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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과학

복음주의 과학관의 세 가지 요소(조덕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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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과학관의 세 가지 요소(강의 자료 5, 조덕영 교수)

 

 

복음주의 과학관의 세 가지 요소

    1) 성경: 복음과 초대 교회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초대 기독교의 믿음은 확고하다. 창조주는 우주와 역사의 통치자요 주관자이다. 이것은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나 플로티누스(Plotinus)가 말하는 선을 뛰어넘는 ‘초 본질적 존재’와도 다르다. 인격을 지닌 주권자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교리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 없이 창조주와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성경이 계시하는 증언을 기초로 이 창조주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했음을 인정하여 왔다. 이 우주의 시간과 공간과 빛과 어두움을 포함한 모든 물질은 무(無)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 모두도 창조의 영역에 속해 있다(골 1:16).

 

또한 그 창조주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처럼 이 세상에 무관심한 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인정하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은 부정하는 일종의 초월신론(超越神論)인 이신론(理神論, Deism)도 성경의 영역이 아니다. 

   유대교 출신인 사도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속과 부활의 주가 되며 창조주임을 확신하면서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복음주의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복음주의라는 언어는 없었으나 초대교회 사도들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은 오늘날 복음주의의 뿌리가 됨은 물론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에 성경이 기록되었으며 비록 그리스도가 과학의 시대를 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과 그리스도라는 이 두 기둥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이 두 기둥과 이 두 기둥에 뿌리를 둔 종교개혁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룩한 정통 교리를 중심으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2) 자연 계시: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를 중심으로

(1) 어거스틴


칼빈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종교의 씨앗(the seed of religion)은 사람에게 심겨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연 계시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칼빈은 자연과 우주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보고자 하였다. 그가 사용한 “책”, “거울”, “궁전”, “휘황찬란한 극장”, “무언(無言)의 교사” 등의 용어들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칼빈이 보기에 이와 같은 자연적 계시와 인간의 이성이란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데까지 연결되지는 못하는 것들이다.
   성경의 창조주와 구속의 주에 대한 확신에 관한 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과 칼빈은 동일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고백에는 그런 경험이 깔려 있다. 이 때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 구원은 연결된다. 이러한 상태의 원인은 피조물이요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불만족과 공허감’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자신의 위대한 형상 안에서 인간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는 자신의 위대성을 한 조각의 흔적을 가지고도 알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로 꽃동산과 산들바람을 가지고도 기뻐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달콤한 은혜를 항상 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거만함과 의심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면 결코 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자로 길이를 재듯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바로 자신을 우리에게 보다 가깝고, 친숙하게 만드시고, 동시에 대화할 수 있게 허락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여기서 어거스틴은 자연 계시에 대해 칼빈과 조금 달랐다. 어거스틴은 좀더 깊이 나아간 듯하다. 어거스틴이 주목한 것은 하나님은 이성을 만드시고 이성을 사용하시는 분이다.  창조주 그 분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리고 자연은 정교하다. 자연을 대충 만드셨을 리가 없고 자연 계시라고 불충분하게 하실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 계시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조차 정밀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있다. 사람의 지성과 추론 능력은 서로 크게 다르다.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지성에 뛰어난 사람이 유리하다. 스티븐 에반스(C. Stephen Evans)는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복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은 복음의 방해물은 아니다. 이성은 복음의 조력자이다.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버려서는 안된다. 이성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상식이 무시된 곳에 복음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상식을 무시한 곳에 나타나는 성경 이외의 새로운 직통 계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어거스틴은 복음을 결코 무시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성도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선하신 도구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천착(穿鑿)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분명 세상에는 신적 흔적이 계시되고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로 나아간다. 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세 개의 위격이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고대부터 많은 신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가 있어왔다. ‘베스티기움’(Vestigium)은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신학이나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나 문제를 설명할 때, 그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물이나 현상을 통해 설명하는 형식과 자료를 의미한다. 즉 자연의 예증이나 사변적 유추에서 그 흔적들을 찾게 된다. 일반적으로 ‘베스티기움’은 ‘흔적’이라고 번역한다.


