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성령론
20세기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칼 바르트처럼 판넨베르크도 한국 신학 안에서 극명하게 평가가 나누어지는 신학자입니다. "역사의 신학", "부활의 신학" 등으로 불려지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어떤 신학일까요? 그는 선배요 스승인 바르트나 불트만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역사를 강조하고 부활을 강조하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까요? 본 성령론 강좌는 초교파신학(평택대)으로서의 학교 특성에 따라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한 교단적 비판보다 목회학 과정의 신학도들에게 바른 신학 정보 제공으로 앞으로 여러분들의 바른 신앙적, 신학적 판단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1.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2014. 9.4)
1) 독일 개신교 루터파 신학자.
2) 현대 기독론 연구의 새로운 접근으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체계화.
3) 2001년 가을, 대우재단 초청(석학연속강좌)으로 <현대문화 속에서의 신학>(Theology in the Context of Modern Culture)이라는 제목으로 세미나 및 강연.
2. 생애 약사
1) 1928년, 독일 동북 슈체친(now Szczecin, 현재는 Poland)에서 세관원이던 아버지
2) 루터교회에서 유아세례
3) 1942년에 베를린, 16살 되던 1944년 니체의 책,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
4) 1945년, 영국군 전쟁포로였다가 독일로 귀국해 학업 계속.
5) 1944년, 겨울 오후 해질 무렵 숲 속에서 나중에 "빛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는 강렬한 종교 체험(회심 이전의 체험).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 사상가들 연구.
6)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백교회(the Confessing Church) 신자였던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 판넨베르크에게 기독교 연구 권유. "지적 회심"을 한 판넨베르크는 기독교가 현재 최선의 종교적 선택이라 결론.
7) 베를린(바르트 책 접촉), 괴팅겐, 바젤(바르트로부터 조직신학 사사, 야스퍼스 철학),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밀 브룬너, 폰 라드, 보른캄, 폰 캄펜하우젠, 에드문트 슈링크Edmund Schlink교수 지도로 둔스 스코투스의 예정론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 <analogie und Offenbarung>(유비와 계시)으로 교수 자격, 1959년 <구원사와 역사Heilsgeschehen und Geschichte> 논문으로 세계적 신학자로 주목)에서 공부.
8) 1956년 하이델베르크의 루터파 성베드로 교회에 목사로 파송.
9) 1958년 부페르탈Wuppertal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근무
10) 1961년 마인츠대학교에서 개신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
11) 1963 미국 시카고 대
12) 1966-1967 하버드 대.
13) 1967년부터 은퇴하는 1994년까지 뮌헨 대학교에서 개신교 신학부 조직신학교수.
14) 뮌헨대학교 재직시에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의 교류를 위해 기초신학과 교회일치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 특히 개신교회인 루터교와 천주교 사이의 신학적 교류에 공헌.
15) 1975. 덴버 강연, "나를 합리주의자 비판, 나를 근본주의자라 부름, 분명한것은 나는 경건주의자는 아닙니다."
16)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독일 개신교회 대표로 참여
3. 판넨베르크의 성경관
1) 폰 라드의 영향
2) 구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신화들은 고대 근동, 바벨론, 애굽의 신화 자료들을 히브리 전통에 맞게 각색한 것
3) 신약 성경 신비적 개념과 예수의 개인적 신화는 유대와 그리스 영향(Wilhelm Bousset와 불트만의 제자)
4) 신약 종말론적 개념은 영지주의 영향 받아 초대 교회가 각색?(Basic Questions in Theology, Vol. Ⅲ., 66-67.)
4. 기독론
1) <조직신학의 기본적 질문>에서 기독론을 다룸
2) 예수의 역사적 사건과 증거로부터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전개
3) 바르트, 브룬너와 정반대의 해석 방법
4) 예수 부활은 초대 교회 방법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5) 예수 부활은 사도 바울 개념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6)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문제와 같다.(<예수-하나님과 인간>, 웨스트민스터 Press, 1964, 67, 69, 70, 75, 88).
5. 케리그마와 역사(<Basic Questions in Theology>, Westminster Press, 1969)
1) 신앙은 역사적 권위에 종속 된다.
