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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페르시아황제 아하수에로는 누구인가(ft. 살라미스 해전, 모르드개와 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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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 왕 아하수에로와 모르드개와 에스더

 

기원전 490년 바사 왕 다리오 1세(Darius Ⅰ)는 전함 600척, 보병 10만, 기병 1만의 대병력으로 그리스 본토에 원정군을 보낸다. 그리고 아티카(Attica) 주의 동쪽 해안에 상륙시켜 마라톤 평야에 포진한다.

 

전쟁은 외형의 규모가 결정하지 않는다. 이 싸움에서 바사군은 아테네의 밀티아데스(Miltiades) 장군 휘하의 불과 1만의 병사들과 맞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참패하고 만다. 바로 그 유명한 마라톤 전쟁(war of Marathon)이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에 부조되어 있는 동물투쟁도.

◈바사 왕 아하수에로와 모르드개와 에스더

 

기원전 490년 바사 왕 다리오 1세(Darius Ⅰ)는 전함 600척, 보병 10만, 기병 1만의 대병력으로 그리스 본토에 원정군을 보낸다. 그리고 아티카(Attica) 주의 동쪽 해안에 상륙시켜 마라톤 평야에 포진한다.

 

전쟁은 외형의 규모가 결정하지 않는다. 이 싸움에서 바사군은 아테네의 밀티아데스(Miltiades) 장군 휘하의 불과 1만의 병사들과 맞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참패하고 만다. 바로 그 유명한 마라톤 전쟁(war of Marathon)이다.

 

이때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약 2일간 240km를 질주하여 아테네까지 와 승리를 알린 후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로 이를 기념하여 시작된 것이 마라톤 경기의 시발이다.

 

아버지 다리오 1세의 복수전을 준비한 바사 왕 아하수에로(통치 기간 B.C. 485년 경-465년 경)는 바로 베냐민 후손 모르드개가 딸처럼 양육한 고아 에스더를 페르시아의 왕후로 간택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에 2:17).

 

아하수에로는 아버지를 대신한 아테네와의 복수전을 앞두고 벌인 전략 회의 겸 잔치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한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고 에스더를 아내로 맞았던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신앙적 용기와 모르드개의 전략에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을 멸절하려던 하만의 음흉한 계략은 그만 자신의 올가미에 자기가 걸려들었다. 그는 자충수에 걸린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부림절을 최고의 명절 가운데 하나로 즐기고(?) 지키는 것이 이해가 간다.

 

바벨론에서 다리오에게 인정받은 다니엘이나 페르시아에서 현달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주는 큰 교훈이 있다. 신앙은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상에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다.

 

온갖 천박한 사이비들이 날뛰는 우리 정치사(史 ) 속에서도 다니엘과 모르드개와 같이 성경적 정의를 지키려는 빛나는 참된 기독 정치인들은 늘 있었다. 그것이 위로가 된다.

▲2017년 ‘신라와 페르시아, 그 공동의 기억’ 전시회를 연 이란 테헤란 국립박물관. 사진 왼쪽 끝이 박진호 박사.

여기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는 파죽지세로 아테네의 코앞까지 진출하여, 폭이 좁은 아테네 인근 살라미스만(灣)에서 11시간 계속된 역사상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년 경)에서 참패한 그 왕이다. 바로 13척의 배로 그 10배 이상의 전함을 가진 왜군을 상대한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울돌목 해전’의 원조였다!

 

전쟁은 외적 능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님을 이렇게 역사가 증거한다. 전력·화력·기동력에서 세계 5-6위권을 자랑하던 베트남은 탄약도 부족하고 군화도 없어 타이어를 깎아 만든 군화를 신고 진군한 월맹에게 속절없이 무너져 패망하였다.

 

거짓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을 맺고 노벨상(물론 양심상 거부)까지 받은 공산 월맹의 노련한 레둑토의 전략에 그 똑똑한 미국 키신저가 말려든 결과였다.

 

수나라 우중문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조롱까지 당하며 살수에서 대참패를 당하였다.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는 도시 국가 ‘아테네의 이순신’,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에 말려 그렇게 당했다.

 

스스로 전방을 물러서고 입만 살아서 당나라 군대화 되어가는 우리 정부의 군사정책을 보면, 우려를 넘어 참담할 뿐이다. 또 다시 이순신 장군을 기대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모든 전쟁은 참혹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든 다니엘과 그 친구들 그리고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남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영육 간에 진정한 승리자들이었다. 마치 약육강식의 정글과 유사한 세속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일꾼들은 이렇게 묵묵히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기독교는 혐오 종교라며 마치 점령군인 양 교회와 성도들을 함부로 대하는 오늘날 천박한 우리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