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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과학

창조신앙, 과학기술시대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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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신앙, 과학기술시대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

조 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 D.)

창조, 모든 것의 출발

성경의 말씀은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딤후 3:6).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감동으로 받은 계시의 책이다. 이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한다(계 10:6). 창세기 전반부(1-3장)는 창조주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는 창조에 대한 자기 선포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성경의 첫 말을 ‘태초’(bereshith)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요 시간의 창조자임을 나타낸다. 시간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므로 하나님 이외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함부로 단정적 어조로 미래와 종말을 예언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사 47: 12-14).

시간은 창조된 것이므로 세상은 우리 사람의 육체처럼 유한하며 끝을 가진다(계20:11). 세상의 종교 사상들이 우주와 세계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는 순환적 시간관(circular view of time)을 가진데 비해, 기독교가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을 가지는 이유다. 이 특징을 가장 먼저 찾아낸 사람은 교부 어거스틴(St. Aurelius Augustinus, 354-430)이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이 두 가지 시간관을 구분한다. 시간을 보는 관점이 시간의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전혀 다름을 알아야 한다(벧후 3:8). 공간과 물질은 이렇게 시간 속에서 비로소 삼위일체적 완성된 세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세상은 시작되었다.

창조 신앙의 과학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가 유래하였다. 19세기 말 이 말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성경이든 과학적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컨텍스트 아래에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창조 신앙으로 본 과학, 창조의 질서를 다루는 하등학문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권의 책(말씀의 책인 성경과 하나님의 경륜의 책인 자연)이 늘 불필요한 긴장을 유지하여 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 하셨다면 과학의 영역에서도 당연히 성경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다. 하나님은 오류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긴 하나 창조주 하나님 스스로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비록 성경이 과학의 언어로 쓰여지지는 않았으나 과학의 이름으로 탐색하는 일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즉 과학은 창조의 질서를 탐구하는 하등학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과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적 해석이 필요한가와 더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성경은 창조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성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시간(태초)이 창조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우주의 연대 문제는 과학적으로도 관심 영역이므로 과학적 논증의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과학이 아무리 성경과 다른 언어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책인 자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과학책은 아니다. 따라서 과학의 언어로 모든 성경을 환원하고 탐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자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반과 토끼는 일반적으로 되새김 동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사반을 되새김질 동물이라 밝히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사반과 토끼를 반추동물이라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금 새 모순을 발견한다. 이 해석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성경이 말하는 되새김의 범위를 훗날 생물학자들이 만든 분류학(taxonomy)의 틀에 갖다 넣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를 훗날 성립된 생물분류학의 틀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멸종된 생명이나 검증 불가능한 동물에 대해서도 창조론과 무신론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성경에 나타난 리워야단이나 탄닌(Tannin), 라합, 비히못 등을 공룡이나 어룡 등 과거에 멸종해버린 자연적 동물로 보느냐(the naturalistic perspective) 아니면 신화적 동물로 보느냐(he mythological perspective) 상징적인 존재로 보느냐(the emblematic perspective)에 따라 해석 전반에 대한 다양한 단면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역사적 동물이냐 상상 동물이냐 아니면 역사적 동물이기는 하나 멸종된 이후 그 이미지가 변색되어 온 것인가 그런 부분들이 해석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관점이 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가 하는 사실이 중요할 수 있다. 즉 과학적 해석 자체가 성경의 권위 내지는 무오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같은 해석의 다양성을 통해 먼저 계시로서의 성경과 세속적 신화 사이에 어떤 충돌과 연속성이 있었는지를 배우고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과학과 관련된 이러한 성경 해석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 논쟁, UFO와 외계생명체 논쟁, 생명공학 논쟁, 의약 분쟁, 생명의료윤리, 코로나19 전반에 대한 기독교적 판단 등 여러 이슈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들 주제들을 판단해야 하는 당위성을 깨닫게 된다. 즉 여러 부분에서 과학을 도구로 한 성경적, 신학적 해석의 중요성이 금 새 드러나게 된다.

