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그리스도인이기를 소망하는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정근모 박사
세계가 인정한 검증된 과학자
한국에는 참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 과학자 중의 과학자가 있다. 바로 우리가 알아보려고 하는 정근모 박사이다.
스웨덴 왕립 한림원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만이 회원이 될 수 있는 기관이다. 순수 한국 국적을 가지고 이 모임에 한국 최초의 정회원이 된 사람은 누구일까? 미국 공학 한림원이나 세계 원자력 한림원도 마찬가지이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만이 속한 기관이다.
이들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 모임에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모두 정식 최초의 정회원이 된 한국인은 누구일까?
바로 과기처 장관을 두번이나 역임하신 원자물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 정근모 박사(한국 사랑의 집짓기운동-해비타트-이사장, 전 명지대 총장, 1938- )이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1992년 스웨덴 왕립 한림원에 정식 회원을 배출한 세계 27번째 나라로 당당히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는 1998년에는 세계원자력 한림원이 주는 세계 최초의 공로상도 수상한다.
일찍부터 나타난 천재성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정근모 박사는 뛰어난 ‘천재’로 통한다. 이와 같은 그의 뛰어난 능력은 이미 어릴 적부터 나타났다. 그는 1951년 제 1회 전국 초등학교 대상 국가고시 전국 수석을 거쳐 당시 최고의 수재들만 들어가는 경기 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고교 생활은 4 개월 만에 월반하여 검정 고시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서울대 물리학과와 행정대학원을 마치고 미국으로 간 그는 23세가 된 해에 미시간 주립대에서 “양자 역학적 분자의 구조론”이라는 논문으로 이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1970년 대 우주탐험시대에 ‘우주에 물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중요한 연구 였다.
워낙 뛰어난 논문이라 보통 사람들에게는 제목조차 생소한 이 탁월한 논문으로 겨우 24 살의 나이에 그는 미 남플로리다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지금도 20대 교수는 놀라운 일이지만 당시에도 큰 화제 거리였다.
“플로리다에 학생보다 나이가 어린 ‘꼬마 교수’(Boy Professor)가 나타났다!”
플로리다 신문들은 일제히 이 젊은 과학자를 흥미있게 보도했다. 그는 그 후 미 동부 지역 명문 프린스턴대 핵융합 연구소(1964-66), 미 최고의 공과 대학인 MIT 핵공학과 교수(1966-67), 뉴욕 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와 핵융합연구소 책임(1967-71)을 맡게 된다. 이 때 겨우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시절 그에게 배운 학생 중에 뉴욕공대 플라즈마 연구소장도 있고 대만대학교 부총장도 나왔다.
미시간대, 남플로리다대, 프린스턴대, 뉴욕 공대 등을 거치면서 그는 연구실의 불을 밝히면서 피눈물나는 치열한 연구에 젊을을 불사른다. 특별히 뉴욕 공대 교수 시절을 통해 국제 원자력 기구와의 인연, 미국 원자력계 중진 인사들과의 개인적 교제, 러시아, 영국의 전문가들과의 연구 협력 등을 이루어낸다. 비록 그가 지금은 교육 행정가의 길을 가고 있기는 하나 북 핵문제로 온 세계가 시끄러운 이 때 다시금 여전히 주목 받는 이유이다.
뉴욕 공대를 뒤로 하고 귀국하여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원장 및 교수(1971-75), 한전 사장(1982-85), 한국과학재단 이사장(1989-90), 국제 원자력기구(IAEA) 의장(1989-90), 고등기술연구원 원장(1992-94),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1994- ), 대한민국 원자력 담당 대사(1992-93, 96-97), 국제 원자력 한림원 회장(1994-1998), 두 번의 과학기술처 장관(12, 15대), 아주대 석좌교수(1987- ), 두 번의 대학 총장(전 호서대, 명지대) 등을 역임하게 된다.
남들이 상상하기 힘든 화려한 경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순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
그러나 정작 정근모 박사 자신은 이 화려한 모든 것들이 자기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정근모 박사도 그리 순탄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6. 25 동란을 전후하여 정근모 박사는 초등학교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를 여의고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누님의 결혼과 형님의 군 입대로 그는 두 동생을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검정 고시로 2년을 월반하여 대학을 들어갔으니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생 나이에 소년 가장이 된 것이다. 돈 버는 일, 동생 돌보는 일, 공부하는 일을 모두 감당해야 했던 참으로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실히 공부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 설립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 한다. 이공계 출신으로서 유일한 응시생이었는데 18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결과는 또 '수석 합격'이었다. 이공계 출신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시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당히 수석 합격을 한 것이다.
