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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신학

김응조 목사(성결교 성경 해석의 태두)의 생애와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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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 김응조 목사 설교집 <사막의 생수>


성결교 성경 해석의 태두- 김응조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


조덕영



1.들어가면서

  영암(靈岩) 김응조(金應祖;1896-1991)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성결교하면 김응조 목사를 연상할 정도로 성결교 교단의 큰 인물이다. 그는 이명직 목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의 신앙과 신학을 계승한 성결교 제2세대였으나, 오늘날 이명직 목사와 더불어 성결교의 두 기둥 가운데 한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부흥사였으며 신학교 교수였고 1937년부터 1985년까지 41권이나 되는 신학 서적을 저술학 신학자였다.  자서전이나 설교집을 포함할 경우 그가 남긴 저술의 양은 200자 원고지 약 10만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가 오늘날 한국의 3대 주석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러 교회를 개척할만큼 실천적인 신앙인이었다.

  그는 순복음주의자(우리나라에서 순복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회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실은 성결 교단에 유래한 말이다)임을 자처할만큼 신앙의 보수주의자였으면서도 교파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신앙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일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하거나 물러서는 적이 없었던 인물이다.

  이런 물러서지않는 믿음 때문에 때때로 그에 대한 평가에는 오해가 발생하곤 한다. 여기서는 김응조 목사에 대한 간략한 생애와 신학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의 맥킨 타이어라고도 불려지는 그의 모습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영암 김응조 목사의 생애

  영암 김응조 목사는 1896년 12월 3일 한국의 동단에 위치한 경북 영덕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최초로 교회에 입교한 것은 1909년 부친을 따라서였으며 15세 때 세례를 받게 된다.

  수세 후 그는 16세의 나이로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것은 순전히 교육열이 유별났던 그의 선친 덕분이었다고 그는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와 실업가가 되기를 권유하는 선생님과 장차 법률을 배워 변호사가 되기를 소망하던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여러 진로를 모색해보나 그 모든 길들이 막히고 만다. 이 때 갈등을 겪다가 그는 결국 하나님께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니 때는 1917년 4월 15일이었다.

  이 때 동양 선교회 성서 학원(현 서울 신학 대학)에 함께 입학한 학생은 모두 18명이었다.

  입학 후 1년간 일본 전도 여행에 동참하기도 했던 그는 신학교에 입학한지 2년 후인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하며 결국 그는 고향에서 투옥당하는 고난을 당하게 된다. 그가 출옥한 것은 1920년 9월이었는데 1년여간 옥중에 있으면서 그는 여러 체험을 하면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당시 신학교의 수업 연한 은 3년이었는데 그는 3년의 수양 기간 중 1년은 일본에서 보냈고 1년은 옥중에서 보내게 된다.  나머지 1년만이 그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신학수양 기간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얻은 경험과 옥중에서의 간증을 들은 신학교 원장은 1920년 10월 그의 졸업을 인정하였다.

  단지 1년의 정규 신학 수업만 받은 그가 방대한 신학 저서의 저자이며 신학교수로서 어렵고 난해한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가르칠 만큼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가 처녀 임지로 간곳은 1920년 철원 교회였다. 그 후 경기도 광주와 안성을 거쳐 1926년 4월 아현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경기도 광주에서 시무하면서는 홍수로 인하여 첫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아픔을 당하기도 한다.

  1926년 9월에는 북부 지방의 감리 목사로 임명을 받게 되는데 당시 이곳은 성결교 5대 교구 중 가장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40여개의 교회를 신설하게 된다. 하지만 이에 따라 심신이 피로해진 그에게 중병이 임하게 된다. 세브란스 병원의 진단 결과 폐병 2기라는 진단을 받은 그는 요양도 겸할 예정으로 목포로 내려가게 된다. 많은 어려움과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시무하던 이곳 목포에서 그는 뜨거운 성령의 체험과 신유의 체험을 맞보게 되었다.

