인물임은 분명하다.

성경 해석에 있어 여전히 부족한 인간의 한계성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 하지만 창조 해석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난제와 다양한 해석들이 현실 속에서 충돌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사는 우리 인간의 생태적 한계 속에서 초대 교회는 당연히 지금의 우리들처럼 성경 속 선지자들이나 특별 계시의 전달자요 성경 저자로서의 사도들과 달리 그 어느 누구도 성경 계시의 해석자로서의 완벽한 인물은 없었다. 계시는 무오하나 초대 교회의 성경 해석자는 드물었고 그들 학자들은 초대 교회의 역사적 공간 속에서 미숙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오리겐에게서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과는 달리 그런 계시의 해석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확인하게 된다. 2천년 가까이 흐른 지금 우리들은 과연 얼마나 바른 성경 해석을 하고 있을까? 과연 교회와 신자들은 성경에 대해 얼마나 바르게 알고 있을까? 첨단 과학 기술 시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창조론의 일치점을 찾기는커녕 일치된 교리보다 충돌하는 영역이 여전히 적지 않음은 무슨 이유일까?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도 중요하나 인간이 많은 부분에서 보다 더 겸손해질 이유를 묵시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창조론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렇다!

4. 아타나시우스(296년 경-373):

1) 아리우스를 정죄한 알렉산드리아 감독(312년 경) 알렉산드로스의 비서

2) 니케아공의회(325) 참석.

3) 비공의회 니코메디아 회의(327) 아리우스 주장 수용.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복권 반대

4) Tyros 회의(335) 아타나시우스 정죄 면직. Trier로 유배. 아타나시우스의 고난과 시련 시작(46년 주교 생활 가운데 17년 5차례 유배 생활)

5)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아리우스 논박>

호모이우시우스(아리우스)<->호모우시우스(Homoousios, 동일본질, 아타나시우스)

6) 성령의 신성 주장<성령에 관한 서신들>

7)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주신 하나님

8)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항상 피조물의 수준을 넘지 못하지만, 무조건 오류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식 방식에 자신을 적응하셨기 때문!

9) 참고: 수도원에 대한 깊은 관심, 수도원주의<안토니의 생애>

5.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

삼위일체 교리 확립("동일본질"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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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um)

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

Forma Recepta Ecclesiae Orientalis. A.D. 381

Credimus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factore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우리는 천지의 창조자이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만드신 한분의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Et in unum Dominum Jesum Christum, Filium Dei [unigenitum], natum ex Patre ante omnia saecula, Deum de Deo, [Lumen de Lumine], Deum verum de Deo vero, natum [genitum], non factum, consubstantialem Patri; per quem omni facta sunt; qui propter nos homines et [propter] salutem nostram descendit de coelis 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ine et humanatus [homo factus] est; et crucifixus est pro nobis sub Pontio Pilato [passus] et sepultus est; et resurrexit tertia die [secundum scripturas]; ascendit in coelum [coelos], sedet ad dexteram Patris; iterum venturus, cum gloria, judicare vivos et mortuos; cujus regni non erit finis.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중의 신이며 빛중의 빛이고 참 신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받아 인간이 되었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받았읍니다. 그는 고난을 받고 장사되었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읍니다. 그리고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Et in Spritum Sanctum, Dominum et vivificantem [vivificatorem], ex Patre [Filioque] procedentem, cum Patre et Filio adorandum et conglorificandum, qui locutus est per sanctos prophetas. 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 Confitemur unum baptisma in remissionem peccatorum. Expectamus resurrectionem mortuorum et vitam futuri saeculi. Amen.

우리는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 생명의 부여자와 주님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인 세계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주시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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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경 또는 니케아 신조(Symbolum Nicaenum)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는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고백한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팔레스타인 기독교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하여 '동질'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가이사랴의 교회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약 265-339)의 신경을 기준으로 공포되었다. 이 신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며, 특히 성자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며, 창조되지 않고 나시었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예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잘못된 교리에 대항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이 신경은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갈라지기 전에 함께 고백하던 신경이지만 로마 가톨릭에서는 나중에 성령이 성부로부터 뿐이 아니라 성자에게서 부터도 나오신다고 고백하게 되는데,(일명 '필리오케'라고도 한다- 본문 라틴어 참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동서교회가 분열하게된 시발로 본다. 동방교회의 입장은 '햇갈리지 않게 애초부터 정한대로 하자'는 것이고, 로마 가톨릭 입장은 교리에 걸맞는 고백을 하자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미사때 니케아 신경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되 사도신경으로 대체할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감사성찬례시 니케아 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며, 사도신경은 만도(저녁기도)에 사용한다.

정통 교회는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 그리고 사도 신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이단과 사이비 문제로 늘 시끄러운 한국 교회는 교회 전통의 성령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 지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고전과 신앙적 전통의 중요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므로 교회의 위기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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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사항

성경은 ‘노르마 노만스’(‘norma normans’= 규범 시켜 주는 규범, norma absoluta, norma causativa)이고 교리나 신조는 ‘노르마 노마타’(norma normata= 규범 되어 지는 규범)입니다.