“부모도 안 계신 저 대단한 학생이 물리학도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알아보게!”
당시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경무대의 고(故) 이승만 대통령은 공보 비서를 통해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제의해 왔다. 경무대의 종용 덕분(?)으로 그는 1960년 조국을 떠나 미지의 대륙 아메리카로 간다.
공보 비서관의 유학 주선으로 찾아간 미국의 미시간 주립대학에서도 그의 탁월한 능력은 빛이 났다. 미시간 대학의 대학원 과정은 특별했다. 석·박사 과정이 연결된 것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 받으면 석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교수들의 인정과 자격 시험에서 'A 학점'을 받아 석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박사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모든 학위 과정을 3년 이내에 마치고 미국에서의 교수 생활을 거쳐 국가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많은 과학자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60년대 20 대 중반이 되기도 전에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대학교수가 된 이 탁월한 한인 과학자의 소식은 국외 뿐 아니라 국내에도 큰 관심 거리였던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과 정근모 박사
“정근모 박사,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는 당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한국 과학의 인재들을 길러내기 위해 새로 설립 된 한국과학원(현 KAIST) 부원장으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그 때가 1971년 2월 16일이었다. 이 날은 과학 한국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출범한 날이다. 이 과학원 설립의 과정에는 정 박사의 많은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있었다. 왜냐 하면 한국과학원은 정 박사에게 미국 유학의 기회를 주고 여러 도움을 주었던 미시간 주립대 총장 한나 박사가 미국 국제협력처장(AID)으로 재임할 때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부원장으로 부름 받을 당시의 나이는 겨우 32살에 불과하였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는 많은 이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과학원이 오늘날 카이스트(KAIST)라는 이름으로 동양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 연구 센터가 된 것이나 한국이 세계 5위 권의 원자력 기술국이 된 데에는 누구보다도 정 박사의 노고와 땀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6년 옛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누출되고 방화 작업을 하던 33명이 즉사하는 큰 참사가 일어났던 적이 있다.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은 구 소련의 서부를 고통 속에 가두어두고 있을 정도이다. 당시 국제 원자력 기구(IAEA)는 전 세계에서 최고의 전문가 12명을 선발하여 사고를 분석하고 원자력 안전을 위한 기술적 분석과 조사를 맡기게 된다. 이 때 정 박사도 당연히 한사람의 전문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1989년부터 2년간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의장을 맡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정근모 박사는 1998년 세계원자력 한림원이 주는 명예로운 세계 최초의 공로상도 수상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정근모 박사가 얼마나 대단하고 명예로운 과학자인가를 보여준다.
정근모 박사의 신앙
하지만 그는 이런 모든 과학적 업적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하는 교회의 장로이다. 정근모 박사는 교회의 장로로서 미국 뉴욕 시 교외의 롱아일랜드 중앙감리 교회와 워싱턴 중앙 장로 교회에서의 신앙 생활 그리고 종로성결교회, 삼성 제일교회의 장로 직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한국과학기술원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전하는 한국창조과학회(KACR)와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로 출발한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가 잉태한 것도 늘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지만 늘 신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큰 아픔이 있었다. 바로 병약한 아들이었다. 신앙 간증을 통해 그는 둘째 아들의 아픔과 고통 속에 자신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늘 잔잔하지만 감격적으로 그 일을 간증하곤 한다. 만성적으로 약한 신장이 문제였다. 이런 그의 믿음은 1990년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신앙 간증으로 고백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장 71절)”
여러분은 혹시 십자가가 선물임을 기억하는가? 정근모 박사의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은 감사의 선물’이었다. 정 박사는 자신의 신장을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이식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그 보혈의 피를 우리들에게 죄사함과 구원의 사랑의 징표로 주신 것처럼 건강한 자신의 신장(콩팥) 하나를 아들의 몫으로 준 것이다. 1980년 여름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병약하여 정규 교육조차 받기 힘들었던 아들은 아버지처럼 검정고시와 대학을 거쳐 유수한 외국의 IT 회사에 입사한다. 그리고 결혼도 한다.
