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를 먹으면 정말 영원히 살 수 있었을까?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명과를 따 먹고 영생할까 하여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도(摩尼敎徒)들에 대한 반박, 창세기에 대한 두 권의 책”(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에서 그룹(Cherubim)은 라틴어로 “지식의 충만함”을 말하고 시간은 지속적인 다양성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두루 도는 불 칼은 현세의 형벌(刑罰)을 뜻한다고 하였다. 모든 시련은 불타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두루 도는 불 칼이라고 표현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명과를 따 먹고 영생하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큰 문제였기에, 하나님은 이렇게 강력한 메타포까지 동원하시면서까지 이들 본문 구절을 인간에게 남겨 주신 것일까?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분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인데, 과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상태, 즉 불순종한 상태에서 생명과를 먹는다고 해서 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이 구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창세기 3장의 영생 개념
먼저 창세기 3장 22절의 영생(olam, 창 21:33 참조)은 신약의 영생(zoe)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창세기의 영생은 단순한 영원, 지속, 끝없고 한없는 시간을 말한다. 신약의 영생(마 18:8, 9; 막 9:43, 45; 요 3:36, 5:40)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된 상태의 영생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 에덴 동산에는 여전히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그 실재가 무엇이었는지, 또한 실과(열매)를 먹으면 어떻게 우리 몸이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할 수 있는지, 우리는 지금 전혀 그 시스템이나 메카니즘을 알 길이 없다.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연히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명나무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가 온다. 바로 종말의 때, 성도는 그 실체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계2:7; 21:1, 5; 22:1-2).
영생이라고 다같은 영생이 아니다.
문제는 에덴 동산의 생명과를 먹고 얻는 이 영생은 신약의 영생처럼 복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복된 영생이어야지 죄악 가운데 맞이하는 고통의 영생은 저주일 뿐이다. 타락으로 인해 영적·육적 고통을 알게 되고 죄와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가 지상에서 영생하게 된다면, 그것은 복은커녕 지옥이나 다름없는 저주로 변할 것이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와 같은 독재 구역에서 영생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누구도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 수용소를 만든 장본인들도 그런 곳에서 짐승보다 못하게 영생하라면 두려움에 떨 것이다. 즉 이 영생은 믿음과 순종으로 얻게 되는 영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인류 구원의 여정의 시작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동산에서 추방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그리스도의 희생 구원의 상징)을 입히시고, 온 인류를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것처럼 어린양 예수의 피로 구원하시는 여정을 시작하신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움이나 걱정이나 냉소적 표현이 아니라, 방치하다가는 생명과를 먹고 영벌을 받게 될 수도 있는 ‘처음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깝고 애타는 슬픔을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성경의 이 표현조차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다. 영생도 영생 나름임을 우리 인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불신자에게도 영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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