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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조직신학

폴 틸리히의 신학(성령론, 조덕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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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의 신학(성령론, 조덕영 교수)

 

 

 

 

 

Paul Tillich(©위키피디아)

 

1. 폴 틸리히의 생애

 

1)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 8.20-1965)는 독일 구벤(Guben) 지방(브란덴브르그)에 있는 작은 공업 도시 슈타르체델에서 태어났다.

2) 부친은, 보수적 성향의 루터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개방적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3) 1904-09년 베를린, 튀빙겐, 할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칸트, 피히테,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쉴링 등을 공부했는데 특히 쉘링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

4) 피히테의 학문과 칸트의 비판 사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며 쉘링에게서 자기 학문의 길을 찾게 된다. 쉘링은 칸트와 피히테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려한 통일철학과 절대자를 통한 자연철학을 꿈꾼 사람이었다.

5) 틸리히는 1910년 브레스라우대학에서 쉘링의 긍정철학에 있어서 종교사적 구성, 그 전제와 원리(Die religionsgeschichtliche Konstruktion in Schellings Positiver Philosophie, ihre Vorausetzung und Prinzipien)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1911년 할레대학에서 쉘링의 철학적 발전에 있어서 신비주의와 죄의식 (Mystikund Schuldbewutsein in Schellings Positiver Philosophischer Entwicklung)이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 이 신학박사 학위 논문에서 틸리히는 다음 명제를 내세운다.

첫째 진리와 도덕성, 신비주의와 죄의식의 통일은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진리와 도덕성(Sittlich keit), 신비주의와 죄의식 (Schuldbewatsein)은 사고의 극(極)들에 머문다. 틸리히는 이 극들을 종합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틸리히의 문화신학적 사고가 잉태된다.

7) 틸리히는 1916년 할레대학 신학대학에서 초자연적인 것의 개념(Begrift des Ubernaturlichen)이라는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하였다.

8) 그 후 교수 생활을 하면서 베를린, 마르부르그,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미국 유니온 신학교와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 퇴직 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있었다.

 

9) 그의 사상은 철학자 M.켈러 및 F.W.J.셸링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적 요소가 짙었으며, 나름의 독특한 존재론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신학 방법론에 있어 신학과 철학을 상관의 문답 관계로 이해하여, 상황 속에 포함되는 물음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함과 동시에 그 대답을 기독교의의 여러 상징에서 찾아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저서에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1951∼1963) 《존재에 대한 용기:Courage to Be》(1952)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1955) 《문화의 신학》(Theology of Culture) 등이 있다.

 

 

2. 틸리히의 주요 신학

 

1) 상관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

 

(1) 틸리히는 「경계선에서」(auf der Grenze, 1936)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써서 자신의 생애와 사상의 폭(幅)과 종합력과 변증법적 긴장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신앙과 회의, 철학과 신학, 유럽과 미국,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와 타종교, 프로테스탄트교회와 카톨릭 교회,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등의 경계선에서 특히신학과 철학, 종교와 문화 사이를 조정하고 종합하여 교량을 건설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전력을 다하였다고 했다..

 

(2) 틸리히에 있어서 신학방법은 하나의 도구이다. 또한 신학방법의 유용성은 조직신학의 목표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방법은 인식과정 자체에서 끊임없이 고려된다.

 

(3) 특히 틸리히는 실존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대답의 상호 의존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상관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을 그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틸리히는 이것으로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가운데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을 조정하고 중재하여 양자 모두를 수용하는 신학체계를 구상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결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관여 받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방식은 "인간적"이다. 상관의 방법의 모티프는 바로 "인간적"이라는 강조점의 주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상관의 방법은 하나님의 시선 만을 강조한 <정통주의>나 인간의 시선만을 강조한 <자유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 이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4) 따라서 틸리히 신학을 바르트처럼 신정통주의 신학이라 말한다. 상관의 방법은 실존적인 질문이 출현하는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고, 기독교 메세지를 사용하는 상징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임을 보여준다.

 

 

2) 상관의 방법과 자연 과학

 

(1) 틸리히에게 있어 과학과 신학도 상관의 관계 아래에서 충돌이 아닌 융화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바르트가 자연과학이나 자연신학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던 데 비해 틸리히는 그렇지 않았다.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의 오류를 피하면서 이것을 극복하였다.

