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 웨신서 7장 2항의 행위언약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6)
글을 시작하며
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 주신 생명이 마치 영생이 아닌 것처럼 묘사된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의 웨신서 7장 2항은 매우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 주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영생)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웨신서 7장 2항의 이 오류를 눈치 채지 못하고 방치함으로써, ‘능동순종’과 같은 터무니없는 돌연변이 교리가 김병훈, 방상봉, 이승구 교수 등에 의해 마치 개혁파의 정통 교리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온 것이다(“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기독교포털뉴스, 2021.11.16.).
이들이 주장하는 ‘능동순종’ 교리의 심각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고 또 모자란다. 왜냐하면 ‘능동순종’ 교리는 하나님이 일하신 인간 구원의 유일한 장소인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의 한 부분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십자가’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교묘하게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율법에 순종하셨다는 언급은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그 의를 전가시켰다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성경 도처에서 수도 없이 만날 수 있다.
복음의 최고 변증가라고 할 수 있는 바울도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할 때, 율법을 잘 지키신 예수를 전한 적이 없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고전1: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골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래서 그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으며(고전2: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했다(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이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은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동순종’ 교리는 웨신서 7장 2항의 오류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유일하게 나타난 십자가를 공격하는 정교한 사탄의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능동순종’ 교리가 마치 복음처럼 위장되어 유포됨으로써, 이 교리에 의해 수많은 영혼들이 미혹되어 십자가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러나 이제라도 정이철 목사가 ‘능동순종’의 무서운 함정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강조한 “십자가만”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며, 또한 감사해야 할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닐 수 없다.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처음 생명은 영원한 생명인가, 아닌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생기를”로 번역된 히브리어 “נִשְׁמַת חַיִּים”(니쉬마트 하임)은 “숨, 호흡, 기운, 영혼” 등의 의미를 가진 “נְשָׁמָה”(네솨마)의 연계형 “נִשְׁמַת”(니쉬마트)와 “생명” 등의 의미를 가진 “חַי”(하이)의 복수형 “חַיִּים”(하임)이 결합된 말로서, 하나님이 사람(아담)에게 불어넣으신 이 “생기”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생기”임에 틀림없다. 이는 LXX 창2:7에서 히브리어 “נִשְׁמַת חַיִּים”(니쉬마트 하임/생기를)을 “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으로 번역한 데서 더욱 분명해 진다.
LXX 창2:7의 헬라어 “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에서 “πνοή”(프노에)는 “숨, 숨결”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LXX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는 LXX 시150:6(호흡이/πνοὴ/프노에/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이다. 또 “αὐτοῦ”(아우투)는 ‘3인칭 단수 재귀대명사’이므로, “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을 직역하면 “그 자신의 생기를”(Breath Himself)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불어넣으신 “생기”는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의 “생기”라는 말이다. 또 “πνοή”(프노에/생기)가 “바람, 성령”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רוּח”(루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πνεῦμα”(프뉴마)와 동일 군의 단어임을 고려한다면,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기”는 하나님 자신의 “생기”임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생기”를 받은 아담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영생)을 소유한 자임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만약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주신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언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는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모순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언하신 죽음은 단순히 육신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고서, 아담에게 영생을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언하신 죽음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영생을 다시 빼앗으시겠다는 의미이므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반드시 죽으리라”의 경고는 아담에게 영생이 있을 때 가능한 경고라는 말이다.
따라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는 웨신서 7조 2항에서는 아담에게 주시지도 않은 영생을 다시 빼앗겠다고 하시는 모순된 하나님, 억지를 부리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웨신서 7조 2항은 반드시, 그리고 최대한 신속하게 수정되어야만 한다.
웨신서 7조 2항의 오류에서 나온 ‘능동순종’ 교리의 악마적인 모순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나름대로 ‘능동순종’ 교리가 성경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성경 구절들을 인용한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순종이 언급된 성경 구절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경 인용은 눈감고 야옹하는 어처구니없는 협잡에 불과하다. 왜 그런지 이들이 사용하는 성경 구절 하나를 통해서 살펴보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에서의 예수님의 순종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신 ‘능동순종’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수동순종’ 모두를 의미한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에 십자가 외에 ‘능동순종’을 더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능동순종’ 교리를 롬5:19에 억지로 끼워 맞춘 터무니없는 해석이다.
