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 인류 최고의 위대한 과학자는 누구일까?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하나님이 사랑한 사랑의 과학자-땅콩 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
만일 하나님께서 과학자들의 성적을 매기신다면 역사상 인류 최고의 과학자는 누구일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성적을 매기신다면….
아마 여기 소개하는 바로 이 인물! 워싱턴 카버는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과학자일 것이 분명하다. 흑인은 저주 받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흑인들이 저주 받은 함(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세 자녀 중 한사람)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흑인은 정말 하나님께 저주 받고 태어났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한번도 흑인을 저주하신 적이 없다! 단지 함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인 가나안을 하나님이 아니라 노아가 저주했을 뿐이다. 이제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까지 배출하지 않았던가!
함의 후손 흑인들은 저주 받았는가?
노아의 가나안 저주 사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 하루는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가나안의 아버지인 함이 자기 아버지 노아 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 사실을 두 형제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쳐서 들어가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덮어 주고 계속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나체를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깬 후에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자기 형제에게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 했다(창 9:20-27). 이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하나님이 친히 저주 한 것이 아니었다. 노아가 함의 아들 가운데 오직 가나안을 저주하였다. 하나님이 아닌 노아의 자기 손자 저주가 과연 어떤 유효성이 있을까? 조부가 손자를 저주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은 한 것일까? 함이 행한 그 일이 도대체 함의 아들이요 노아의 손자인 가나안 저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함의 행동이 그렇게 자기 아들 넷 가운데 가나안이 할아버지 노아에게 저주 받을 만한 행동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들 함부터 저주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노아와 함께 그 가족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창세기 9장 1절) 하나님의 축복을 어떤 사람도 저주로 바꿀 수 없었으므로 노아는 함부로 자기 아들 함은 저주하지 못했단 말인가(Walter C. Kaiser, Jr., , IVP, 1992, 51-52)?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이나 예수 믿는 모든 이들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처형한 조선 후기나 신앙인을 잔혹하게 대하는 북한 유물주의 무신론 철권정권의 행동보다도 가나안이 더 잔인한 어떤 저주 받은 행동을 했단 말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이 손자를 저주할만한 일이었을까? 부자가 함께 목욕탕 가는 일이 흔한 우리 사회가 볼 때 과연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사건에는 필경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경은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즉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저주 개념을 함부로 운명에 다가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함을 저주한 적이 없다. 노아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 손자 가나안을 저주 했을 뿐이다. 그것이 과연 무슨 효력이 있었을까? 그것이 노예 제도나 함의 후손인 흑인의 노예 운명을 합리화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반만년 민족사에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겨우 복음이 들어온 우리 민족만큼 영적 저주를 받은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천한 종이나 저주라는 말은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은 종이 6년을 봉사하면 자유케 하였다. 평생 종이 되는 경우는 주인을 사랑해서 자원할 때뿐이었다(출 21:2-7). 사도 바울도 종의 제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할 수 있으면 자유하라고 권면하였다(고전 7:21). 주인을 탈출한 오네시모를 감싸면서 전 주인인 빌레몬에게 정중하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종 이상의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 대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아름다운 절창 빌레몬서를 보라! 어떤 종이든 노예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저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노아의 술 취함은 분명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아들 함의 행위도 칭찬 받을 행위는 아니었다. 이것은 의인 노아조차 흠이 당연히 있음을 알려주고 우리 인간의 보편적 타락상을 보여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특정 민족의 운명적 저주가 마치 진실인 양 언급하는 일은 금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 가나안의 후손 시돈이 같은 함족인 붓 족속과 함께 카르타고를 건설하여 탁월한 초기 기독교 인물들을 배출 한 것이나 갈릴리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시돈 사람들이 훨씬 복음에 더 반응한다는 예수님의 충고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울림이 큰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가나안의 후손들은 역사상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타락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전혀 차별 없이 동일하게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분명 한번도 흑인을 저주한 적도 없고 한번도 흑인을 차별한 적도 없다. 하나님이 아닌 사악한 인간들이 그렇게 할 뿐이다. 하나님은 한번도 남녀를 차별하신 적이 없다. 허물 많은 인간이 차별할 뿐이다. 하나님은 한번도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신 적이 없다. 허물 많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과 솔로몬이 악한 세상의 처세를 따라 일부다처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의 이 같은 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할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에 대해 절대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하나님이 얼마나 흑인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지 조지 워싱턴 카버를 통해 살펴보자.
