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오늘날 ‘오직 성령(only Holy Spirit)’의 슬로건(slogan)은 오순절주의자나 세대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간주되고, 일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에선 오히려 그것이 터부(taboo)시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성령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온 것들이다.
사실 ‘오직 성령’은 ‘성경의 슬로건(bible slogan)’이다. 기독교 신앙은 시종(始終) ‘성령’으로 일관한다. 성령의 좌시(坐視)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좌시이다.
◈성령의 신앙
‘기독교 신앙’은 신적인(Divine)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의 신앙’이다. 생득적이고 자연적인(natural) 것에서 나올 수 없는 ‘하나님 기원적’이라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인 ‘신앙고백’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으며, 자력으론 불가능하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그것은 인간 자력으로 가질 수 없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엡 2:8)는 말이다.
우리가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그들이 자연인의 종교성(일반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단 ‘인문학적인 지성(humanistic intelligence)’에 더 의존한다.
하나님을 열심히 되뇌이며 그를 대망하는 그들의 모습이 일견 ‘경건의 모양새’를 띠나, 사실 그들은 ‘다른 신(other gods)’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단순한 ‘종교적 구도자(a religious seeker, 求道者)’일 뿐, ‘하나님을 찾는 자(God- seeker)’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해 죽은 인간의 생득적인 종교성과 지성으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롬 3:11)”고 단언한다. 따라서 그들이 찾았다고 떠벌이는 신(神)은 ‘삼위일체 하나님(the triune God)’이 아닌 ‘다른 (other gods)신’이다.
그들 중엔 ‘하나님 마니아(Godmania)’인 유대인들(Jews)까지 포함된다. 그들이 오래 야훼 신앙(Yahwism)을 가졌고 그토록 율법에 열심을 보였지만, 그들이 찾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닌 ‘단일신 야훼(henotheistic Yahweh)’였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찾지 않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만났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나 경건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7)”.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롬 10:20).”
만일 누가 정말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의 자력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에 의해 찾은 바 된 것(to be found)’이다. ‘잃어진 양’이 스스로 목자에게 돌아올 수 없듯(눅 15:4-6), ‘잃어진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찾은바 될 뿐이다(롬 10:20).
◈성령의 가르침
인간을 구원하는 ‘삼위일체 복음’은 ‘하나님의 사정(the things of God, 고전 2:21)’이다. 그것은 ‘영이고 생명(요 6:63)’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그것 출처는 ‘저 위의 천국’이다(마 24:14).
따라서 땅에서 나고 땅에 속한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으며, 위로부터 오신 분으로부터만 그것이 알려진다. 미중생한 자연인에게 그것은 오히려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31-32)”.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지혜로 복음을 알려고 하거나 그것을 가르치겠다고 덤비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설교자는 오직 성령이 청중을 설득해 주길 기대하며 복음을 말해야 한다. 그가 복음을 말하는 대상은 사람이지만 그가 의식(意識)해야 할 분은 성령이시다.
설교자는 ‘성령’께 호소하면서 ‘청중’에게 복음을 말하는 자이다. 강화도(江華島)의 어떤 성공회(聖公會) 예배당은 설교단이 회중이 아닌 십자가 벽면을 향해 있다고 한다(직접 확인하지는 못함). 설교자가 호소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함을 상징화 한 것이라 한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고전 2:13)”고 한 것은 그가 복음을 성령에 호소하여 말했다는 뜻이다. 곧, 피드백(feedback)을 ‘청중’이 아닌 ‘성령’으로부터 구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는 ‘말의 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 수 있다며 그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물론 여기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만 의식하여 복음을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말한다’거나, 신비주의자들처럼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준비 없이 설교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말의 지혜’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사실 이 말을 한 사도 바울의 어법은 누구보다 논리정연하고 수사학적이었다). 태생적으로 인간의 사고(思考)는 논리적이기에, 설교자의 어법이 논리정연(論理整然)할 때 청중의 ‘복음 이해도’는 상승된다.
‘인간 지성과 성령’이 유기체(有機體)를 이룬다는 ‘성경의 유기적 영감원리’에서 보듯, ‘말의 지혜’와 ‘성령’역시 상호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 둘의 분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음을 말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과 ‘말의 지혜’를 분리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학적인 어법(a scholastic grammar)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혹은 ‘성경과 성령의 통제 아래서 말의 지혜를 사용 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증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사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신적인 사랑(Divine love, 아가페 사랑)’인 동시에, ‘성령의 증거’로만 알려지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증거 없인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지 않는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이는 [또한] 피조물인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증거 할 수가 없다(하나님 역시 그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신 바이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따라서 인간은 감히 자신이 ‘삼위(三位)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복음 전도’는 삼위 하나님께 당신을 자증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한다(testify, 행 20:24)’고 한 표현도 다만 ‘보고 들은 것을 진술한다(계 1:2)’는 뜻이지, 삼위(三位)의 ‘신적 자증(Divine self-testimony)’ 같은 것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진술하면 삼위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자증(self-testimony, 自證)하신다.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이,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증거하신다.
다음 ‘증거하는 이가 셋’이라는 사도 요한의 말은 ‘삼위(三位)의 자증(自證)’을 말한 것이며, 이 각 위(位)의 증거가 합하여 완전한(하나의) 증거를 이룬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하나님의 말씀)’과 ‘피(성자 그리스도)’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7)”.
이 외에도 성령은 사랑(롬 15:30), 능력(롬 15:13), 봉사(빌 3:3), 기쁨(살전 1:6), 평안(엡 4:3)의 원천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에서 성령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령’은 성도의 신앙과 삶의 원천이며, 그의 슬로건(slogan)이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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