롬5:19에서 바울은 “διὰ τῆς παρακοῆς”(디아 테스 파라코에스/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에서 “παρακοῆς”(파라코에스/순종하지 아니함)를 단수로 표기한다. 이는 많은 사람의 죄인 됨이 아담의 단 하나의 불순종,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행위임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동일하게 바울은 “διὰ τῆς ὑπακοῆς”(디아 테스 휘파코에스/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에서 “ὑπακοῆς”(휘파코에스/순종하심)도 단수로 표기한다. 이는 많은 사람의 의인됨이 예수님의 단 하나의 순종,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바울은 빌2:8에서도 죄인들의 구원이 예수님의 단 하나의 순종, 즉 십자가로 말미암았음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여기서도 바울은 “ὑπήκοος”(휘파코오스/복종)를 단수로 표기함으로써,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하신 복종이 단 하나의 복종, 즉 십자가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그것도 모자라서 바로 뒤이어서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이 “복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더욱 분명히 한다.
따라서 ‘능동순종’ 교리가 개혁파의 정통 교리라고 주장하는 자들과 이를 추종하는 청교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한 성경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구원은 없다. 이런 까닭에 ‘능동순종’ 교리와 이를 추종하는 ‘청교도주의’는 대단히 위험할 수밖에 없다.
정이철 목사가 <바른믿음>을 통해 ‘능동순종’ 교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바로 ‘능동순종’ 교리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를 부인하는 이단적인 사상이며, 그러므로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없는 치명적인 위험성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는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하여 또 한 번 [청교도 사상의 피해자가 될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공범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는 제목의 글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이라는 이 교리를 믿지 않으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처럼 말하는 청교도 추종자들은 사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로는 단지 지옥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하였고, 평생의 율법준수의 공로로 우리를 의인되게 하여 천국에 살게 만들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는 이 능동순종 청교도 교리는 악마의 사상입니다.”라는 강한 표현으로 ‘능동순종’ 교리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능동순종’ 교리의 허구성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능동순종’ 교리를 개혁파의 정통 교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들이 주장하는 ‘능동순종’ 교리의 허구를 이해하기 쉽도록 짧은 소설 하나를 아래와 같이 썼다.
왕이 ‘이 아담’이라는 사람이 불렀다. ‘이 아담’은 왕의 부름에 어깨가 으쓱해서 촐랑대며 까불거리며 왕에게 나아가다가, 그만 옆에 진열된 왕이 가장 아끼는 값비싼 항아리를 건드려서 깨뜨리고 말았다. 왕은 노하여 ‘이 아담’을 옥에 가두고, ‘이 아담’에게 항아리 값을 변상하지 않으면, 사형을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아담’은 값비싼 항아리 값을 지불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아담’의 죽음은 불을 본 듯 분명했다. 그러나 이때 어떤 자가 항아리 값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항아리 값을 들고 왕에게 나아갔으며, 왕에게 항아리 값을 지불함으로써, 사형을 앞둔 ‘이 아담’을 옥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아담’의 생명을 구했다.
그런데 그가 항아리 값을 들고 왕에게 나아갔을 때, 그는 당연히 ‘이 아담’처럼 까불거리며 촐랑대며 왕에게 나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항아리를 깬 자의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그는 정중하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왕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담’이 옥에서 나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중하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왕에게 나아간 것과는 직접으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아담’이 옥에서 나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가 왕에게 ‘이 아담’이 깨뜨린 항아리 값을 대신 지불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첫째 아담으로 인한 죗값(항아리 값)을 지불하기 위해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 흠 없는 대속 제물로 죽으시기 위하여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시며,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아담으로 인한 죗값(항아리 값)을 자신의 생명으로 지불하심으로써, 아담으로 인한 죗값(항아리 값)을 사하시고, 우리를 죽음의 옥에서 구원하셨다.
왕에게 항아리 값을 가지고 나가면서 정중하게 조심스럽게 걸어간 그 사람의 걸음이 항아리를 깨뜨린 ‘이 아담’을 옥에서 나오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항아리 값을 왕에게 지불했기 때문에 ‘이 아담’이 옥에서 나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철저하게 율법에 순종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성자의 생명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옥으로부터 나와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과 청교도주의자들은 그가 ‘이 아담’을 대신해서 항아리 값을 지불했지만, 거기에다 ‘이 아담’의 까불거리며 촐랑거리며 걸어간 것에 대하여, 정중하게 조심스럽게 걸어갔기 때문에 ‘이 아담’이 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능동순종’ 교리는 정이철 목사의 외침대로 “악마의 이단 사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능동순종’ 교리의 배경이 된 웨민서 7조 2항의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는 반드시 이제라도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처음 아담에게 은혜로 주신 영생이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계속 유지될 것이 약속되었다”로 수정해야 하며, ‘능동순종’을 주장하고 추종하는 자들도 이제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요엘2:12)
이창모 목사는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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