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하 박사, 제자 박해경 박사를 극찬하다(한국의 신학자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학자 중 학자”,
한철하 박사,
제자 박해경 박사를 극찬하다
(한국의 신학자들-글: 조덕영)
박해경(전 ACTS, 백석대 교수, 조직신학, 현 문형장로교회 담임목사)
Ⅰ. 박해경 박사, 하나님이 쓰신 사람
Ⅱ. 박해경 박사의 신학과 사상에 영향을 준 인물들
이 같은 박해경 박사의 신학과 사상에 영향을 준 학자들은 누구였을까? 다양한 신학 경험을 쌓은 박 박사는 정말 여러 학자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도 그의 칼빈 신학에 영향을 준 인물 중심으로 일부를 소개하려 한다.
박해경 박사는 1980년 대, 30대 초반의 나이에 일찌감치 교단 신학(예장 대신) 강사를 시작으로 학자의 면모를 보인다. 이 같은 행보는 기독신학교(현 백석대), 천안대(현 백석대) 겸임교수, ACTS 조직신학 교수, 백석대 연봉교수로 은퇴하기까지 이어진다. 실로 30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이 같은 신학의 여로에 박해경 신학에 영향을 준 몇몇 신학자들이 있었다.
칼빈주의 조직신학자, 최순직 박사
먼저 최순직 박사가 있다. 대한신학교에서 교수와 교무처장 등으로 시무하면서 실질적인 학교 운영자였던,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오직 칼빈주의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사상이라 굳게 믿은 신학자였다. 농담이나 허튼 소리를 일체 하지 않았던 최 박사에 대해 박 박사는 “자신이 알기로 한국의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경건한 학자의 한 분”으로 기억한다.
박 박사는 신학교 시절 최 박사의 강의가 너무 은혜스러워 “강의 뿐 아니라 그가 말하는 모든 내용들을 사사로운 것까지 노트에 다 받아 적었다”고 고백한다. 박해경 목사는 자신이 처음 신학 강의의 길로 들어서는 데 최 박사는 은인이라 했다. 박해경 박사는 최 박사로부터 “칼빈주의 신학의 중요성과 경건의 필요성, 신중한 태도, 강의를 할 때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점”을 배웠음을 고백하고 있다.
박 박사는 최 박사에게 신조학, 신학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까지 배우고 종말론을 신복윤 박사에게 배웠다. 그리고 박윤선 박사에게 구약성경을 한 학기 배웠다. 결국 거의 모든 조직신학을 최 박사로부터 배운 것이다. 박해경 박사의 기본 신학 노선은 이미 이때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학적 소신과 헌신, 김준삼 박사
최순직 박사와 함께 대신의 교리학 분야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김준삼 박사에게서는 옳다고 확신하는 사상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신학자로서의 소신을 배웠다. 김준삼 박사는 한철하 박사로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자 중 가장 확실한 사람이요, 가장 훌륭한 면모를 갖추었다”는 칭찬을 받은 학자였다.
또한 지금의 백석학원(전 방배동 총신)이 어려울 때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여 학교발전헌금을 할 정도로 희생정신과 신학교에 대한 사랑이 강한 신학자였다. 부드러운 성품의 박해경 박사가 때로 강한 신학적 소신을 표출하고 매사에 헌신적인 것은 이때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성결교 영성의 초석, 김응조 박사
장로교의 대한신학(현 안양대) 출신인 박해경 박사가 성결교 신학을 경험한 데에는 박 박사의 모친께서 성결교인이라는 점과 박 박사가 성결교회에서 유아세례(헌아식)을 받은 이유도 있으나 실질적 이유는 당시 성결교신학교가 학력인정학교였기 때문이었다.
박 박사는 이곳에서 부흥사요 전도자이며 영성과 기도의 사람으로 탁월한 성경 강해학자였던 김응조 박사를 만났다. 박 박사는 김응조 박사의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고,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읽기도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필자도 성결교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기에 김응조 박사의 이 고백록 같은 작은 책자를 끝까지 읽고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 김 박사는 장수한 학자로 유대인 같은 절약 정신과 헌신적 헌금 그리고 교회를 46개 이상이나 개척하고, 온 동네를 다니며 전도한 그야말로 한국판 웨슬리 같은 분이었다. 박 박사는 김 박사에게서 “신학과 목회와 선교와 삶이 모순 없이 일치되게 사는 표본”을 배웠다.
천재 학자, 신사훈 박사의 열정
박해경 박사는 여러 신학을 섭렵한 가운데 신사훈 박사를 만나면서 보다 학문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박 박사는 신사훈 박사에게서 종교철학, 조직신학, 변증학 등을 배웠다. 신사훈 박사는 자기 자랑을 잘하던 자칭 천재로 유명한 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박사는 학생 때 신사훈 박사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는다. 왜냐하면 그가 17개 언어를 해석할 수 있었던 언어 천재였기 때문이다.
박 박사는 신 박사가 일부 약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더 많았던 학자였다고 기억한다. 신사훈 박사의 늘 진지하게 기도하는 자세와 진리를 위해서라면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따라 통일교와 물러서지 않는 신앙과 신학의 싸움을 벌였던 것은 신사훈 박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박 박사는 이 같은 신사훈 박사에게서 “학문의 진지함과 꼼꼼함 그리고 논리적 질서라는 학문적 태도”를 배웠다. 박 교수가 신학을 하며 영어뿐 아니라 라틴어와 독일어 공부에 열정을 쏟은 것도 이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존경하는 신학자, 유광웅 교수
유광웅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박해경 박사에게 아주 큰 영향을 준 신학자였다. 그리고 그 만남은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박 박사는 그야말로 소신파이며,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유광웅 박사로부터 독일어도 배웠고, 학교뿐 아니라 스터디 그룹을 통해 오랫동안 매주 토요일에 독일어 원서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유 박사에게서 박 박사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박 박사는 “신학은 보수정통을 견지하나 일상생활은 자유롭고자” 하며 “너무 율법적으로 살고 율법적으로 남을 비판하고, 힘들게 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 박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원래 스타일인지는 모르나 이렇게 견고한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인 박 박사가 신학적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자인 브룬너나 세속화신학자로 알려진 본 훼퍼와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록 박 박사와 신학의 색깔은 달라도 그들의 신학을 좀 더 깊게 접근할 수 있었던 배경은 유광웅 교수와 함께 원서로 이들 신학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 계기였다.
삼척 장미공원에서(사진 왼쪽부터 장훈태(백석대), 유광웅, 박해경, 필자)
칼빈 신학의 정수, 한철하 박사
한철하 교수는 박해경 박사에게 “칼빈의 신학의 정수와 기독교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본질적인 문제를 깊이 접근하게 해주고, 신학방법론을 정립하도록 영향을 준 학자”였다. 석사와 박사를 동시에 한 박사로부터 지도받으며 박 박사는 본의 아니게 자동적으로 수제자가 되었다. 한 박사가 박 박사를 지도하고 은퇴를 하였기에 더 이상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동학위인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들은 있었으나 Ph. D. 학위를 받은 사람은 박 박사가 유일하였다.
박 박사가 한 박사로부터 배운 것은 “신학의 위대함과 중요성, 신학하는 즐거움, 신학을 할 때 반드시 원어로 해야 한다는 것, 신학은 교회를 위하고, 신앙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는 신학의 가장 본질적인 기초와 진리들이었다.
글: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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