과학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영역은 이밖에도 다양하다. 그 중 하나는 생태적 환경과 관련한 과거의 역사를 탐색하는 부분과 특별히 초과학의 영역이랄 수 있는 태초의 창조를 수용하는 데 있어 과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진화론에서는 제임스 허튼 이래로 동일과정적인 지질학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성경은 대격변론적인 홍수의 역사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하고 구분해야 하는 가하는 점 등이 바로 성경의 일반 계시 영역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볼 수 있다.

첨단 과학 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 과거 해석자들보다 훨씬 풍부한 이해의 범위와 경험을 가지고 텍스트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신학자 슐라이엘 마허가 말한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최소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는 선이해(preunderstanding)가 넓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즉 계시의 점진성 아래에서 과학적 자료들은 성경 해석에 일부분 공헌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과학적 방법과 성경

과학의 일반적인 방법은 먼저 관찰의 대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관측하여 자료를 분석하고 필요하면 실험한다. 시간과 상황과 조건을 달리하여 어떤 조건 아래에서도 실험의 결과가 동일하게 나타나면 비로소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여기서 일반적 과학적 방법이란 성경적 해석에 많은 제한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창조의 사실에 대해 관측하고 실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의 한계가 과학적 설명 즉 성경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필요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성경 해석처럼 과학적 방법 자체가 가진 논리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비록 창조를 관찰한 사람이나 창세기 대홍수 사건을 재현(再現) 하거나 직접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과학적 해석은 가능한 것이다.

과학적 해석의 유용성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은 과학적 방법의 틀 안에서 성서 해석의 한계를 가진다. 과학 자체의 한계가 있다. 기원에 대한 과학적 입증 자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성서가 말하듯 믿음의 영역으로 남는다. 창조와 진화도 입증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에 있어 과학은 분명 제한적이다. 기독교는 과학의 영역이 “영원히 자연에 순종하는 과학”이 아니라 때로는 창조주인 신이 직접 개입하여 그 질서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와 과학의 충돌

인류의 신앙적 다양성만큼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는 분리와 통합과 투쟁의 대상이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독교와 과학이 애초부터 긴장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과학의 역사는 유대-기독교적인 <성서적 자연관>과 헬라적 <합리적 자연관>이 만나며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학혁명기를 지나며 과학에서 종교는 서서히 열외 되기 시작했다. 종교에 대한 냉소주의자들은 과학의 성장을 통해 종교는 어떤 식으로든 소멸의 길을 갈 것이라 보았다. 과학은 우주의 모든 신비에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행복과 직결된다. 종교는 인간 진화의 단계에 있어 무지와 두려움과 감정적 오류(affective fallacy)의 소산이므로 종교는 불필요하게 된다.

이럴 경우 종교와 과학 간에는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긴장과 충돌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원주의 시대에 여러 종교의 하나로 전락(?)한 기독교는 하등학문인 과학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남북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869년 12월 17일 뉴욕의 쿠퍼 유니온 대학에서 당시 코넬 대학 총장이었던 37살의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당시까지 학생과 교직원의 선발과정에서 부여되었던 신앙적 검증 절차를 파기하고 코넬 대학을 과학을 위한 도피처(asylum)로 만들 것이라 선언했다.

반면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앞으로의 역사는 현세대가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간의 적대 관계는 아주 사소한 것이며 기독교는 과학의 발달을 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겼다고 보았다. 1967년 과학자로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왈드(George Wald)박사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널리 인정하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단지 또 다른 오직 하나의 대안인 창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창조를 피해가려는 이론은 진화론을 천체로 옮겨 놓기도 한다. DNA의 2중 나선 구조를 밝혀 노벨상을 공동수상한 크릭(F. Crick)은 생명체는 지구에서 직접 생겨난 것이 아니라 먼 옛날 언젠가 지구 밖 외계에서 유입(directed panspermia)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의 양립 가능에 대해 긍정적인 주장도 있다. 과학과 종교의 역사적 충돌을 상호 모순과 배타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아인시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눈먼 장님이라 했다. 아인시타인은 과거 양진영의 충돌은 자기 영역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결과 때문이라 했다.

