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면 정말 죽는가?
야곱, 하나님을 만나다
창세기 32:28~30에 보면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했다.
얼굴을 히브리어로 파님(panim)이라한다. 따라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이르는 "브니엘"(Penial)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말한다.
하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삼위일체 하나님과 화해자이시며 구속자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자는 없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나 야곱이나 이사야 선지자(사 6:5-7)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신약만 진리가 아니다. 신구약 성경은 모두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이다. 성경은 화해자이시며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이미 구약 오경에서부터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희미하나 모세 오경에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보인다. 계시는 하나이나 역사 속에서 점진적이라 신약 시대에 와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구약의 하나님이 곧 동일하신 신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죄 된 인간이 성부 하나님을 만난다면 당연히 인간은 죽을 것이다. 야곱이나 모세나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때 느꼈던 당혹감은 바로 이제 자신들이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이런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신비, 초월 체험을 "누미노제"한 체험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성부가 아닌 화해자이시며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우리 인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누미노제"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바로 야곱이나 모세나 이사야가 체험한 하나님이다.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라면 죽음이 아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두려운 형 에서와 담대하게 만나는 체험, 80세 모세가 소망 없던 노예 민족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 재탄생하는 체험, 입술이 부정한 이사야 선지자가 오히려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하여 지는" 놀라운 역설의 체험을 한다. 마치 "저주와 절망의 십자가가 화해와 승리의 십자가"로 바뀐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인간은 진정한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음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당연히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영이신 하나님은 얼굴이 없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 "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닌 의인화 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보여달라"(Ostende mihi gloriam tuam)는 모세에게 너는 겨우 "나의 등"(Postariora Mea)을 볼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연히 "등"도 없으신 분이다. 의인화된 표현일 뿐이다. 즉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의 신성을 포착할 능력(capax divinitatis)이 전혀 없다. 이성은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는 있으나 그분이 누구인가는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소리(vox humana)인 말과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통로로 주신 외적, 감각적 은혜의 수단인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인데 루터는 이것을 겨우 "하나님의 가면(탈)"(larva Dei)일 뿐이라고 했다. 우리 인간은 가면 속 표정을 결코 알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가면"은 당연히 알 수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예수를 통해 나타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메시야라는 것이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걸림돌이요 인간의 모든 이성과 체험에 모순된다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평가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면"이라는 이 심오한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에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지 정말 우려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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