  1931년 그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알게된 총회 본부에서는 그를 호남 지방의 감리 목사로 임명하였다. 대전에 상주하면서 전라도와 충청도를 관할하는 목사가 된 그는 5년 동안 36개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39곳에 교회를 신축하였으며 200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1936년 4월에는 40세의 나이로 중부 지방의 감리 목사가 된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로서 그는 최연소의 중부지방 감리 목사가 된 것이다.

  이 때 그에게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이는 일이 한가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이다. 그가 서울에 있으면서 신사참배를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평생을 친일파들의 행로를 추적하였던 임종국(林鐘國)은 그의 “친일 문학론”(1966)에서 그가 1938년 4월 25일 장로교 총회의 비극적인 신사참배 가결이 있기 5개월전 다른 교파의 여러 목사들과 함께 성결교의 대표로서 신사참배 결의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김응조 목사는 1937년 4월 18일 천장절 축하식은 그들의 공갈과 협박에 못이겨 교회에 대한 영향을 생각하여 참석하였으나 뒤이어 있은 남산 신궁으로의 신사참배에는 몰래 가시철망을 빠져나와 참석지 않았다고 그의 책(나는 기도하여 얻었다)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김응조 목사는 자신이 이후 공직을 떠난 것이 교회의 책임자로 있을 경우 참배를 면치 못할 것을 걱정한 것과 성결 단체가 다른 단체에 솔선하여 신사참배 무죄론을 주장한 것이 비신앙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신사참배를 결의한 적이 결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진술을 믿고 싶다. 김 목사의 <나는 기도하여 얻었다>는 주로 신앙적 삶의 여정과 간증을 다루는 책이다. 이런 책에서 개인이 직접 구체적으로 묘사한 내용을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많은 친일 인사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정죄하는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과거를 잘 살펴보지 않고 마구잡이로 많은 이들에게 친일이라는 굴레를 씌우곤한다. 과거를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신중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신앙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 평가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아무튼 이후 성결교는 1943년 12월 해산되었으며 김응조 목사는 오히려 교파가 없어졌으므로 자유롭게 초교파로 부흥설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일제 말기를 보낼 수 있었다. 해방되기 1년 전에는 거의 산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영적 수양을 하게 되며 이것이 해방 후 새출발 하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해방 후 그는 조직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오직 불같은 신앙과 성화와 성결의 정신으로 교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 일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다가 6.25전쟁 시 인민군에 잡혀 죽음의 기로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면서 다시금 신앙의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다시금 교단의 기관과 기구에도 관여하고 종말론적인 내세적 신앙을 내세우면서 활동하던 그는 1957년 마침내 성결교회 희년이 되는 해에 제 11대 총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믿음은 1960년 성결교회의 분리도 가져오게 된다. 그의 뜨거운 순수 복음 정신은 세속화한 NCC나 WCC에 가입하고자 하는 일부 목사들의 입장을 결코 따를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과의 개인적 감정 차원이 아니라 신앙으로 싸ㅓ우다가 결국 수적 공세에 승산을 포기하고 오직 순복음을 지키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이것을 그는 17세기 구라파의 부패한 교회를 떠나서 신천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순복음적 교회를 창설한 청교도를 연상하는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또 이것은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시던 하나님의 명령처럼 여겨졌기에 그는 훌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으며 43년간 육성해 놓은 신학교 교수직까지도 석별의 감이 없지않았지만 아무 미련없이 사직하였다.

이것은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치루는 고배(苦杯)였다고 그는 적고 있다. 교단이 분리가 되는 경우 언제나 양측의 입장은 서로 해석이 달라지게 되며 책임을 상대편에게 떠넘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도 이러한 책임의 일부를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사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마치 바울이 마가의 문제로 바나바와 다투었듯이 그는 복음의 열심이 남달랐으며 복음의 정도를 벗어나는 일에는 결단코 물러서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분리 가운데서도 1962년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성결교 신학교의 설립을 허락하신다. 몽중에 체험한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홍대실 권사를 만나서 교사를 건축하니 바로 행촌동 교사이다. 그 후 홍권사는 안양의 2만 4천평 임야까지도 기증하니 바로 오늘날 성결대의 안양 캠퍼스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신앙의 행로 가운데서 그가 1926년부터 1983년까지 부흥회를 인도한 것은 426개 교회였으며 그것은 교파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또한 1937년 “실천 신학 목회학”을 시발로 1985년 까지 41권의 신학 서적을 저술하였으며 이것은 자서전이나 설교집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위한 끊없는 헌신과 충성의 길울 달려갔던 그가 1991년 4월 17일 오전 7시 50분 소천하니 향년 96세였다.