신에 대해 관심을 버린 세속주의는 현대물리학이나 기계문명시대의 도래 이전인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 때부터 이미 있었다. 하지만 물리학적 세계상과 인과율적 세계관의 발견자요 수립자들인 케플러나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텀, 라이프니츠 등은 자신들이 발견한 인과 법칙으로 인해 창조 신앙에 대해 동요한 적이 결코 없다. 성서 해석에 있어 과학과 기독교의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다만 불필요한 충돌을 해왔을 뿐이다.

구조를 밟혀내도 여전히 통제가 쉽지 않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모습

창조 신앙과 과학 기술

과학 기술은 가치중립적인가?

로런스(William. W. Lowrance)는 현대 과학과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 (1) 사회적 가치는 과학에서만 유도될 수 없으며 (2) 지식은 선과 악에 다 쓰일 수 있으나 가치중립(value free)적이지 못하며 (3)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면 그것의 쓰임새에 주목해야 하고 (4) 기술 활동이 기술자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 의존적이며 (5) 기술 전문가들은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하고 (6) 과학이 문화적 전망을 바꾸거나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우주, 인간 사회의 관념을 바꾸어버리거나 서로 다른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류의 세계관적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로런스의 언급은 과학이 필연적으로 가치의 문제와 부딪히게 마련임을 간파한 것이다. 여기서 윤리적 논쟁이 반드시 싹트게 된다. 특별히 종교와의 긴장은 당연히 대두 된다. 종교든 윤리든 그 기조에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핵연구가 핵무기 개발과 대형 핵 발전 참사로 이어진 점, 독성 연구가 테러용 독침개발 기술로 이용된 점, 좋은 육질의 고기를 제공하기 위한 육류가 포함된 사료 개발이 광우병 사태로 이어진 점, 장기 이식 수술의 등장이 멀쩡한 장기를 사고파는 장기 밀매매로 이어진 점, 많은 과학기술의 성과가 범죄에 악용된 점, 과학기술이 세상에 편리함은 가져다주었으나 새로운 인간 소외, 빈부 격차, 환경생태오염과 파괴, 자동 기술로 인한 대량 실직 사태, 과거에 없던 크고 작은 여러 안전사고로 인한 다수의 사망자와 중도 장애자를 발생 시킨 점 등등 과학발전의 부산물들은 결코 가치중립적이 않음을 알 수 있고 이들 문제는 늘 종교의 관심 사항이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믿는 기독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레스닉(David Resnik)은 자신의 12 가지 과학 윤리 강령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의 사회적 결과를 판단하고 대중에게 그 결과를 알리고 이 결과가 해롭다고 판단될 때에는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세속 학자들에게도 과학의 윤리 문제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독교와 현대과학 기술의 관계, 조화와 공존인가 갈등과 긴장인가

그럼 과학 기술은 지금까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왔을까?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이 질병을 극복하고 소통의 거리를 단축 시켰으며 새로운 기회 창출을 가져왔다고 긍정적 측면을 더 크게 보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과학 기술이 인간관계의 비인간화, 귀중한 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대량 학살 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 존재에 대한 위협을 초래하였다고 비난하는 학자도 있다.

기독교학자들도 양편으로 나뉜다. 현대과학기술이 기독교적 이해와 긴장 관계에 있다고 보는 자크 엘룰(Jacques Ellul)같은 학자와 기독교와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하비 콕스(Harvey Cox)와 프리드리히 드사우어(Friedrich Dessauer)같은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그저 한숨만 쉬며 방치하거나 과학기술을 철저히 외면해야 할까? 과학기술 문명을 대단히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거부하거나 의심을 거두지 않는 재세례파 계열의 아미쉬나 메노나이트 같은 교파들이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에서도 여러 반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많은 경우 선용보다는 악용되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방치하고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안에서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의 학문과 문화는 철저히 세속화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해버렸다. 성경은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며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들을 파하고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복종 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골 3:17; 고후 11:5). 과학기술도 당연히 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즉 과학 활동도 인간 문화 활동의 한 형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과학발전에 따른 윤리적 의사결정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따뜻하고 착한 과학기술은 가능한가- 하나님의 사랑과 샬롬 안에 있는 과학기술을 향해