하지만 병약했던 아드님은 결국 믿음과 소망 가운데 살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히스기야 왕이 15년 삶을 더 연장 받았듯이 정 박사의 아들은 15년의 특별한 삶을 더 살다 갔다. 그리고 아버지 정근모 박사처럼 일찍 결혼했던 아들은 사랑하는 아들 딸 두 자녀를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이 슬프긴 하나 정 박사는 절망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라고 그는 늘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내 삶의 전부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시지요. 호흡이 계속되는 그날까지 나는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살아계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증거 할 것입니다.” 정 근모 박사는 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고백한다. “한국처럼 조그만 나라의 사람이 국제 원자력 기구 의장을 하다니! 닥터 정, 한국에 당신 같은 위대한 크리스천 과학자가 있음을 나는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바로 지미 카터의 고백이다. 그는 1970년 대 미합중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해비타트)에 땀을 흘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지미 카터는 한국 해비타트 이사장인 정근모 박사를 늘 이렇게 칭송하였다.
정근모 박사의 독특한 공부법
한국 최고의 천재였던 정근모 박사는 그럼 어떻게 이렇게 탁월한 성취의 길을 갔던 것일까? 그가 밝히는 신앙 안에서 성공하는 ‘7가지 비법’을 살펴보자.
첫째,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한 미소가 힘이다. 어머니의 밝은 표정은 내 어린시절 최고의 위로와 기쁨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를 병환으로 잃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병상에서도 아들을 대할 때면 늘 병상에서 일어나 기도한 후 꼭 어린 아들의 연필을 멋지게 깎아주었다. 어린 정 박사에게는 이런 소중한 사랑의 기억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큰 위로가 되었다.
둘째, ‘노트정리를 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엔 정신을 집중해 교사의 강의를 듣고 이해하는데 힘쓴다!’ 대부분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칠판 판서를 통해 노트 필기에 집중한다. 하지만 어린 정 박사는 요즘의 보통 어린이들과는 좀 달랐다. 집중이 주는 능력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날 학생들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집중했던 것이다.
셋째, ‘사회 생활과 정서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 정 박사는 단순한 공부 벌레가 아니었다. 백일장에도 열심으로 참석하고 문학에 관심을 갖고 희곡을 쓰기도 했으며 적십자 활동 등을 통해 인간 관계와 삶의 정서를 풍부히 하였다. 이것은 훗날 그가 단순한 천재로 그치지 않고 사회 생활에서도 겸손한 인격인이며 훌륭한 성공인이 된 밑거름이 되었다.
넷째, ‘나이에 맞는 교육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월반 진학이 마냥 즐겁고 좋은 것은 아니었지요.’ 정근모 박사가 고등학교 2년을 월반하여 진학한 서울대 1학년 재학 시절, 영어 시간에 칠판 앞으로 호출된 한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이 구술하는 영어를 칠판에 옮겨 적는 시간이었다. 지명된 학생은 맥아더 장군이 말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강연을 듣고 영어로 받아 적어야 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전혀 받아 적지를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담당 교수가 발칵 소리를 질렀다. “학생, 자넨 참 형편없는 고등학교를 나왔구나. 우리 학교 물리학과는 전국 최고 수재들이 들어오는 곳이야. 고등학교를 4개월만 다니고 들어온 수재도 있는데, 자네 같은 학생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 물리학과에 들어 왔어!”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꾸중들은 학생이 바로 정근모였던 것이다. 정 박사는 고등학교 과정을 겨우 4개월 만에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 것이 오히려 자신을 영어와 수학 등에서 이해력이 부족하게 만들어 한동안 자신의 치명적 약점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천재도 핵심 과목들에 대해 고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폭넓은 독서와 문학 서클 활동은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 자신이 입학시험이나 학력경진대회에서 단연 1등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머리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것은 단순한 머리가 아닌 자신의 끈질긴 노력과 ‘논술 능력’, 즉 독서로 인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여섯째, ‘예상문제를 정리하고 푸는 습관을 기른다!’ 정 박사는 미 유학 시절 미시간 주립대학 학위 과정 자격 시험을 위해 관련 서적 20권을 찾았다. 그리고 그 책을 정독한 후 예상 문제를 50 문제로 만들어 철저히 준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정 박사님은 전 세계 유학생 40 명중 최고 점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이라는 게 가장 영광스럽다’는 생각을 갖게 하라!‘
정근모 박사는 공부도 바른 크리스천이 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고의 지식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임을 토로한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과학자 그는 지금도 늘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며 절규했던 인류의 대속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나의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나는 과학자이기에 앞서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하나님께 늘 더욱 고맙고 감사합니다.”
필자는 이런 자랑스런 과학자가 우리 나라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kict 글: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