 

첫째, 구체적 인간 상황과는 무관한 <초자연주의적인 방법>supranatur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에 대한 조율이 결핍된 "말씀의 계시"는 인간과는 무관할 뿐이다.

둘째, 구체적인 인간 상황만이 고려가 되는 <자연주의적 방법>natur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이 "말씀의 계시"로 뒤바뀌어질 때 결국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게 된다.

셋째, 인간 상황과 하나님 사이에 깊은 골을 그은 <이원론적 방법>du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과 "말씀의 계시"는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자연신학적인 파토스는 결국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평행선만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틸리히 에 있어서 초자연은 숨겨진 자연이며, 자연은 나타난 초자연이다. 그는 <상관의 방법>이라는 묘(妙) 를 통하여, 실존의 분석에서 자연신학을 해명하고, 실존에 내포된 질문에 주어진 대답으로 초자연 신학을 해명한다. 이렇게 하여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해리(解離)는 상관의 방법을 통하여 극복된다.

 

(2) 이것이 틸리히의 신학이 일종의 상황 신학(situation theology)으로 불려지는 이유다. 영원한 진리와 영원한 진리가 받아들여져야 하는 시대적 상황, 즉 메시지와 상황, 텍스트와 컨텍스트인 것이다.

 

(3) 신학은 항상 이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희생시킴으로서 균형을 잃을 위험성에 도달한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근본주의나 정통주의와 메시지를 희생시켜버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성으로 틸리히의 상관 방법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보고자하는 시도였다. 마찬가지로 틸리히에게 있어 자연과학은 메시지와의 충돌이 아닌 상관의 관계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었다.

 

 

3)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1) 틸리히는 종교 또는 신앙을 “긍극적인 관심” 혹은 “궁극적인 관심에 붙잡힌 상태”로 정의 했다. 궁극적 관심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심각하게 다루는 것, 만사를 제쳐놓고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을 말한다. 틸리히는 우리들의 존재를 결정해 주는 것, 즉 우리들이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를 결정해 주는 것이 궁극적 관심이라고 했다. 궁극적 관심의 내용은 어떤 특정 대상, 심지어는 하나님이어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틸리히는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궁극적인 관심의 내용으로 간주한다.

 

(2) 그러나 궁극적 관심이 관심의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태도의 대상도 함께 의미한다. 인간에게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다.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신앙이라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의 상태인 종교적인 신앙은 상징적인 언어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신앙의 언어란 곧 상징의 언어다. 상징은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을 지적하며, 지적하는 것에 스스로 참여한다. 상징은 우리에게 닫혀져 있던 실재의 영역을 열어주는 동시에, 그것에 상응 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의 차원을 높여 준다. 상징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또는 복합 적인 무의식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태어나서 성장하다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3) 틸리히에게 있어 다른 모든 관심은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 예비적인 관심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관심은 무조건 적이기 때문에 어떤 성격, 욕망, 환경 등에 의존하지 않는다. 틸리히는 종교적인 관심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종교적 관심을 궁극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이며 무한하다.”고 했다. 이 같은 틸리히의 관점은 종교란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불과하며, 인간 정신 활동 중 한 가지 특수 기능이 아니라 정신적 삶의 모든 깊이의 차원이라는 식으로 나아간다. 이때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의 반영인 종교는 모든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 된다. 이렇게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은 틸리히 자신이 사용한 '문화의 신학'과도 당연히 만나게 되었다.

 

 

4) 궁극적 관심과 창조주 하나님

 

(1) 틸리히에게 있어 궁극적인 실재인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신학적 진술 역시 상징적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궁극적인 관심의 근본 상징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개념에 있어서 상징적인 것이 아닌 유일한 예외가 “하나님은 존재 자체”라는 진술뿐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등으로 부르는 것은 다 상징적인 것이 된다. 인간의 유한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표현을 세계를 초월한 무한한 존재에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인간 경험의 단편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다. 따라서 틸리히는 성경의 비문자화를 주장한다. 성경은 하나의 상징이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틸리히는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벗어나고 있다. 틸리히에게 있어 창조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들은 문자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틸리히에게 있어 성경에 나타난 자연과학적인 언급이나 창조에 대한 서술은 모두 신학이나 철학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충돌할 필요가 없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3) 틸리히의 전체 신학에서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존재 자체로 이해한 것이었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은 다른 여러 존재 가운데 하나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힘과 근거다. 존재의 힘 또는 존재의 근거는 존재 자체이다. 모든 것은 이 존재의 힘에 참여하고 의존함으로써 존재한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하고 있는 것들 혹은 존재들의 근거다.

