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마귀의 대결 구도’로 놓는다. 심지어 인류사(人類史)를 ‘하나님과 마귀의 투쟁사’로 규정하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구속사(救贖史)를 ‘그리스도와 마귀의 대결적 관점’에서 풀어낸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역시 마귀와의 일전(一戰)을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는 말씀을, 그들은 그리스도가 마귀를 박살내려고 세상에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깨뜨렸다(창 3:15)’는 소위 ‘원시 복음(protoevangelium)’ 역시 그리스도가 마귀과 싸워 그의 머리를 박살냄으로 구속을 완성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예컨대 영화 드라큘라(Dracula)의 주인공이 악귀 들린 자를 십자가 형상(形像)으로 물리치는 것과 유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택자 구속’은 그리스도와 마귀의 피 터지는 싸움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귀와의 전투 장소도 아니고, 또한 그것으로 그를 굴복시킨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마귀와 상대하기 위한 어떤 것이 아닌, 택자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속죄 제물(sin offering, 贖罪祭物)이었다.
성경이 ‘십자가 죽음’을 ‘마귀의 패망’과 연동시킨 것은(골 2:15) 그것(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구속하여 죄의 삯인 사망(롬 6:23)을 폐하니 그것(사망)에 기생하던 마귀가 무력화 됐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Origenes, 185년경- 254년경)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마귀에게 바친 속전(贖錢)이었다’는 소위 ‘사단 배상(賠償)’을 주장한 것도,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마귀와의 거래 관계쯤으로 본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택자의 ‘구속 경륜’에서 ‘마귀’를 핵심 사안으로 삼지 않았다. 예컨대 하나님과 마귀의 대결구도 속에서 그것(구속 경륜)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택자를 대신해 ‘죄삯 사망’을 지불하므로 그것을 성취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죄의 권능(the power of sin)’이 ‘율법’에 있으며,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이 ‘율법의 완성(해방)’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말씀 어디에도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는데, ‘마귀’가 연루된 흔적이 없다.
◈마귀는 주권자가 아님
성경은 ‘마귀’를 ‘하나님의 대적자(살후 2:4)’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말은 신중하게 사용돼야 한다. 그것을 ‘마귀가 하나님의 라이벌(rival)’이라는 뜻으로 곡해시켜선 안 된다. 그 말은 ‘하나님 대적을 그의 속성으로 삼은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마귀의 소임이지만, 그가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용과 통제 아래서만 그렇게 된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계 17:17).” 마귀가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갖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과 그의 뜻을 이루는 한도 내’에서 라는 말이다.
그가 주권자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사실은 종말 때 그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운명임을 통해 확증된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계 20:1-3).”
그리고 그 때까지 그의 능력 행사도 제한적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제어 아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기생할 숙주인 사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에게 마귀는 종이호랑이(a paper tiger)에 불과하다. 그가 세력을 떨칠 대상은 사망이 왕노릇하는 불신자들이다. 이는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 2:14)’ 이기 때문이다.
◈택자와 불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
마귀는 그의 악함으로 ‘하나님의 대적하는 일’을 할 뿐더러 ‘택자를 연단하는 일’을 한다. 이는 택자에 대한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한 ‘연단의 통로’로 사용하심으로서이다.
만일 ‘마귀’가 없다면 성도가 시험과 연단을 받을 일이 없고, 나아가 성화를 이루고 상급받을 일도 없게 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0:10)”.
‘마귀의 시험’이 없다면 성도들이 영적인 전투나 승리도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을 시험하는 마귀와 그것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요 14:30)과의 전투를 통해 승패(勝敗)를 경험한다. 마귀의 시험을 이긴 승리자 욥은(욥 2:10) 그로 인해 배의 축복을 받았다(욥 42:12-16).
반면 다윗과 베드로는 사단의 시험을 이기지 못했고, 그것을 통해 연단을 받았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하 21:1)”.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 26:74)”.
그러나 이 마귀의 시험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제한적으로 행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택자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당하게 하시며 감당치 못할 때는 피할 길을 열어주어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다(고전 10:13).
물론 어떤 경우에는 마귀로 하여금 택자의 생명을 노략질하도록 허용함으로 그로 하여금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신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또한 ‘마귀와 그의 시험’은 불택자들을 저주하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그들이 복음을 통한 ‘구원에의 부름(a calling to salvation)’을 받지 못하도록 복음을 듣는 즉시 마귀가 뺏어가고,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도 한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마 13:19)”.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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