어떻게 감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우매한 도전을 하느냐는 비판 앞에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연구나 설명은 늘 위축되거나 주춤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다.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에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신론에 있어 어거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준 터툴리안(Tertull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 나무줄기․ 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 시내․ 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하였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가 나타나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미국 창조 연구소(ICR)의 소장이었던 헨리 모리스는 우주와 만물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의 예증으로 ‘공간, 물질,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우주,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지는 시간, ‘본성, 본체,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등을 내세웠다. 그 외에 세 잎사귀의 클로버, 삼각형과 같이 세 개의 것이 모여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사물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 삼원색의 ‘빨강, 노랑, 파랑’ 등을 들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둘째,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음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 ’와 ‘사랑받는 대상’ 과 ‘사랑’이라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제 8권). 또 사람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마음’과 ‘마음이 자체를 아는 그 지식’과 ‘마음이 자체와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 동등하며 한 본질이다”(9권). 더 나아가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이다”(제 10권). 그리고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눈에 인상으로 박히는 그 형태’와 ‘이 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으로 되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제 11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이 집중된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2) 칼 바르트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데 비해 자연 계시와 자연신학 모두에 부정적이었던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당연히 피조 세계 속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바르트는 사변적(思辨的) 사유나 자연계의 예증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흔적을 거부한다. 절대적 그리스도 중심이요 하나님의 계시의 신학에 토대를 둔 기독론 중심의 바르트에게 있어 어쩌면 흔적에 대한 추적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바르트가 삼위일체의 뿌리는 계시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바르트가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계시의 예증이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바르트는 이 흔적의 문제를 별도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별히 자연과 문화와 역사, 종교 그리고 인간 영혼의 5 개 영역에 내재한 흔적의 문제를 다룬다. 다만 바르트는 그것을 발견해서도 안 되며 확인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약성서가 증거 하는 계시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계시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이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성서의 증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버지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만 전달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단지 철학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 곧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제시해 주었다. 그 하나님이 먼저 우주적 아버지로 있다가 맨 나중에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는 예수의 아버지요 따라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서적 계시 외에는 어떤 다른 계시나 삼위일체론의 기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밖 어떤 흔적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과거에 어거스틴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이 흔적을 찾으려고 고민하였고 사실 그러한 흔적을 자연과 문화와 역사와 종교와 심리 안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어떠한 유형이든 간에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모든 흔적이 의심스럽다. 계시를 떠나 피조자의 계시에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그 교리의 제이의 기원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인정한다면 당장 혼란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흔적 중에서 어느 흔적이 가장 본상(本相)에 가까울까 하는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노력은 불가피하게 인간학이나 우주학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는 비유나 흔적을 말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체를 분명하게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제이의 기원을 추구하게 되며, 그 교리를 변명하고 증명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성서가 증거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이다.