코비드(코로나19) 시대는 인류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엄청난 변화는 이미 다양한 영역에서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 패러다임의 변화 못지않게 인류는 삶과 생명과 과학기술과 지구 공동체에 대해 내면에서부터 무언가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 깊은 성찰을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DNA를 기반한 생명체와 다르게 겨우 단일한 RNA를 지닌 바이러스, 그것도 단지 1종류의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인류가 이렇게 속절없이 흔들릴 수 있다니. 인류가 겨우 마스크와 격리와 백신에 목을 매고 있다니. 그나마 과학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들이 있었을까?

코비드는 역설적이게도 바이러스가 인간의 음흉한 행태나 과학기술과 만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코비드를 대응하는 것도 결국은 과학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 코비드 앞에 인류 공동체는 헌신과 배려를 목격하고 사랑과 샬롬의 중요성도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19를 체험하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인 창조, 창조신학, 과학·기술, 사랑, 자유, 샬롬 등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공동체 속, 성경적인 착하고 따뜻한 과학기술도 과연 있을까? 그렇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샬롬과 사랑이 과학기술 발전 속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샬롬은 원론적으로 하나님과의 정당하고 조화로운 관계로부터 오며, 다른 사람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한 성경적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대한 바르고 정당한 조화를 통한 전면적 샬롬과 사랑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 같은 샬롬과 사랑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과학발전에 따른 바른 이해와 적용을 통해 늘 무엇이 합당한 길인지 항상 고민하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되었다. 기독교는 기독론적 사랑과 샬롬을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용해야 한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한다.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 안에서의 사랑과 샬롬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과학발전이 가져다준 인간 소외와 상실감을 어떻게 사랑과 샬롬 안에서 따뜻하게 회복시킬 것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 과학발전이라는 미래의 세속적 상황 안에서 어떻게 기독교는 초월적 사랑과 내재적 사랑을 동시에 만족하는 기독교적 사랑과 샬롬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착한 과학기술이란 그리 쉽지 않다. 과학기술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탐욕적이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복된 신앙적 양심은 과학기술의 중립성조차 초월한다. 테크놀로지가 장애인들이나 약자들을 위한 배려(점자 책 개발, 무료 개안 수술, 저개발국 지원, 장애인용 전동차 개발 등등)로 나타나는 것 등은 초월적 사랑을 휴먼 테크놀로지로 승화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삶을 살며 과학발전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샬롬을 충만케 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창조 신앙의 윤리

-과학기술발전에 따른 바람직한 기독교의 윤리적 의사결정을 위해-

일반적으로 윤리적 의사결정에는 (1) 의사결정의 기준이 공개되더라도 떳떳할 것(공개성의 원칙), (2) 사람과 상황에 대한 처리가 공정하고 임의적이지 않을 것(공정성의 원칙), (3) 같은 상황에서 누가 결정을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결정일 것(불가피성의 원칙), (4) 의사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일 것(보편성의 원칙)이라는 일반적 4대 원칙이 있다.

이 같은 일반적 의사결정 원칙을 기독교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인류가 에덴동산을 상실한 이후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모두 동일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면 과학에 대한 하나님의 법은 무엇을 따라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 다음의 4가지 개념이 기독교윤리학의 기초로 제공될 수 있다. (1) 먼저 세상 윤리가 도덕의 가치도 인간이 만들어왔다고 보는데 반해 기독교는 모든 물질의 창조는 선하다는데서 출발한다(창 1장). (2) 세속윤리학이 윤리적 가치의 발달을 주장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이다(시 19:1-6). (3) 기독교는 타락과 범죄로 파괴되어버린 하나님의 질서 회복에 관심을 둔다. (4) 창조론적 윤리는 그 회복된 양심의 기준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찾는다(요 1:14).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과학과 기술을 지구에서 인간과 환경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성서 전통이 모든 창조물들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에 관심을 갖는 윤리에 크게 공헌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창조 신앙으로 본 선교