2) 불트만 신학은 <케리그마 신학>의 고전적 표현에 불과. 그러나 불트만 신학은 신학의 기본적 명제를 제대로 찔렀으며 성경의 알맹이인 <케리그마>(선포, 선언, 설교)를 찾는 작업
3)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 교리 비판
4) 역사와 참역사와 원역사의 관계(신정통주의) 포기, 즉 신정통주의 역사관에 도전
5) 모든 신학적 논제들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임
6. 계시와 역사(<Revelation as History>)
1)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
2) 하나님의 계시는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 역사가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다. 즉 말씀이 아니라 역사가 자리의 계시
3)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를 통해 우리의 경험과 생활 속 (역사 속)에서 증명되고 있다.
4) 예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해석의 혼동을 일으키는 발언!)
5) 이 계시는 다만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줄 때만 발생한다(바르트 적인 관점).
7. 신앙과 이성(<조직신학의 기본적 질문 제 2권>)
1) 신앙과 이성의 차이점 인정
2) 종말적 미래 속에서 신앙은 이성의 참여를 긍정한다. 물론 신앙은 이성을 반대.
3) 이성 반대파(터툴리안, 루터)
4) 그러면서도 "신앙은 합리적 작업"
8. 창조의 우발성과 자연 법칙
1) 창조의 존재는 우발(우연)적인 것
2) 세계는 전혀 없을 수도 있었다.
3) 창조에 있어 과정신학자들과 자신을 구분하나 피조물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점에서는 과정신학자들과 같다(하나님은 피조물의 성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제가 아니라 설득으로 일하신다).
4) 즉 그는 피조물의 절대적 우연성은 부정한다.
5)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자유의 우연한 산물"이다.
6) 창조는 창세기 1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계속 창조 개념 수용.
7) 즉 창조론은 창조에 국한 된 것이 아닌 보존과 신적 협력(즉 섭리)과 구속과 종말론과도 연결된다.
8) 다윈이즘에 대한 기독교의 투쟁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관계에 있어 중대한 실수.
9) 진화는 우연적 출현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의 도구로 간주해야.
10) 창조적 진화는 인정하고 결정론적 진화론은 거부
9. 판넨베르크의 성령론
1. 창조의 영
1)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라 간주될 때 바르게 이해
2) 현대의 자연과학의 발견들과 성경적인 주제들의 대화를 시도한 신학자
3) 판넨베르크의 성령의 개념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의 대화를 위한 가장 포괄적인 신학적 틀을 제공한다.
4) 판넨베르크 체계는 일종의 만유재신론이다(로저 올슨)
5) 판넨베르크에게 있어 창조 자체는 비필연적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신론이 만유재신론적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스탠리 그랜츠)
6) 판넨베르크의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현실화하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자의적 만유재신론”이라 할 수 있다(박찬호 교수, 백석대 신대원).
7) 창조론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주장은 전체 역사의 과정 즉,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확대한다는 점에서 주로 성령을 통한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적 내재와 관련이 있다.
2. 삼위일체론<Systematic Theology. T & T Clark> 속 성령
1) 조직신학의 전체는 본질적으로 신론이다.
2) 판넨베르크는 성령의 신성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3) 즉 그는 삼위일체론의 구도 속에서 성령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4) 성령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게 된다.
5) 판넨베르크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어거스틴의 성령론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구별되는 성령의 자기 구별이라는 개념과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3. 장(場, field) 개념으로서의 성령
1) 성령과 장(場)에 대한 관계는 판넨베르그 신학의 중요한 독창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성령과 장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처음 인식한 신학자로 자신이 아닌 영국의 개혁신학자 토마스 토렌스를 지목하고 있다.
3) 삼위일체를 전면 부정한 적이 없는 판넨베르크 신학에 있어 성령의 장 이론은 정통신학자들에게는 분명 조금은 낯선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신학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역사 속 신학 전통과 괴리가 생겨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4) 성령은 판넨베르크에게 있어 모든 피조물들이 생명과 운동과 활동의 은혜를 입고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원리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을 거두어가시면 사라지고 만다(시 104:29; 욥 34:14).