3. 김응조 목사의 신학

3-1.신학의 기본 입장

  김응조 목사의 신학은 매우 성서 중심적이다. 서양철학에 의해서 이론화되거나 서양인의 의식구조에 의해서 인식되고 형성된 신학이 아니고, 순진한 성서관에 기초한 기독교 진리 이해의 신학이었다. 

그는 현대신학의 많은 유형을 대체적으로 부정하거나 지식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성서, 세례, 신앙, 성결, 종말 등을 강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서구 신학의 이론도, 한국신학의 시도도 모두 배제하고 그의 성서중심주의 사상을 그의 신학으로 구조하려 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체계적인 신학수업에 의해 정립된 신학이 아니고, 독학으로 정립한 신학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평신도들의 성서 내용 이해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의 많은 부분은 신학적으로 쟁점화될 수 있는 문제제시나 성서해석학적 논쟁점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매우 보수적인 성서관에 기초한 “신앙주의”이다.

  그러나 김응조 목사의 신학은 이미 하나의 교단신학을 구성했고, 이 교단은 “순복음적 신앙을 계승”하려는 그의 단호한 결단에 따라 한국기독교사에서의 새 장을 열었던 것이다. 이 교단 신학의 새로운 순복음성을 담은 성서관을 그는 “성서(聖書)의 위력(偉力)”이란 설교 속에서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자기 신학의 근본사상이며 “예수교 대한 성결교회”(예성)교단신학이라고 압축해서 부를 수 있는 사상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를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리고 성서가 인간에 대하여 어떠한 위대한 역사를 하심을 믿는다. 성서는 기독교 진리의 토대요, 생명의 원천(源泉)이다. 오늘날 사람은 성서를 비판할 줄은 알지만 믿는 마음은 없다. 이러므로 성서가 그의 위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성경을 가지고도 성경과 관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아래와 같이 성서의 위력을 배우자.

  첫째 구원(救援)의 능력(能力)이다.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다.”(롬1:16). 하나님의 권능은 복음에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 복음을 통하여 하신다.

  둘째로 지혜(知彗)의 원천(源泉)이다. “성경은 ...구원함을 얻게 하는 지혜니라”(딤후 3:15).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이다. 이러므로 “지혜는 위로부터 온다”(야3:17)하였다. 잠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1:7)하였고, 야고보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 반드시 주시리라”(야1:5)하였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경을 통하여 나타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의 전부다... 말세에 하나님의 지혜의 전부다... 말세에 하나님이 그 지혜를 성경속에 숨겨 두었다. 이 성경을 애독함으로 그 지혜를 가질 수 있다.

  셋째 교육(敎育)의 양서(良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니...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딤후3:16).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을 자녀 교육의 교과서로 삼았던 것이다. 가정에서나 회당에서나 성경을 표준하여 교육하고 생활하여 왔던 것이다(신6:5~9). 우리 신자는 영으로 이스라엘 선민이다. 우리도 성경을 자기와 자녀의 교육의 근본을 삼아야 하겠다. 오늘 신자들은 자녀에게 세상 과학의 지식은 넣어주려고 애쓰지만 성경교육은 등한시 하는 것이 신앙 탈선이요, 자녀 무시의 과오이다..성경은 우리의 영을 보호하시는 방패이시다.

  넷째 영혼(靈魂)의 좌우검(左右劍)이다. (1)영혼의 수술도(手術刀)이다..  (2)적의 격퇴도이다...우리 한국교회는 이대(二大)난관에 봉착하였다. 첫째는 심령에 병이 깊이들었다. 패독산(敗毒散)이나 고약푼어치 가지고는 할 도리가 없다. 성신의 수술이 필요하다. 둘째는 대적이 침입하였다. 같은 이단사설이 신자를 미혹하고 소위 신학설이 말씀의 검을 대적하고 있다. 진리의 용사들이여, 일어나서 이 말씀의 양면도를 들고 싸우러 나가지 않으려는가?