흔적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되면 가장 중요한 계시의 내용을 경시하게 된다. 문이 열려지면 그 문으로 존재의 유비가 들어온다. 계시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예화가 따른다. 이것은 계시를 경시하는 행동이다. 계시는 정당하게 해석될 것이지 예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흔적에 대한 길고도 자세한 고찰 끝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즉 “이 흔적은 분명하고 의존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불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그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삼위일체 교리의 범위 안에서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러나 흔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안에서의 피조자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지함에 있어서 우리는 제 1의 기원과 함께 제 2기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의 단 하나의 기원을 주장 한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들 옛 신학적 추적을 모두 부질없는 유희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바르트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의 발견자들이 계시와 나란히 3위 일체의 다른 제 2의 다른 뿌리를 만들어낼 의사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이 다른 뿌리를 유일하고 참된 것으로 만들려고 했거나 3위 일체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즉 바르트도 창조 안에 수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작은 빛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논쟁 파트너였던 브룬너(Emil Brunner)의 입장에 보다 가깝게 접근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작은 빛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의미는 가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바르트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베스티기움(Vestigium)에 의한 신학적 언어가 계시의 해석(interpretation)을 넘어서 계시의 예증(illustration)을 주장하는 경우로 영역을 침범해 들어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계속 우려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해석이란 ‘같은 것’을 다른 것으로 말함을 의미하며 예증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해석은 본질이 변하지 않으나 예증은 본질이 변할 우려가 있다. 융엘(E. Jüngel)은 해석은 계시가 인간의 말을 정복하는 것이고 예증은 인간의 말이 계시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바르트의 해석과 예증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입장과 바르트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베스티기움’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3) 흔적에 대한 현대적 검토(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삼위일체 창조 섭리)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만물에는 창조의 질서가 나타난다. 눈의 결정체나 아직도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DNA나 단백질 등은 그 한 예이다. 가장 완벽한 질서는 창조 당시(창1:31)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이 질서는 일부 붕괴하였다. 노아 홍수 이후 종말을 향해 가면서 그 붕괴는 가속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수학의 질서만큼은 창조 이래로 변동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수학적 질서도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 성경이 나타내는 숫자 마다 일정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적 수(神的 數, Theomatic numbers)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반 페닌(Ivan Panin, 1885-1942)은 일찍이 성경과 숫자적 질서에 관심을 기울였다. 최근 컴퓨터 전문가인 젠킨스(Vernon Genkins)는 이들 연구를 확장하여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게마트리아(Gematria)에 의한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제공한다.


그림 1 . 히브리 알파벳과 숫자 값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와 헬라 문자는 각 문자마다 고유의 숫자 값(numerical value)을 가진다.  이들 히브리 문자 22개에 있는 수적인 값은 기원전 200년 경 도입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구체적인 숫자 값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이 히브리어 알파벳은 처음 글자 알렙(א, Aleph)과 끝 글자인 타우(ת, Tau)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절의 구성은 그림 1과 같다. 창세기 1장 1절은 8개 단어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그림2).

그림 2. 히브리 성경 본문에 나타난 창세기 1장 1절의 숫자 값
   여기서  4번째 단어는 영어에는 없으나 히브리어에는 꼭 필요(목적격 전치사)한 단어이다. 8번째 단어는 7번째 단어와 중복된다. 젠킨스는 이 창세기 1장 1절의 놀라운 수적 질서에 대해 논증한다. 젠킨스는 히브리 원문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총 7 개 단어의 마지막 알파벳이 28번째 인 것에 주목한다. 

   28은 7번째 삼각수(三角數, triangular number=1+2+3+4+5+6+7=28)에 해당한다. 또한 삼각형의 변의 합은 18(=6+6+6)이 된다. 이 6은 3번째 삼각수이면서 첫 번째 완전수(完全數, perfect number:자신을 제외한 자신을 나눌 수 있는 수의 합이 자신이 되는 수)이다. 완전수는 숫자 1에서 3만 사이에 겨우 4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각형 28은 반대로 두 개를 겹쳐놓으면 다윗의 별이 된다. 육선형(六線型)을 이루는 수 37(hexagram number)은 중복 부분을 이루는 육각형을 이루는 수(hexagon number) 19를 이루는 첫 번째 삼각수로 이 육선형수와 육각형수는 수에 있어서 중요한 한 쌍이다(그림 7). 3과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신적 수이다.
   그런데 이 창 1:1절의 숫자 값 안에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라고 볼 수 있는 더욱 놀라운 숫자적 질서가 존재한다. 7단어 문자 값의 합은 2701이다(그림 4). 

   여기서  4번째 단어는 영어에는 없으나 히브리어에는 꼭 필요(목적격 전치사)한 단어이다. 8번째 단어는 7번째 단어와 중복된다. 젠킨스는 이 창세기 1장 1절의 놀라운 수적 질서에 대해 논증한다. 젠킨스는 히브리 원문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총 7 개 단어의 마지막 알파벳이 28번째 인 것에 주목한다.