“카버는 평생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한 겸손한 과학자입니다. 그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1939년 미국의 제 26대 대통령 루스벨트가 조지 워싱턴 카버에게 루스벨트 메달을 수여하면서 한 유명한 말이다. 오늘날 농산물 응용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카버(1864-1943)는 미국의 남북 전쟁(1861-1865)이 발발하던 무렵 흑인 노예의 몸에서 태어났다.
비극을 승화하는 하나님 섭리, 카버의 어린 시절
▲조지 워싱턴 카버 |
미국의 남북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비록 노예 해방을 맞았다고는 하나 흑인들의 삶이 금방 나아지지는 않았다. 노예의 신분에서 풀리기는 하였지만 흑인들에게는 아직 아무런 생활의 기반이 없었다. 전보다도 더욱 어려운 환경 아래에서 백인들과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해야 했다. 카버의 생애는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카버의 어머니 메리는 사고로 일찍 남편을 잃었다. 그녀는 미주리주(州) 개척지대에서 카버라고 하는 온화한 성품의 백인 부부 밑에서 잡 일군으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당시 전쟁의 후유증은 쉽게 아물지를 않았다. 미국의 민심은 여전히 갈라져있었다.
‘흑인들이 자유롭게 사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어.’
일부 백인들은 흑인들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장 폭도들이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흑인과 그들의 소유를 약탈해서는 노예제도의 잔재가 남아있던 남부로 가 팔아 치웠다.
성탄절을 앞둔 어느날 밤이었다. 메리와 조지도 결국은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들 흑인 모자를 애타게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과 살던 백인부부는 참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부부는 불쌍한 이들 모자를 끈질기게 수소문했다. 결국 흑인 모자를 빼앗아 간 폭도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미 조지의 어머니는 어디론가 팔려 가버린 뒤였다.
때가 절은 조그만 보자기에 싸인 어린 조지만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누군가 그를 거두어 데려왔다. 납치범들이 버린 이 어린 아기의 몸값은 말 한 필이었다. 이 아이가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카버 내외와 함께 생활 하게 된 조지는 어려서부터 카버 부인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자라게 된다. 실을 뽑고 비누를 직접 만들었다. 들판에서 약 뿌리를 캐고 음식 만드는 일도 배웠다. 전쟁 직후 모든 것을 자급해야 되는 당시는 참으로 만능의 재주가 필요했다.
타고난 성실성과 눈썰미를 지녔던 조지는 그런 모든 일들을 곧잘 해냈다. 조지는 특별히 창의성이 뛰어난 아이였다. 조지에게 일과 자체는 자신을 개발하는 도구였다. 더구나 자연을 보는 그의 눈은 남달랐다.
“조지는 화초에도 전문가구나.”
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칭찬했다. 주위에는 그보다 화초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시들어가던 화초들도 생생하게 원기를 회복했다. 하나님은 일찍부터 이 평범치 않은 흑인 아이를 위대한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맡기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하지만 당시 미주리 주(州)의 주법(州法))은 흑인을 위한 교육을 허락지 않고 있었다.