선교에 있어 과학을 통한 복음전파의 중요성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세계 20억 인구를 포용하던 사회주의권 선교에 있어 창조론 전파의 중요성이다. 마르크시즘은 인간이 완전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무신론적 유물론적 진화론적 낙관론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사회 진화의 최고 형태를 공산주의이고, 이 공산주의로 가는데 방해가 되는 진화의 장애물은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라는 근거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론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자유 민주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의 이념이 매우 종교적임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사회주의권 선교가 매우 어려웠던 점은 바로 이와 같이 그 이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공산권 지도자들의 종교에 대한 억압, 그에 따르는 일반 대중들의 잘못된 세뇌가 종교적 편견을 불러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권 선교에 있어 우연주의 진화론의 모순에 대한 올바른 지적과 창조론의 전파는 매우 긴요하고도 시급하다. 북경의 한 캠퍼스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가 중국 대학생 선교의 어려움에 관해 모 선교지에서 언급한 기사 가운데 “무신론적. 진화론적 유물사관에 세뇌되어 있는 그들에게 과학적으로 신앙을 변증해줄 수 있는 중국어로 된 서적이 거의 없어 매우 안타깝다”는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일 이들에게 우연주의 진화론과 유물론의 모순을 지적하고 창조론을 변증할 수 있는 과학적 자료들을 제시한 다음, 창조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1:3)의 사랑을 전한다면, 그들의 잘못된 편견을 쉽게 깨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급격히 와해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빈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다. 그리고 먼저 창조 신앙을 심어주는 일은 불신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작업이요 복음으로 가는 기초를 닦는 귀중한 도구인 것이다.

사회주의권 못지않게 방대한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스람 선교가 그리 용이하지 않다는 것은 선교사들을 늘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창조론을 통한 접근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열정적 선교사 사도 바울은 매우 담대하고 변론도 잘하며 상당히 지혜로운 성령의 사람이었다. 그의 전도 방법은 우리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제공한다. 노련한 선교사 바울이 상대에 따라 자신의 전도 방법을 달리했다는 것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은 유대인에게 전도하면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 했다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다. 성경은, 바울의 전도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은 반면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바울이 이방인 공동체를 만났을 때는 유대인들을 전도한 방식과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오늘날 그리스 아테네에 해당하는 아덴은 당시 온갖 우상이 난무하였으며(행 17 : 16), 반면에 문화와 학문도 융성한 이방(헬라)의 땅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유명한 에피큐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들 철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에 대하여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핵심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행 17 ; 18-21). 이때 바울은 그들에게 명쾌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바로 아테네 사람들이 찾고 있는 신은 무슨 형상이나 교훈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먼저 전하였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인류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자녀 삼기 원하는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전한다. 유대인들과 달리 이방인들은 창조와 십자가 복음이 함께 선포될 때 참된 회심의 길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 그때 바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방인들이 복음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바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으로 갈라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바울의 이야기를 곧바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였는데, 성경은 그 사람들 중에서 법관과 여자와 보통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바울의 그러한 시도가 남녀노소, 지식과 빈부의 격차와 아무런 관계없이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방인인 아덴 사람들에게 무작정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우주의 창조주가 계시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외친 바울의 전도 방법은 성령께서 주신 바울의 복음 전파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잘 전해 주는 책이다. 이방인들을 위하여 로마서를 쓴 바울은, 여기서도 이방인들에게 그가 어떤 순서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만드신 우주 만물에 분명히 알게 하셨다고 증거한다(롬 1 : 20).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않고 감사치도 아니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근본이다. 죄의 근본을 명확히 밝히고 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도 분명하기에 그들에게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한 선포가 필요없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마음속에는 잡다한 우상들이 많았다. 이방인들에게는 먼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복음을 증거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우리 민족도 한때는 복음의 이방인이었다. 그런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에는 아직도 복음의 이방인들이 널려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의 복음을 들고 또 다른 그들에게 가라 하신다. 이것이 창조주 삼위일체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요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