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요셉은 예수를 닮았는가)/
평신도를 위한 신정론 해석(8)
1) 요셉, 절반의 그리스도(?)
시련을 당한 점에 있어 욥과 요셉은 분명 닮았으나, 많은 점에서 욥과 요셉의 경우는 정말 달랐다.
즉 신정론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욥과 요셉을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는 조금 달랐다.
요셉은 욥과 달리 예수의 모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비록 요셉이 위대한 사람이기는 하나, 그 조상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과 비교할 때 영적으로 미흡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가 어떻게 예수의 모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의 조상들처럼 언약을 받은 적도 없고, 메시야는 유다의 후손으로 오지 않았던가. 신약성경에서도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어떤 인물이기에 신정론적 어떤 모형을 그에게서 찾으려는 것인가? 모형은 결코 실체가 아니다.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나 몽학선생 같은 것이다. 요셉은 그런 존재였다. 결코 요셉을 절반(折半)의 그리스도쯤으로 보려는 유비적 사색을 하지 말아야 한다.
2) 예수의 모범을 닮은 요셉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진정 사랑하던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 요셉은, 분명 예수를 참 많이 닮은 존재였다.
요셉의 꿈과, 형들에게 당한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시련과 억울함과 오해는, 낮은 곳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예수의 삶을 연상케 하는 게 사실이다.
즉 노예로 억울하게 끌려간 애굽 땅에서 모든 환난을 딛고 형통한 사람으로서 선으로 악을 이긴 요셉은, 분명 예수의 모형(模型)을 지닌 인물이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러 애굽 땅에 들어온 형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사랑하는 막내 동생 베냐민을 보고자 했던 요셉의 마음이나, 동생 베냐민의 자루 속에 몰래 자신의 은잔을 숨겨 도둑 누명을 쓴 베냐민을 자기 곁에 두고자 했던 요셉의 ‘전략적 사랑’, 즉 세상 악의 구조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요셉의 전략적 지혜는 마치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려 달라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처절한 간청을 외면하는 듯 보였던, 예수님의 낯선 응답 방식”과 닮아 있다. 예수와 요셉 모두 결국 선으로 악을 이겼다.
노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는 신정론을 루터란 철학자였던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세계’(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위대한 방법’” 유형으로 나누었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와 죄의 악한 결과들을 모두 떠맡으셨다는 사실이,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공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신 십자가 사랑이었다.
그렇다 요셉은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모형이라기보다 예수의 모범을 닮았다고 보아야 한다.
3) 요셉을 통해 보여 주려는 두 가지
요셉은 분명 그리스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뚜렷한 모형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경의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신정론적 관점에서 그것은 분명 두 가지였다.
먼저 성경의 2930명에 달하는 실명 인물 중 그나마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요셉조차 가나안 땅이 아닌 인생의 광야(in Egypt)에서 결국 죽는다는 사실(in a coffin, 창 50장 26절)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 죽음은 모든 인간이 짊어진 마지막 징계이다. 110년을 산 요셉의 세상 시련은 사실 그리 길지 않았다(욥도 그랬다).
그리고 세속 영화는 비교적 풍성하고 복되었다. 그럼에도 요셉도 다른 인간들처럼 결국 죽었다. 믿음으로 소망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요셉은 애굽 땅에서 죽어 방부처리되었다(창 50:26).
창세기는 이렇게 그나마 예수를 가장 닮은 인물인 요셉의 죽음이라는 인류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다. 믿음 속에서 구원의 기초 작업이 끝났을 뿐이다(히 11:22). 하나님은 소망의 책 출애굽기를 통해 새로운 믿음의 인물 모세의 손을 잡고 인류 구원의 여정을 재개하신다.
두 번째로 ‘인류 대표’ 요셉이 우리들에게 전해 준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랑’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은 악과 어떤 관계인가? 사랑으로 악을 어떻게 이긴다는 것인가?
꼼수에 능한 우리 인간은 그 강력한 사랑의 원초적 힘을 다는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신정론적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한번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신앙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잡고 인생의 길을 가면서, 그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갈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요셉처럼 비록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억울함과 시기와 시련을 당하더라도, 오직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묵묵히 오르신 예수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신 십자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라!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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