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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한니발보다 위대한 고선지, 기독교·불교·이슬람을 모두 경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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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한니발보다 위대한 고선지 장군, 기독교·불교·이슬람을 모두 경험하다

 

 

소그드족과 마주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고선지 장군

고멜족과 마주한 스키타이족 그리고 소그드족

고멜족은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에 살던 스키티안(Scythians, 일명 스키타이족)에 의해 러시아 남부에서 추방당했다고 알려진다. 과거 천산 산맥을 넘어 동서양의 실크로드(비단길)를 개척한 민족은 소그드(Sugd)인이었다.

아무나 비단길 상인이 될 수 없었다. 천산산맥 양편의 언어와 지리와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문명에 익숙해야 한다. 그리고 용감하고 개척 정신을 가진 상인들이어야 했다. 그들이 바로 비단길의 주인공 소그드(일명 수구디아)인이었다. 안록산의 난으로 유명한 안록산의 아버지가 바로 소그드인이었다.

수그디아나 또는 수구디아네(Σογδιανῆ)는 현재 이란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기도 하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주(屬州)를 말하기도 한다. 수구디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의 아랄 해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아와 사르다리아 강 사이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후잔트와 케시 등과 타지키스탄의 소그드 주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소그드인과 스키타이족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언어적 유사성으로나 실크로드의 길목을 넘나든 족속이라는 점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결국은 같은 족속임이 분명하다.

수구디아는 역사적으로 비록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우즈벡 지역을 관통하는 아무다리아 강과 시르다리아 강 사이(고대 폴리티메투스)의 비옥한 계곡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고선지 장군은 누구인가

그런데 바로 이들과 접한 인물이 바로 고구려 출신 장수 고선지였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唐) 나라 장군이었다. 고구려(高句麗) 왕성(王姓)인 고(高)씨 성을 가졌기에 668년 당(唐)에 멸망한 고구려 왕족(王族)의 후손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당나라로 이주한 것은 언제였을까? 지배선 교수(연세대)는 세 가지 가능성을 추정한다.

먼저 고구려 패망 전 고구려 출생의 고선지가 고구려 패망과 함께 당으로 강제 이주했다는 추정이고 다음은 고구려 패망 뒤 당으로 갔을 거라는 추정이다. 마지막으로 《구당서(舊唐書)》 <고선지전>이 전하는 바를 참고하면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舎鶏)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중원(中原)으로 이주되어 하서군(河西軍)에 종군했으며, 이후 서역(西域)의 4진(四鎭)·제위(諸衛) 장군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선지도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서 아버지의 공로(음보, 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어 나이 20여 세가 되어 장군에 제수되었다. 이어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夫蒙靈察)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다.

 

741년(開元 29년) 천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가 당(唐)에 반기를 들고 북상하자, 고선지는 2천의 기병을 이끌고 토벌에 나서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안서도호부의 부도호(副都護)가 되었으며, 당의 서역(西域) 군사 요충지인 4진(구차龜兹,비사毗沙,소륵疏勒,언기焉耆)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에 올랐다.

 

고선지 장군의 중앙아시아 원정

 

그드(수구디아)인이 개척한 비단길에 <동서양 문화와 문명의 고속도로>를 놓은 사람이 바로 중앙아시아 지역 정벌에 나선 멸망한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수였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고멜 족을 몰아낸 이들 소그드 족과 고선지 군대가 조우한 것이다. 고선지는 747년 토번의 땅을 토벌하고 파미르 서부에 대한 두 차례 원정을 통해 750년 석국(石國,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시켄트 지역)을 정벌한다. 그리고 사실상 중앙아시아의 총독과 다름없는 위치에 오른다.

천산과 파미르고원을 넘나든 고선지 장군이 개척한 길들은 전쟁의 루트이기도 하였으나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중국 한지(漢紙)의 제지술이 전파된 루트였다.

비록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부대는 패배하였으나 고선지 휘하의 병사에 의해 알려진 제지 기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쳐 다마스커스까지 전파되었다. 이 제지술을 바탕으로 8세기 중엽부터 바그다드에서는 동서의 문헌들이 대량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동서 문명의 고속도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타시켄트와 아랍 연합 세력에 대한 고선지 군사의 패배는 이 지역이 이슬람 화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이슬람은 타림 분지(즉 唐의 안서 지방)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고선지와 종교

어쩌면 고선지는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교까지 적나라한 종교문화를 모두 접한 최초의 코리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밖에도 당시의 당나라는 도교와 경교 그리고 유대인들까지 머물던 세계 종교의 용광로였다.

안록산의 난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할 때 당나라 이방인의 장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가장 넓은 지역을 누비며 전장의 생사기로를 체험했고 인간 생사화복에 대한 다양한 종교를 접한 경험을 가진 동양 최고의 명장 고선지는 과연 어떤 기도를 했을까?

고선지 장군처럼 위대한 일을 성취했으면서도 오해를 받는 인물도 드물다. 처형당한 멸망국(고구려) 출신 이방 장수를 역사 속에서 누가 옹호해 줄 수 있었을까? 오히려 고선지의 탁월한 능력은 많은 이들의 시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그 배경을 읽어내야 한다. 20세기 초 중앙아시아를 탐사한 영국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은 파미르고원과 탄구령 고개(해발 4694미터)를 정복했던 고선지의 업적을 알프스를 정복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나폴레옹, 수보로우보다 위대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선지 장군의 서방 원정 시 당에 충성을 맹세한 국가는 72개국에 달하였다. 우리 역사에 이런 장군이 어디 있었는가!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