  다섯째 영혼(靈魂)의 탐조등(探照燈)이다.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나는 사람의 속뜻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니”(묵2:23)...이 세상에는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거든 하물며 말씀의 빛 가운데 숨길 수가 없다. 다시 말씀을 생각하자. 구원의 능력, 지혜의 원천, 교육의 근본, 영혼의 칼, 영혼의 탐조등,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와 같은 복음중심주의적 신앙입장을 바탕으로 김응조 목사는 “기독교는 수양이나 이지(理知)의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개조(改造)의 종교도 아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과 같이 타락한 인류들을 새로 창조하여 새사람을 만들어서 신천지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자신의 신학의 중심명제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3-2. 김응조 목사의 신학적 특징

  위에서는 김응조 신학의 기본 입장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신학의 몇가지 요점들을 열거함으로써 그의 신학적 특색을 찿아보기로 한다.

  1) 김응조 목사는 기독교의 본질를 사도행전(2:38)에 실려있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드러난 베드로 신학과 신앙관에 입각해서 철처히 4대 요소로 구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역설하는 “기독교 사대 요소”는 그의 신앙주의적 신학입장에 따라 좀더 성서주의적이고 정통보수주의적으로 각색된 것이다. 그것을 그는 기독교의 4대 진리라고도 불렀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 혹은 존재양태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근본구원에 대하여 “베드로는 진리의 네 요소를 가지고 설명하셨다”고 확신하면서 “누구든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 순서를 밟아야 신앙세계에 들어올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기독교의 4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4대 진리는 회개이다. “회개는 방향전환이다”, “회개는 죄의 절연이다”
“회개는 과거의 청산이다”라고 하는 세부적 설명을 통해 그는 회개를 제1의 요소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 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셋째, 사죄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다. 사죄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므로, “인간이 성신을 힘입어 죄를 청산하면 하나님은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극히 성서적 메시지를 그는 다시 강조하고 있다. 사죄의 고백이 사라지고 있는 세태의 신앙형태에 대한 각성을 요청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넷째, 성신을 받아야하는 절박한 신앙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회개하고 세례받고 사죄함을 받는 것은 은혜의 제 일단이니 곧 성신을 받을 준비이다” 라고 베드로의 설교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성결교의 4중복음의 제1요강인 중생교리로 유도.해석하고 읶다. “여기까지를 교리상으로 말하면 중생이다”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최대 관심이며, 기독교 진리의 정수는 중생신학이라는 그의 입장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기독교 진리관인 중생론은 상당히 내재주의적 신학경향을 띠고 있으며, 감정의 신학에서 성의 본질이 인간의 절대적인 의존감정에 의해서 실체로 인정하고 있는 슐라이엘마허적 신학진술과 유사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생론은 사실 기독교의 평범한 진리이므로 그의 강조점은 새로운 신학적 이론이나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그의 중생론 속에 회개, 세례, 사죄, 성신의 본질을 함축하여 강조했던 점에서 그의 신학적 경향은 주목된다. 그는 바울의 이신득의 사상과 베드로의 중생신앙을 접붙여 자신의 중생신학을 구조하려 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학함이란 매우 기백이 넘치는 모험적 도전이었다고 하겠다. 이것은 그가 시대사조나 신학의 경향에 따라 움직이는 그 시대의 유행 신학보다는 성서적 진리 자체속에서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신학전승을 직접 자신의 신학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설교적인 요소가 강하며, 신학이론보다는 신학실천에 무게를 두고, 믿음에 대한 이지보다는 믿음으로 행함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삶의 신학, 살아있는 결신의 신학을 피력했던 것이다. “회개, 세례, 사죄, 성신 이것이 기독교 사대진리이다” 라는 그의 결론은 중생신학의 증요성을 다시한번 강조한 것이다.