즉 개혁신학에서 성경은 무오하며 교리사는 어느 정도 오류사로 봅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조도 무오한 말씀에 판단 받아야 합니다.

다만 정통 개신교는 ‘노르마 노마타’를 하나님 말씀의 최종 권위에 의해 규정된 준칙으로 봅니다. 즉 정통 교리와 신조는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작성한, 성경에 일치함으로써 기독교의 보편 진리들을 훌륭히 요약하고, 하나님 말씀과 다른 이질적 교리들을 분별해내며, 교회 교육과 예배에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숙하고 노련하며 성령 충만한 이들 신앙 선배들의 이런 노고(교리와 신조의 전통)가 없었다면 교회는 바른 예배와 교육이 어려웠을 것이고 기독교는 이단 사이비들로 인해 대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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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갑바도기아 교부 1.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329-379):

1) 아리우스파 반대.

2) 갑바도기아 수도 가이사랴의 대주교.

3) 저서: <유노미우스 논박>(아리우스 반박), <삼위일체론>, <성령론>,

4) 하나의 ousia(본질, 실체, substance)와 세(성부, 성자, 성령) 휘포스타시스(실체, 위격, substance) 구분.

5) 바실의 성령론(On the Holy Spirit, De Spiritu Sancto, 375)

(1)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고 성령을 송영으로 찬송하는 일을 변호하기 위한 논문

(2) 성령의 신성 부정하는 Macedonians(성령의 피조성 주장, 콘스탄티노플 감독이었던 Macedonius에서 유래)와 Pneumatomachian(영의 항쟁자들, <"영의 신성이나 인격 부인", “영의 반대자”>) 반박

(3)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성령께서도 행하신다. 다시 말하면, 피조물들의 창조, 갱생, 그리고 성화에 관한 일은 성령이 하시기에 성령께서는 신성을 소유하셔야한다.

(4) 성부는 제 1원인, 성자는 창조주, 성령은 완전케 하시는 분.

(5) 성령의 고유한 인격성

(6) 성령의 신격

*성령은 피조물(κτίσμα)이 아니시다.

*성령은 ‘거룩성의 원천’이다.

*성령은 생명의 수여자

*성령의 신적 존재성은 성화 행위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성령은 성화의 기원(αγιασμού γένεσις)이다.

*성령은 주님(고후 3:16-18)

*성령을 공개적으로 ‘하나님’이라 부르지는 않음

*하지만 사적 편지들(360)에서는 분명하게 성령을 ‘하나님’(Θεός)이라 부름.

7. 갑바도기아 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329-90):

1) 아테네 유학 시 바실리우스 만남

2) 아타나시우스의 "동일 영광", "동일 경배" 사상

3) 비출생(성부), 나심(게네시스), 출래 사상- 성령은 아들과 동일실체

8. 닛사의 그레고리(335경-395)

1) 바실리우스의 동생

2)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상호 관통, 상호상통) 이론을 통해 "한 실체"로 나아감

9. 어거스틴(354-430):

1) 12권의 De Trinitate(399-419) 저술.

2) 하나님의 본체를 호모우시우스(본질, substance)로 표현(헬라 철학 사상과 구분하기 위해 "휘포스타시스"<실체, 본체> 사용치 않음). 즉 영어 substance보다 영어 'essentia'선호.

3) "전유"(專有)를 통해 "세 위격"으로 나아감

※ 삼위일체에 대해 알아야 될 사항

1)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신비한 신개념입니다.

2) 단일신종교인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는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3) 그래서 여기서 이단이 많이 나옵니다.

4) 칼빈=>3위와 일체의 어느 한쪽에 치우쳐도 안되고 사변(思辨)이나 유추로 설명하려 들지도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만 믿어야 되며, 동일한 위엄과 영광과 경배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기독교강요 1권 13장).

삼위일체는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조덕영, 필리핀 마닐라 국립박물관 소장품).

5) 삼신(三神)론과 양태(樣態;모양,mode)론이라는 이단설이 있습니다.

삼신론은 하나님이 세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양태론은 한분이신 하나님이 세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계승-성부고난)는 주장입니다.

6) 칼 바르트=성부는 계시자, 성자는 계시, 성령은 계시되어진 것.

6. 정리(묵상과 적용)

1)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존재에 있어 한분이십니까 세분이십니까?

2) 성부성자성령은 권능과 영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3)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삼위일체종교입니까?

