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진화론비판 ~ 유신진화론은 성경적 창조론에 배치”에 대한
3편의 논문(철학 박창균, 신학 김윤태, 생화학 정선호) 논평
<3월 11일 오후 3시. 토>
-양재 온누리교회 화평홀, 기독교학술원 포럼, 논평원고-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 D.)
1. 시작하며- 유신진화론이라는 난제
밀레도의 철학자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에게는 기원과 진화에 대한 사변적인 생각들이 있었다. 이들 초기 철학자들의 관심이 자연의 움직임(Change)이었던 점에서 그러한 여지는 필연이었다. 초기 철학을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자연철학(Physica)이라 부르는 것도 이들이 일종의 우주·기원론 학자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은 엠페도클레스(주전 504-433)나 자연이 사다리(ladder of nature)의 연속체로 비 생물로부터 식물, 하등·고등동물 그리고 인류로까지 이어진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까지 연결된다. 이들이 신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참 된 창조주를 알았다기보다 일종의 물활론적, 목적론적 사상이었다. 이 고대 철학 속 소박한 자연발생론과 진화론은 초기 기독교 신학의 주요 이슈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기독교 핵심 교리의 대부분이 공고해지는 상황 속에 18-19세기 영국의 지질학자 제임스 허튼(1726-1797)이나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1859)과의 대면은 이 논쟁을 촉발시킨 측면이 있다.
“이 쉬운 자연선택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이런 바보 같으니!”라는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1825-1895)의 탄성은 이 논쟁에 암시된 종교성을 예측케 한다. 기독교는 norma normata가 성숙되어 가던 시점에 불거진 이 진화론으로 인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본 학술원의 “유신진화론 비판”에 나선 세 학자들도 “진화론”에 담긴 종교적 함축을 토로하는 이유다.
왼쪽부터 정선호, 박창균 교수, 김영한 원장, 김윤태 교수, 허정윤 교수, 조덕영 교수. ©기독일보 장지동 기자
2. 논문의 요약
박창균 박사는 철학자로서 이 논쟁의 고민과 갈등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학자다. 박 박사는 이미 진화론이 학문 영역의 이론을 넘어 자연주의 세계관의 핵심으로 현대인의 의식과 사고 그리고 판단에 깊숙이 스며들어있음을 지적한다. 진화론적 자연주의는 암암리에 말과 행위, 사회적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신앙과의 일관성을 흐트러지게 만든다. 박 박사는 진화론이 신자들에게 교회와 학교 사이 이중적 삶의 딜레마를 만든다고 지적한다.
즉 진화론이 하나의 이론임에도 과학자 대부분의 동의와 축적된 과학적 성과로 간주하기에 이를 부정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의 고민이 깊다는 점을 역설한다. 유신 진화론을 인정하게 되면 전통적으로 수용하는 성경 해석에 ‘상당한’ 수정이 요구되고 그 수정의 폭에 따라 기독교 정체성마저 흔들린다는 우려다.
과학 발전의 극치와 성경 이해가 서로 완벽해진다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서로 갈등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유신 진화론이 아직 극치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과학임에도 쉽게 타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다. 결국 논의의 핵심은 진화론이 참인지 여부에 달려있다. 이에 따라 유신 진화론의 운명도 결정된다. 그러나 박 박사가 언급한 대로 진화론이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결국 기독교 믿음의 창조론과 자연주의를 신조로 하는 진화론은 전연 다른 세계관으로 모두 믿음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
조직신학자 김윤태 박사는 유신진화론은 일종의 유사 기독교 사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과 신학을 현대인들의 과학적 지성에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며 유신진화론에 대해 좀 더 완강하게 반대한다.
신학자로서 김 박사는 현대 과학이 말하는 진화를 믿는 현대인들의 지성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사이에는 거대한 간격과 괴리가 분명 있다고 논증한다. 현대 과학을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성경을 믿는 믿음을 부정할 수도 없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진화와 창조의 문제는 그야말로 난제인데, 성경과 과학, 기독교 신앙과 현대적 지성 사이의 괴리와 갈등의 문제를 조화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 유신진화론이라고 보았다. 곧 둘 사이의 괴리를 먼저 현대 과학이 말하는 진화를 수용한 후 그에 맞춰 성경의 하나님의 창조와 이를 믿는 기독교 창조 신앙을 합리화 하려는 시도라 했다.
김 박사는 유신진화론은 기독교의 근본 신앙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논증한다, 신론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전지·전능성, 작정과 섭리 교리 문제;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원죄 문제; 기독론 관련 대속의 의미와 범위 문제 등등 기독교 신앙에 유신진화론은 여러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정선호 박사는 탁월한 생화학자로, 1861년 루이 파스퇴르의 백조목플라스크 실험은 당대의 논란이 되었던 생물의 기원에 대한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생물은 생물에서만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물 내 발생을 뜻하는 생물속생설의 시작이었다고 소개한다. 그 후 러시아의 생화학자 오파린이 1924년 제안한 생물의 기원에 대한 원시지구에서의 화학진화 가설이 1952년 유레이와 밀러의 실험 등에 의해 비생물속생설을 제안하는 프리바이오틱 화학(prebiotic chemistry) 연구를 파생시켰음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메리필드와 파우너의 펩타이드 화학합성기작과 관련된 현대 과학적 발견에 대한 고찰과 해석을 통해 비생물속생설에 근거한 단백질 및 펩타이드의 합성이 초기 원시지구환경과 같은 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할 수 없음을 확률적으로 추적하여, 파스퇴르의 생물속생설에 근거한 펩타이드 및 단백질의 생합성이 여전히 유효함을 탁월하게 증거하고 있다.