“장미꽃에도 붉은 장미와 노란 장미가 있지요. 사람에게도 단지 다른 인종이 있을 뿐입니다. 백인이 흑인보다 낫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당시 카버의 심경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다가왔다. 한 때 미주리 주의 수도였던 네오쇼에 가면 흑인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흑인들을 가르치던 링컨 학교였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세탁업과 산파 노릇을 하던 마리아 왓킨스라는 흑인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조지는 그녀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그녀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유명한 상원의원이 카버 박사에게 “당신은 도대체 그 모든 것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지요” 라고 카버가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책입니까”
그 상원 의원이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성경입니다”
이 같은 그의 견고한 믿음은 언제부터 싹튼 것일까? 물론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바로 이 마리아 왓킨스를 만나면서 생명(生命)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는 언젠가 가난한 동족들에게 네가 배운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믿음의 부인 마리아 왓킨스가 부탁한 이 말은 카버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누구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던 카버의 생애를 지탱해 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카버의 삶을 살펴보면 이상하게도 어두운 그늘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들의 상식으로 보면 당연히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고독과 더불어 우울한 삶을 사는 것이 그에게는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버는 결코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는 늘 유머 감각이 넘쳤던 사람이었다. 한번은 누군가 그에게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담배 피우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머리에 연기 나는 굴뚝을 주셨을 겁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편 5절)”
이렇게 그에게는 그를 조금도 외롭지 않게 동행해주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셨던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어두운 그늘을 벗고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커다란 일을 성취할 수 있는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조지는 성이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그의 성은 카버로 불리게 되었다. 16세가 되던 때, 카버는 캔사스 주 포트 스코트의 백인 가정의 요리사로 들어가 열심히 일한 덕에 돈을 조금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봄에는 읍내의 작은 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백인 폭도들이 대낮에 한 흑인을 무참히 구타하고는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죽이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햇빛은 큰 구름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구름은 대항할 힘이라고는 전혀 없는 고아를 사로잡으려는 자들이 가려놓은 것이었지요.”
그 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남겨 놓았다. 이 후 온갖 잡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며 공부하던 카버는 1880년 스무 살이 되면서 미네아폴리스에서 세탁업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했다. 이 때 동료 학생 중에 조지 카버와 동명이인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워싱턴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졸업을 앞두고 하일랜드 주의 장로교 계통의 대학에 지원한 그는 또 한번 상처를 받게 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 허가서를 받고 찾아간 학교에서 그의 입학을 거부한 것이다. 그것도 그를 본 학장이 완강히 그의 입학을 막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흑인은 그때까지 한사람도 이 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심해있던 카버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세상은 그를 외면해도 하나님은 결코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 1888년 여름, 침례교회에서 만난 존 밀홀랜드라는 의사 부부가 그에게 학교를 하나 소개해주었다. 감리교 감독 매튜 심슨이 설립한 학교였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만인의 평등권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과학자 워싱턴 카버
1890년 9월, 카버는 이 인디아놀라의 심슨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그를 위해서 또 한사람을 예비해놓고 있었다. 미술을 가르치는 버드라는 선생이었다. 카버는 미술에 아주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카버가 식물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자질이 더욱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그녀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조지는 식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렇다! 미술은 다른 사람이라도 할 수 있다. 가난한 동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은 다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조지가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였다. 그녀는 곧 아이오와 농과 대학의 원예학 교수로 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카버를 소개해주었다. 지금도 미국의 유명한 농과대학인 이 아이오와 주립 농과대학은 당시 최신농법을 연구하기 시작하던 학교였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카버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곳이었다.
1894년 이 학교를 수석 졸업한 그는 당시 가장 저명한 식물학자였던 루이스 파멜 교수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카버는 뛰어난 원예작물의 접목법을 개발하여 세균에 대한 과일나무와 식물의 저항력을 크게 높였다. 세균학을 공부하여 2만 가지가 넘는 표본을 수집하기도 했다. 농업 응용화학 분야에서 카버는 명성을 높여가며 금 새 권위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민이 그의 머리를 늘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불쌍한 흑인 동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버는 부커 워싱턴으로부터 한통의 감동적인 편지를 받게 된다. 부커 워싱턴은 당시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1896년 흑인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지위나 명예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얻으려면 지금의 당신 지위로도 가능하겠지요.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바로 그 세 가지를 단념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곧 타락하고 가난하며 버려질 운명에 있는 우리 동족 흑인들을 구출하여 떳떳한 인간으로 만드는 일을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부커도 물론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던 사람이었다. 그는 무지한 흑인들에게 자유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심어주는 길은 교육뿐임을 절실히 느끼고 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앨라배마의 이 터스키지 학원에 농학부를 설치하면서 부커는 카버에게 자신과 함께 동역하기를 간절히 부탁했다. 1896년 10월, 이 일은 카버에게 맡겨졌다.
당시 남부의 흑인 농민들은 주로 면화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 장소에 한 가지 농사만을 계속해서 짓다보니 토지는 계속 척박해져갔다. 그는 이렇게 황폐해져가던 토질을 개량해 가면서 새로운 농법을 가르쳤다. 면화뿐 아니라 새로운 작물도 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소유의 농장은 놀라울 정도로 비옥한 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면화뿐 아니라 땅콩, 고구마들도 수확되었다. 처음 카버 박사를 의심하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카버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농민학원을 열어 사람들을 계도하기 시작했다. 농법을 가르쳐주며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서 이동학교를 열기도 했다. 이 이동학교는 남부의 곳곳을 다니며 미국의 가난한 흑인 농촌 지역들을 변화시켰다.