  2) 중생이 인간의 결단에 속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중생을 가능케 하는 존재는 하나님이다. 이점에서  “하나님을 찾으라”라는 그의 외침 속에서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통해 신의 본질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곧 이어 신의 본질을 다음의 4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신은 곧 창조주로서 “우주의 주인”이다. 창세기 1장의 신의 본질과 바울이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는 신관(행17:24)에 따라 그의 신에 대한 존재인식은 분명해 졌다.

    다음으로 그는 신을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히시고”(행 17:26)라는 바울의 신론을 그 근원인 창세기(1:27~28) 진술에서 추적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내셨다는 관념을 동서양의 공통된 신념니다”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생명의 창조자로서의 신의 본질을 말하면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간접적으로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생명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사를 주관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임의 처단이다.”

그의 신관의 특징은 신의 창조행위와 생사주장에 관한 이론을 비롯하여 세상통치에 관한 이론을 모두 현실적 삶의 현상과 관련하여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인간)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17:26)라는 내용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관에 대하여 부정할 필요는 없으나, 하나님의 속성을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해석했더라면 그의 신관이 완전한 이론체계를 구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의 주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나 행동에 대한 인간 자신의 책임의식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신학에서는 인간 및 인간사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거의 자율문화나 인간의 자유 및 자연질서에 주어진 신의 관용 같은 것은 부정되고 있다. 이점에서 그의 신학은 철두철미 절대적 신론에서 정초된 신중심주의 신학이다. 그의 주장은 일면 기계론적 세계운행론과 유사하다. 인간의 의지나 자연법칙은 주어진 궤도위를 달리고 있는 기계적 유기체와 같을 뿐이다. 그의 두번째 관심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계시니라”(눅 17:21)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는 신의 존재를 인간의 윤리적 규범을 통해 증명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신존재 증명은 일종의 도덕론적 신존재증명과 유사하다.

그는 하나님을 찾는 최선의 길로서 인간의 양심을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양심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감독자요, 당신의 본성의 일부분이다. 하나님이 양심을 통하여 일하시는 멸영 계통이다.” “이러므로 양심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양심을 비로 찾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또 한가지 신존재 증명의 길은 만유재신론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인간의 궁긍적 관심에 관한 한 그는 도덕론적 신존재 증명 이외에도 현상계와의 연관에서 인식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며, 또한 도덕성이나 현상적 인ㅅ기에 신존재의 증명을 인간의 본래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신다” 라는 제 1명제를 통해 만유재신론의 제1성을 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대자연은 하나님의 품안이다.” 라는 제2명제를 통해 만유재신론의 제2성을 발하였다. 곧 이어서 그는 매우 자연주의적 신학이해로 접어든 듯한 선언을 했다. 그의 제3 명제라고 할 수 있는 이 선언은 “도시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을 자연에 가서 찾는다.” 이 제3의 명제는 만유재신론적 주장보다는 철저한 범신론에 근거하고 있는 신관이라고 하겠다. 신은 자연의 창조자이며, 자연의 섭리자이지만, 동시에 자연속에 존재하고 있는 최고의 존재로서 무소부재하다는 입장에서 그의 제3의 명제는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신 발견 방법은 만유재신론적이며, 범신론적이므로 그의 신학의 특색은 혼합적인 사상과 방법에 의해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세번째 관심은 “하나님을 어떻게 찾을까?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인식론이다.

  인식되지 않은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론은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실천성을 내포한 개념으로서, 구체적인 “있음”을 전제로 하고 표현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을 찿으려는 것 자체도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의 신인식론은 바로 앞에서 서술했듯이 만유재신론적 입장에서 이해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멀리 계신 줄 아는 고로 찾을 생각을 감히 못한다. 높은 하늘에나, 먼 자연에나, 높은 인격자에게만 계신 줄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전후 죄우에, 내몸에, 우주 만물에 안계신 곳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가까운데서 찾으라”고 충고한다.