4) 삼신론과 양태론은 왜 이단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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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삼위일체 관련 교회사에 나타난 주요 이단설

1. 단일신론(Monarchianism)

1)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요 그리스도는 인간인데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있다는 주장으로 (양태론적) 단일신론, 군주신론, 동력적 단일신론(인간 예수 안에 비인격적인 신적 힘이 역사)이라고도 합니다.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 200-75)은 대표적 단일신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단일신론은 유대교적 유일신론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접근하려 합니다. 따라서 정통 기독교의 입장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단일신(유일신)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3) 말씀에 의해 수태 되어 마리아의 아들의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본질상 신격인 그리스도와 구별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양자(養子)로서의 아들에 불과하다는 양자론(Adoptionism)이나,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라는 전제 아래 삼위일체를 한분 하나님이 다른 양식으로 나타났다는 양태(modus)로 설명하려한 양태론도 범(汎)단일신론의 범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

1)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이 아닌 오직 하나(monos)의 본성(phisis)만을 가졌다고 보는 주장입니다.

2) 제 4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칼케돈 공의회, 451)는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강조하여 단성론을 부정하였습니다.

3) 칼케돈 공의회 이후 단성론은 유티케스(Euthyches, 378경-454), 줄리안(Julian of Halicarnassus)을 따라 그리스도의 인간적 몸은 신성과 완전히 결합, 변화하여 부패하지 않게 되었다고 본 가현론자와 안디옥의 세베루스(Severus, 460경-538)를 따라 두 본성은 단지 관념에 불과하고 그 본성은 우리의 본성처럼 타락할 있다고 본 세베루스주의자로 나누어졌습니다.

4) 이들 견해는 아직도 시리아의 야코부스파(Jacobite)와 이집트의 콥트(Coptic) 교회(콥트 교회도 단성론파, 칼케돈 공의회 지지파, 동방 카톨릭 콥트파, 이디오피아 정교회 등의 네 분파가 있는 데 여기서는 단성론을 지지하는 콥트 교회를 말함), 이디오피아 교회들의 해석으로 남아있습니다.

3.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

1) 단의론은 단의지론(單意志論), 단일의지론, 일의론(一意論)이라고도 합니다.

2) 단의론은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질만 가졌으므로(단성론) 의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에게 인간적 의지는 없고 하나의 신적 의지만 가졌다고 봅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610-638)였던 세르기우스(Sergius)는 대표적 단일 의지론자였습니다.

3) 칼케돈 공의회(A.D. 451)는 그리스도가 의지에 있어 두 본질을 갖는다고 선포하여 단의론을 부정하였습니다. 즉 칼케돈 공의회는 단성론, 단의지론 모두를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제 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680)는 그리스도가 두 개의 의지를 따르며 인간으로서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된다고 정리하였습니다.

4. 양태론(樣態論, Modalism)

1)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은 양식론이라고도 불리는 데, 전통적 유일신 신앙(단일신론)은 고수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이단 이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입장입니다. 한분 하나님께서 모양만 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형식(forms)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은 사라지고 단일한 신격만 남게 됩니다.

2) 본래 이 단어는 독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이 삼위일체에 대해 이단적 교리를 가지고 있던 노에투스와 프락세아스, 3세기 사벨리우스의 공통적 요소를 말하려고 도입한 단어였습니다.

3) 전형적인 양태론은 같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구속에는 성자 하나님으로, 성화 때는 성령 하나님으로 활동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즉 양태론은 교회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부정합니다.

4) 때로, 말로는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삼위일체와 양태론을 잘 구분하지 못해 양태론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양태론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있어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와 설명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설명은 쉽지 않더라도 성경은 분명 하나님이 삼위일체임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양태론적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2. 대표적인 양태론자 세 사람

1) 프락세아스(Praxeas, ?-?):

(1) 최초의 양태론자로 창조주 하나님은 성부 한분으로 아버지 자신이 동정녀에게 들어가 그 자신이 동정녀에게 나시고 그 자신이 수난 받으셨다 주장하여 삼위의 위격 구별을 부정.

(2) 터툴리안이 비판.

2) 서머나의 노에투스(Noëtus of Smyrna):

(1) 200년 경 스미르나 장로회의에서 이단 정죄

(2) 성부가 친히 성육신하시어 그리스도가 되어 고난 받고 죽었다가 스스로 부활했다는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tripassianism) 주장.

(3) 히폴리투스는 노에투스를 최초 양태론자로 봄.

3) 사벨리우스(Sabellius, ?-260):

(1) 하나님은 한분으로 신격의 엄중한 단일성을 가르침.

(2) 따라서 한분 하나님이 창조와 율법 수여 시에는 성부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양태론의 절정을 이룬 인물.

3. 양태론의 주요 역사

1) 처음에는 교황 칼리스투스(Callistus, 217-222)가 사벨리우스에 동조했으나 결국 파문

2) 263년 로마 회의에서 정죄, 파문 당함

3) 종교개혁 시대 세르베투스(M. Servetus)와 18세기 신비주의자 임마누엘 스웨덴 보르그(I. Swedenborg) 등에게서 다시 등장함.

4) 오늘날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양태론에 빠져서 방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회는 늘 바른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