농산물 응용 화학의 선구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동물과 식물과 광물을 주셨습니다. 이것들을 이용해서 우리들은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는 유난히 땅콩을 좋아했다. 땅콩을 이용한 수많은 요리법이 개발되었다. 115가지의 땅콩 음식물과 2백여 개의 실용품을 만들어냈다. 땅콩으로 그는 땅콩버터, 전분, 크림, 연고 등을 만들었으며, 땅콩의 껍질로는 전기 전열판, 땔감, 접착제, 인조 석재 등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기도와 더불어 땅콩기름을 바르고 소아마비 환자들을 치료했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완치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의료계의 주목 거리였다. 그가 치료한 환자 250명 모두 효과를 보았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완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한 땅콩이 식량이 부족하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은 틀림 없다. 하지만 얼마나 카버의 정성이 대단하였으면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기적까지 덤으로 베풀어주셨던 것일까? 글쓴이는 이런 유쾌하고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고구마를 이용한 실용품도 118가지가 넘었다. 그의 손을 통해서 고구마는 사탕과 식초, 전분, 구두약, 연고제, 인조 밀가루 등으로 가공 되었다. 당시 미국은 노예 제도를 통해 주로 대단위 면화만을 재배하고 있었다. 카버로 인해 미국의 농업 환경이 획기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직 흑인이었던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비록 북부에서 공부했으나 자신의 동족이 신음하는 남부를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일이었던 것이다.
카버의 신앙과 인품
그런가하면 카버는 성경 공부반을 만들었다. 농학자의 경험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주말 오후 6시만 되면 300명이 넘는 인원이 성경 공부를 위해서 모여들었다. 카버는 아무리 먼 곳을 여행하다가도 주말만 되면 이 성경 공부반의 인도를 위해서 돌아오곤 했다.
카버는 이제 유명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외국 여러 정부의 고문관들이 그를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쿨리지 대통령과 루즈벨트 대통령도 그를 방문하였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와 간디 등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늘 겸손한 사람이었다. 카버가 57세 되던 해였다.
“카버 박사님 저희들과 함께 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연봉은 지금 계신 곳보다 1천배를 더 드리겠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의 이름을 딴 토머스 에디슨 연구소가 그에게 연봉 10만 달러를 제의하면서 자신들과 함께 일하자고 간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거절했다. 그는 22년 동안 봉사하던 터스키지에 남기를 원했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터스키지에 남았다. 도합 40여년을 그곳에서 헌신하였던 것이다 10만 달러라면 지금도 아주 큰 돈이다. 당시로서는 얼마나 많은 돈이었을까? 그가 좀 더 훌륭한 연구 시설을 갖춘 그런 곳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마음껏 연구 생활을 펼쳤다면 인류 역사에 더욱 커다란 금자탑을 세운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시고 베푸신 일이 더 중요했다. 그의 정식수입이란 말년까지 1896년 부커 교장이 정했던 월 125달러가 전부였다.
‘세상을 모두 가진 내가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과 그분이 주신 세상이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이것이 그의 삶의 신조였다. 고아나 다름없던 그였지만 카버는 하나님과 더불어 긍정적으로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우리는 카버에게서 예수님을 따라간 훌륭한 인물의 표본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엉뚱한 것으로 성공의 기준을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기준이 있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세상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필자는 과학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순위가 있다면 선두권에는 분명 조지 워싱턴 카버가 당당히 오를 거라고 확신한다.
“옷이나 아름다운 집이나 저축한 돈이 성공의 기준이 될 수 없지요. 인류를 위하여 얼마나 봉사하였는가가 성공된 삶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일생을 독신(獨身)과 청빈(淸貧)으로 살던 카버는 1943년 1월 5일 목요일, 하늘나라로 갔다. 카버는 세상에 살면서 남겼던 모든 것을 평소 원했던 대로 창의적인 화학 연구소를 만드는데 기부하였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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