그림 3 . 창세기 1장 1절의 문자열(列)과 문자의 갯수

   28은 7번째 삼각수(三角數, triangular number=1+2+3+4+5+6+7=28)에 해당한다. 또한 삼각형의 변의 합은 18(=6+6+6)이 된다. 이 6은 3번째 삼각수이면서 첫 번째 완전수(完全數, perfect number:자신을 제외한 자신을 나눌 수 있는 수의 합이 자신이 되는 수)이다. 완전수는 숫자 1에서 3만 사이에 겨우 4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각형 28은 반대로 두 개를 겹쳐놓으면 다윗의 별이 된다. 육선형(六線型)을 이루는 수 37(hexagram number)은 중복 부분을 이루는 육각형을 이루는 수(hexagon number) 19를 이루는 첫 번째 삼각수로 이 육선형수와 육각형수는 수에 있어서 중요한 한 쌍이다(그림 7). 3과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신적 수이다.
   그런데 이 창 1:1절의 숫자 값 안에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라고 볼 수 있는 더욱 놀라운 숫자적 질서가 존재한다. 7단어 문자 값의 합은 2701이다(그림 4).


그림 4 . 창세기 1장 1절 숫자 값의 총계

 이 2701은 73번째 삼각수(즉 1+2+----+73)이다. 이 삼각형의 삼각변의 합은 216=6*6*6=정육면체 수인데(그림 5) 이 수는 부피값과 표면적이 동일한 유일한 수이다(그림 6). 혹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창조에 대한 웅변적 계시는 아닐까? 즉 삼위일체의 흔적을 수학의 질서에 대비시킬 수 있게 된다. 1에서 1천만까지 사이에 4471개의 삼각수가 있으나 정육면체는 오직 7개 뿐이다. 216은 37번째 육각수 변의 합으로 나타난다. 히브리 알파벳은 십진수의 문자 값을 갖는데 2701의 십진수의 질서를 보면 2701=37*73=(3☓10+7*10☓7+3)으로 구성되어 성경적으로 신적 의미를 지니는 3과 7이라는 숫자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 37과 73은 정수로 나누어지지 않는 소수(素數, prime number)이다. 마치 삼위일체는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듯이 보인다. 성경적으로도 37은 여러 경우 하나님의 수로 나타난다.


그림 5 . 216(6×6×6)은 부피값과 표면적이 같은 유일한 수이다.


그림 6  . 37번째 삼각수(703)와 73번째 삼각수(2701)


그림 7 . hexagram number 73과 hexagon number 37.
   젠킨스는 창세기 1장 1절과 음악 사이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밝히며 음악도 창조의 흔적임을 논증한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음악을 하나님 찬양의 도구로 표현한다. 즉 신적 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의 게마트리아(Gematria)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과 함께 질문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8 . 6번째 낱말의 숫자 값과 7번째 숫자 값의 총계(703=19×37)

   첫째, 숫자적 질서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교통에 의한 완벽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흔적을 계시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피조된 인간이 가진 제한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신의 존재를 피조 세계를 통해 인식케 하려는 창조주 자신의 의도로 볼 수 있다. 