3. 연구의 독창성과 탁월성
박 박사는 자신이 창조론자요 반진화론자임에도 유신진화론자들이 절반 가까운 현실적 고뇌를 기독 철학자로서 어떻게 평가하고 접근할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며 접근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이미 반진화론 진영과 유신진화론 진영은 기독교 안에서 첨예하게 갈라졌다. 박 박사는 바로 현실적으로 이 점에 주목한다. 국내에서도 <창조과학운동>, <지적설계운동>, <창조론오픈포럼>, 우종학(천문학) 주도의 <과신대>, 최승언(지구과학) 주도의 <이수포럼>, 김용준(유기화학)·신재식(조직신학)·김흡영(조직신학) 등이 참여한 <과학사상연구회>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각각 서로의 접점이 다르기에 융합은 쉽지 않다. 이 부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가 진지한 철학자로서의 박 박사의 고뇌라 할 수 있다. 박 박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한 존중에서 그 접점을 찾으려 한다.
박 박사는 철학적 관점이 과학지식을 신뢰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거부감을 줄 수 있다 고백한다. 하지만 박 박사는 진화론이 전제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그 자체 모순이고 자연선택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박사는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열린 태도를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제안한다. 물론 과학지식과 인간 인식의 한계의 철저한 성찰과 자기반성, 더 근원적으로는 성경 말씀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고 했다.
즉 무신론적 진화론과 진보적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는 비판의 강도를 높이되 복음주의자들이 고려하는 형태의 유신 진화론에 대한 태도는 형제 사랑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유신 진화론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중단하자는 것은 아닌 유신 진화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다면 역지사지로 그들의 신앙과 학문 사이의 고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신의 이론의 확고한 입장은 견지하되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태도는 온유와 겸손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비 진리와의 타협이 아니라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존중하는 그리스도인의 품위와 무신론적 자연주의라는 더 큰 공통의 적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했다.
김윤태 박사는 개혁주의 조직신학자로서 유신진화론의 성경적, 신학적 위험성을 좀 더 강하고 완강하게 설파한다. 유신진화론의 창조 개념은 개혁주의자로서 볼 때 ‘창조’에 대한 바른 이해라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존재하게 하는 행위, 곧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행위로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 곧 이미 존재하는 것 내에서 어떤 변형을 일으키는 행위는 ‘조작’(operation)이지 ‘창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신진화론의 존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창조개념은 creatio ex nihilo라는 성경과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그것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신앙과도 맞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유신진화론의 오랜 기간 창조 개념에도 침묵한다. 따라서 유신진화론의 이런 생각들은 성경에 인간의 거짓되고 비과학적 상상과 추측을 살며시 교묘하게 덧붙인 것이다.
정선호 박사는 생화학적 성과를 수학 확률적 논리로 보다 정교하게 진화론 비판에 연결하고 있다. 사실 생화학, 효소화학, 유기화학, 식물생리화학, 토양화학, 농약화학, 발효화학 등 온갖 화학 관련 과목을 학부와 대학원에서 배웠던 신학자로서 필자는 그 정교하고 조직적인 생화학 회로가 우연이나 진화의 결과라 전혀 믿을 수가 없다.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기기인 컴퓨터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천억 배 복잡한 살아있는 생체 내 생화학 회로는 그 역동성과 정교함과 항상성(恒常性)에 탄성(시 139:13-16)이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나가면서-다시 돌아온 신학적 고민
지면 관계로 이 짧은 논평을 마치며 다시 근원적인 신학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몇 가지 신학적 관심 사항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1) 기독 지성인 사이에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팽팽하게 맞선 현실적 두 입장(반진화론과 유신진화론)을 어떻게 바르게 볼 것인가?
2) 자연과학적 논증이 일신론을 탈피하여 과연 오류 없이 삼위일체 창조에 접근할 어떤 틈새는 있는가? 신학의 도움 없는 냉소적인 과학적 논쟁이 혹시 영지주의자들에게 창조론의 주도권을 내어주는 쓸데없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가?
3) 창세기 1장을 시대에 따라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손질해왔다면 창세기 1장은 아마 누더기 책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과연 우리 시대는 창세기 1장을 과학을 도구로 자신 있게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과학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가?
4) 왜 하나님은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되는 두 관점에 여지(유대교의 “찜쭘”이나 기독교 “아디아포라” 등)를 여전히 남기시고 과제로 두시는가? 우주와 하나님과 기원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 야기가 시간의 제한 속에 살아가는 유한한 우리 인간에게 풍성한 사유를 제공하시는 파라독스적 요소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5) 좋은 신학은 역사적이다. 19 세기 불거진 이 진화론 문제에 개혁신학자들의 역사적 성경해석방식(칼빈의 “accommodation” 등)은 여전히 어떤 신학적 영감을 주고 있는가?
6) 혹시 19세기 이전에는 전혀 이슈가 되지 못했던 <창조냐 진화냐>의 낯선 구도보다, 역사 속 <창조냐 우연이냐>의 구도가 여전히 더 바른 성경적 구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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