5) 즉 판넨베르크에게 있어 성령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에 능동적으로 임재하시는 원리이다. 원리라는 용어는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분명 인격성과 비인격적 원리 사이의 낯선 괴리를 만들어낸다.
6) 이 현대물리학적 용어는 결국 성령이 하나님의 창조적 임재의 마당(역장, 力場, force field)이라는 이해로 나아간다(시 139:7 참조).
7)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창조에 널리 퍼져 있는 능력의 최상의 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각각의 유한한 사건이나 존재는 그러한 장의 특별한 현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들의 운동은 그 힘에 반응한다.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의 영”(창 1:2)을 호흡과 바람과 같은 은유적 기운으로 해석한 일부 학자들의 입장에 편승한 해석의 변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8) 판넨베르크는 현대 물리학의 장 개념의 선구자로 스토아 철학자들의 프뉴마(pneuma)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판넨베르크는 철학의 프뉴마와 현대 장 개념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비록 미세한 것이기는 하나 "물질적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
9) 즉 철학의 프뉴마가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을 그 긴장(tonos)으로 함께 붙들어주며 다른 질과 운동의 사물들을 생겨나게 하는 반면, 현대의 장 개념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연장과 함께 역동적인 운동 즉 힘이다. 스토아의 프뉴마는 물리적 영인 반면 교부들의 프뉴마는 영적 지성으로서의 프뉴마로 보려했다. 그렇다면 판넨베르크는?
10) 판넨베르크는 장 이론이 성령의 인격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물리적 힘과의 끈질긴 차별성을 고려하려는 조심스런 입장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넨베르크는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장의 유일한 현현(특이성, singularity)이라 하여, 결국 성령의 인격성을 모호한 형태로 이끌고 있다.
11) 판넨베르크의 신론이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적 비판을 배격하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적 성령론 접근에는 여전히 낯선 방식임.
4. 종말론 속 성령
1)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경륜적 사역 속에서 사랑의 사귐 가운데 종말도 계시하신다.
2) 피조물이 아버지와 아들의 내적 사귐에 참여한다는 것이 피조물이 "하나님의 삶의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본래적 동기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본성은 그 영원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피조물의 시간 속으로-성령을 매개로 하여-뚫고 들어와 내재하며, 이를 통해 "시간 속에" 내재하신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은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자유와 사랑"에 최종 일치함으로 피조물을 다스리며 사귐으로 복귀한다. 이 하나님의 구원 과정은 피조물의 구원과 하나님의 구원 선포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미래의 자기 실현(sichzuvorkommen)의 표현이다.
5) 그의 조직신학 전체는 종말에 촛점을 맞춘 "희망의 신학"으로의 정향성을 가짐!
6) 역사는 역사의 끝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7) "영원은 미래를 통해 시간 속으로 들어온다." 시간과 영원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은 초월성을 설명하기 위한 판넨베르크의 미래적 소망의 신학을 보여준다.
5. 성령론 정리
1) 하나님의 영을 인격적 신성보다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묘사에 더 치중하는 경향
2) 그럴 경우 성령은 피조 세계 모든 운동의 원리로 작용
3) 장 이론을 전개함에 따른 성령의 인격성 상실의 문제가 늘 논란(이런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성령을 물질적 에네지의 장과 동일시 하지 않음을 판넨베르크는 늘 역설)
4) 성부와 성자를 사랑으로 중재하고 활동의 중심으로서의 성령 강조
5) 즉 성령을 인격성 상실의 원리로 만들어버렸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판넨베르크는 늘 자신의 낯선 용어들이 오해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즉 단지 주관적 신앙 경험이나 원리에 머물지 않게 하려는) 역동적인 긴장 속에 자신의 신학과 성령론을 전개한 신학자라 할 수 있다.
6) 굳이 평가한다면 굳이 왜 불필요하게 현학적 논리를 내세워 신학을 역동적 신학이라는 도구화하여 그렇게 빙빙 돌려 전개하였을까?
7) 칼빈의 단순성과 용이성의 신학을 신뢰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괜스레 불필요한 현학적, 논리적 수고를 한 것은 아닐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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