둘째, 성경과 수학적 질서 사이에 나타난 완전한 유비(類比, analogy)적 관계는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스스로 완전한 존재임을 계시한다. 그럼 혹시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완벽을 요구하시는가. 그렇다 성경은 인간에게도 완벽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물리적 질서는 그 질서를 창조한 하나님의 몫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완전은 하나님처럼 물리적 질서의 완벽이 아니라 물리적 질서의 흔적을 통해 확인된 그 창조주를 향한 다른 완벽을 요구한다. 즉 하나님이 인정하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완전하다는 암시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셋째, 완전한 창조주라면 불완전한 인간에게 물리적 완벽이 아닌 다른 방식의 완전을 요구할 수 있다. 즉 완전의 흔적을 다른 측면에서 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벽은 세상의 지식, 지혜, 능력이 없이도 가능한 일로 표현된다. 그는 온유하며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어도 찾을 수 있고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완전이다. 성경은 부자의 큰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lepton)이나, 마리아의 헌신, 아브라함의 믿음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기도 등을 완벽한 것으로 본다. 그림(4,6,8)처럼 지극히 작은 한점의 출발이 틀리면 모든 결과는 오답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목적과 결과를 중시하는데 비해 창조주는 시작의 동기와 과정에 관심을 가지신 분은 아니신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위와 같은 최근의 연구 결과들이 자연 계시와 그에 따른 삼위일체 흔적의 증거에 대한 완벽한 논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과학적 연구는 여전히 유동적이고 제한적이다. 과학적 결과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문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 피조물 안에는 이런 특정한 질서가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인가? 이것이 성경의 구조 안에서까지 확인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일련의 결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혹시 단순히 인간의 인위적 조작이거나 우연의 결과에 불과한가? 이것들이 삼위일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아도 좋은가? 왜 성경의 숫자 값 안에는 이런 수학과 기하학적 질서가 있는가? 혹시 성경 뿐 아니라 모든 피조된 구조 안에는 그런 질서가 남아있는가?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이런 질서가 들어있을 것인가? 참으로 고민을 더하게 된다. 그 해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만큼은 찾아내게 되었다. 자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지 말아야 하고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는 바르트의 주장에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분명 찾으려는 노력조차 포기하면 안될 만큼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경이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시 19:1-5). 예수님은 성찬 제정과 비유를 통해 자신의 진리를 전하려 시도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한이라기보다 인간의 한계성을 반영한다. 즉 제한성 가운데서 인간에게 진리의 편린이라도 전하고 설득하려는 창조주의 의지를 반영한다. 인간에게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란 제한적이라는 전제 아래 흔적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본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셨음을 기억하고 삼위일체 흔적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주의의 기본 성격은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과 자연 계시 아래에서 과학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적용하는 일에 주목한다. 비록 흔적의 연구가 제한적임을 인정하더라도 복음주의는 그 흔적 자체를 못 본 척 외면할 수는 없다. 과학이든 신학이든 우리 인간이 제한적이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는가. 어떤 해석이든 완전한가? 여전히 불완전하다. 내재(內在)와 초월(超越)의 하나님을 자연 계시 아래서 찾는 작업은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작업이다. 그러나 불완전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해석과 인간의 적용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에는 흔적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으로도 완전할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완전할 뿐이다. 음악이 그 작곡가의 전부를 말하지 않고 조각가의 작품이 그 조각가 전부를 말하지는 않으나 어떤 한 측면을 반영하듯이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해하면 흔적들을 찾는 작업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것을 부여하여 무거운 관심으로 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완전 배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제한적이나마 하나님의 많은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어린 자식에게 부모는 부모에 대한 많은 학문적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한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여전히 부모의 측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해야 될 자식의 입장에서는 필요하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엄연한 현실 아래에서 자연 계시의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으면서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전면 부정론과 비관론을 넘어 오히려 논쟁은 더 심화 되는 듯하다. 클락 피녹(Clark H. Pinnock)은 일반 계시를 구원적 가치에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오늘날 일반 계시에 구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카톨릭 신학의 공식 입장이다. 대표적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신적 계시로서의 성경을 포기하고 자연 종교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개혁 신학의 특징 가운데 일반 계시의 명료성을 말하나, 타락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일반 계시로는 누구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참된 창조주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우리 인간은 늘 제한을 가진 도구로 하나님을 다룰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불완전이라기보다 분명 인간의 죄성과 그에 따른 교제의 상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부분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특수 계시가 적용되는 공간은 여전히 일반 계시의 영역이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피조 된 우주 안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인간의 정신 활동 가운데서 제한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

   제한적이라고 무조건 배타적으로 보고 접근조차 막는 것은 신앙과 학문적 진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세상을 복음의 눈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비판하고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인류가 지닌 한계를 짚어내는 것만 가지고도 큰 성과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자연 계시를 바탕으로 한 삼위일체에 대한 현대적 검토는 조그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 계시는 성경으로 완성 되었더라도 자연 계시는 어떤 면에서 점진성을 띠므로 결코 탐색 자체를 게을리 할 수 없다. 그 자연적 계시의 점진성과 탐색에 대한 정진을 멈출 수 없다는 확신은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룰 종교 개혁 시대를 살았던 칼빈이 사용한 '적응’의 이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