 

(4) 여기서 더 나아가 틸리히는 인격성을 지닌 하나님에 대해 부정한다. 틸리히에게 있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 열정, 기대, 기억, 고난, 기쁨 등과 같은 인격적인 표현은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을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상징에 불과하다. 인격적인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이 하나의 인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모든 것의 근거라는 것과 그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고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생각하니 않았다. 그들은 인격이란 용어를 하나님 자체가 아닌 삼위일체의 개체에 사용했을 뿐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간주하게 된 것은 19세기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였다고 했다. 따라서 틸리히는 하나님의 인격을 상징적인 의미로 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5) 틸리히에게 있어 자연과학과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관심은 당연히 궁극적 관심의 영역 밖으로 보인다.

 

 

5)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

 

(1)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존재의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의 실존 해명이 곧 그의 죄론이며, 새로운 존재의 개념이 그의 기독론이 된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소외의 상태로 규정하는 한편,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존재의 지참자가 그리스도라 했다.

 

(2) “실존한다”(to exist)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밖에 선다”(to stand out)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것은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비존재로부터 나와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철학은 실재를 본질과 실존의 두 측면으로 나눈다. 이 실존이나 존재라는 말은 틸리히 사상에 있어 중요한데 특별히 존재라는 말은 정적이 아닌 동적인 말로서 중요하다. 틸리히에게 있어 존재의 힘은 내가 향하게 되고 내 전 존재가 파악될 수 있는 자체를 말한다. 틸리히는 이 존재 자체(Being-Itself)가 바로 나의 존재 근거요 내가 살게 되는 근거요 이 존재 자체가 바로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 했다.

 

 

 

3. 조직신학자로서의 틸리히

 

1) 틸리히의 성경관

 

(1) 성경을 상징으로 봄

(2) 따라서 성경은 비문자화(Deliteralization)해서 보아야 한다고 봄.

(3) 성경의 역사성 부정

 

 

2) 틸리히의 신관

 

(1) 성경적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음

틸리히는 분명 하나님(무한하신, 영원하신, 영이신, 사랑이신, 선하신, 인격적인, 창조자이신 하나님 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이란 ‘존재’ 또는 ‘존재의 근원’(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용어)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박태선의 감람나무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2) 즉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말하는) 성경적 복음적 신앙적 관점의 하나님이 아니며 그저 종교적 상징의 하나님이다.

 

(3) 틸리히의 하나님은 상징적 '자기 초월'이요 '탈 자기'(Ecstatic)이다(틸리히가 말하는 초월은 복음적 초월<스탠리 그랜츠가 말하는 그런 초월>이 아니다).

 

(4) 따라서 틸리히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그것은 통일교가 쓰는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개념인 것처럼 복음적 하나님이 전혀 아니다.

 

 

3) 틸리히의 삼위일체론 속 성령론

 

(1) 정통적 삼위일체 신앙고백이 전혀 없음

(2) 신앙고백이 없으므로 그는 상징적, 변증법적 애매모호한 삼위일체론을 전개함

(3) 위격(Hypostasis)에 숫자적인 동일성의 의미를 부여하면 궤변이라고 봄.

(4)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는 셋, 또한 셋은 하나라는 것은 가장 좋지 못한 교리라 주장.

(5) 기독론 중심의 신학이 가진 한계를 직시하며 성령중심적 신학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기능을 제시

(6) 성령 교리보다 성령의 현존(spiritual presence)을 기술

(7)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 안에(in) 머물고 역사한다.

(8) 영적 현존은 성례전(인간 삶의 객관적 요소)과 말씀(삶의 주관적 요소)에 의해 인간에게 현시될 수 있다.

(9) 하나님의 영은 신앙과 사랑을 통해 인간의 영과 소통한다.

(10) 성령은 인간의 영을 넘어 모든 창조 영역에서 나타나고 경험되는 실체다.

(11) 반 계시적 성령 신학(?)

(12) 성령을 인격적인 실체가 아닌 존재의 힘으로 묘사하는 성령 이해는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다른 낯선 견해

(13) 전공이 철학이고 부전공이 신학인 것 같은 학자의 삼위일체론 속 성령론은 인격적 성령론이 아닌 존재론적 성령관으로 흘러버릴 위험 내포

 

 

4) 틸리히의 기독론

 

(1)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수용(Expropriation)해서 죽었다고 봄.

(2)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미신적 신앙이라고 봄.

(3) 예수의 부활은 상징인데 그것이 그리스도가 되게 만들었다고 주장.

(4) // 그것이 교회를 형성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주장.

(5) 예수는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이다.

 

 

5) 틸리히의 죄론

 

(1) 죄는 존재의 근거로부터 혹은 참 자아로부터 소외(소원해짐, estrangement)되는 것이라 봄.

(2) 아담의 타락은 역사적 사건이 아닌 본질로부터 존재로의 비시공적 이전이라고 철학적으로 설명.

 

 

6) 틸리히의 구원관

 

(1) 중생은 새로운 존재 속의 참여,

(2) 칭의는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는 것

(3) 성화는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의 상징

(4) 틸리히의 구원론은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실존적 상황 아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중생, 칭의, 성화라는 상징들을 묵상하여 새로운 자아로 깨우쳐지는 것

(5) 바르트나 틸리히는 죄 문제나 구원의 문제를 역사성이 없는 관념의 세계로 끌고 가고 있음

 

 

 

4. 틸리히의 삶

 

(1) 이혼과 탈선의 삶

(2) 노골적 무신론자 버트란트 러셀처럼 무분별한 성적(性的) 일탈로 인해(이 웹 사이트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방문하므로 구체적 사례 제시를 제한합니다), 목사인 신학자가 오히려 오늘날 정신분석학자들이나 성 심리학자들로부터 연구 대상이 될 정도로 복음적 학자가 아니었음

(3) 복음적 목사, 신학자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산 사람

 

 

 

5. 복음의 관점에서 본 틸리히 종합 평가

 

1) 틸리히는 20 세기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였음

 

‘신학자의 신학자’라고 불릴만큼 그의 사상은 깊고 매력적이면서 정통신학 용어를 모두 재정리하여 다르게 표현함. 평신도들이 그의 신학에 접근하기 어려운 계기가 됨. 스탠리 그랜츠와 로저 올슨의 말을 빌리면 이런 신학을 학술신학(academic theology)이라 한다.

 

 

2) '심오한' 폴 틸리히와 전혀 다른 '적응의' 예수 그리스도

 

어렵고 난해하게 신학을 전개한 폴 틸리히와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와 구속의 진리를 간결하고 단순 용이(brevitas et facilitas)하게 모든 역사, 모든 민족과 인종, 모든 남녀노소, 모든 빈부귀천자를 막론하고 적응(accommodation)하심. 복음의 진리는 모두에게 알려져야 하므로.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난해한 비성경적 언어를 구사하여 기독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묘사함으로써 당연히 현대신학자 소리를 듣게된 것이고 복음주의 신앙에는 큰 해악을 끼치게 됨.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리를 종교다원주의에 맞게 교묘히 왜곡시켜 버림.

 

 

3) 결론: 틸리히는 복음주의자인가?

 

(1)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틸리히가 칼 바르트처럼 20세기 많은 학자, 사상가들에게 영향도 주고 관심도 이끌어내고 신앙과 신학의 용어들을 모두 재정리해 버릴 만큼 탁월한 신정통주의자요 사상가인 것은 맞는 거 같다.

 

(2) 하지만 훌륭한 사상가요 철학자요 철학적 현대신학자가 될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모든 복음주의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틸리히는 전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다. 필자의 견해도 같다. 리처드 니버가 말하는 '문화의 그리스도'나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은 모두 종교다원주의적 신학으로 보면 틀림없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틸리히는 성경적, 기독교적 의미의 바른 창조신앙을 가진 학자로 보여 지지 않는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