이것은 그의 신학의 내재주의 혹은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면 주관주의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신학의 특색 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특징은 주관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이다. 주관주의는 자아에 의해서 인식되는 실체에 대상성을 부여함으로 인하여 세계구조를 주관과 객관으로 양분한다. 주관주의는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자아가 점대적이다. 이미 프로타고라스는 주관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 곧 인간의 본래성으로 이해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 “인간척도론”을 그의 철학의 중심명제로 선언했다. 그의 이런 사상에 따르면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진리는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태는 그것을 우리는 정신 내에 수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떠한 정신에 의해서도 수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관 자신만이 그것에 대하여 언제나 진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주관을 초개인적 본질로써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주관이란 곧 역동하는 힘, 에네르기아의 실체, 과정, 등으로 구현된 인간적 삶 자체처럼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김응조의 신학은 이러한 철학의 주관주의적 인식론에 비추어 볼 때, 확실히 주관주의적 신학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신을 “누구든지 찾을 마음만 있으면 곧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인식의 주체인 인간이 신을 발견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신인식의 길, 곧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철저히 감각론에 입각한 경헙주의이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더듬는 것이다” “더듬는다” 는 것은 지각행위이다.

  지각은 경험에 기초한 인식의 수단이다. 따라서 지각하는 자와 지각의 대상은 주체와 객체로 양분되며, 지각된 것이 인식에 이르기까지는 또 다른 여러 인식과정이 있다. 그의 신학 특색은 지각적 인식 행위, 지각하는 행위를 통해서 신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점에서 매우 감각론에 접근한 신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3) 김응조 목사는 종말론을 어디까지나 기독교 역사철학의 한 특수형태로 규정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진리의 근원을 성서 자체로부터 규명하려 한다. 그러므로 그는 종말신학을 전개함에 있어 시간적 개념에 대한 지부한 이론이나 논리적 정의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종말의 보편적 의미와 종말의 개체적 의미를 시대의 징조들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취되지 않은 종말의식이나 이미 완성된 종말의식 같은 것은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그의 종말사상의 특색은 구속사와 세속사의 관계속에서 종말의 때가 세속사의 징조들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철저히 성서적. 묵시문학적 일반 종말론이다.

  이것은 재림과 시조의 일치가 가능하다는 하나의 성서주의적 보수주의 정통사상이라고 하겠다.

  그는 종말은 세속사에 개재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 순간이나 성과 속의 만남의 한 순간에 펼쳐질 수 있는 때의 신학적 이해에 기초한 단순한 신학이론의 하나가 아니고, 피조된 인간과 그의 세계 자체에 부닥치는 물리적 변화와 시간적 마지막의 절박성을 나타내는 최후임을 인간의 신앙으로 수용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종말사상은 자우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신학에 기초한 기독교 역사철학의 이론이나, 인간의 실존성, 시대정신의 가치변화에 대한 우려 같은 것에는 관여하고 있지않고, 오직 “시조”의 현상에서 종말의 때를 추론하는 귀납적 방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는 역사와 종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무시하고 있으며, 특히 인간사의 역사성과 개인의 실존적 역사성 등을 종말과 무관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그는 종말의 시대적 징조에 집착하므로 말미암아 예수 자신도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당신이 재림하실 날짜에 대하여서는 아버지만 아시는 고로 언급지 않으셨으나 그 시기에 해당한 징조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를 가리킴이다”

  이미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신학의 특색 가운데서 종말론은 매우 특징이 강한 사상이다.

  그의 종말론의 강조점은 현대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주장하는 개인적 종말론에 있지 않고 일반적 종말론에 있다. “종말론”이란 낱말 자체가 이미 “말일”(사2:2 ; 미 4:1), “말세”(벧전 1:20), “마지막 때”(요일 2:18)라는 성서의 개념에서 유래한 것으로써,신약성서에는 종종 이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기도 하다. 구약성서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로 시대구분을 하였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종말의 시기는 메시야 도래의 시기와 동시적이므로 종말은 동시에 이 시대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이중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시대도 현대적 그리스도의 시대와 미래에 성취될 그리스도의 시대로 양분하며, 종말은 이두 시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종말론은 이 세상의 끝날과 그리고 인간사의 성취라는 두가지 측면을 성취하는 점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원죄의 사건으로 얼룩진 불완전하고 미완성의 역사이자만 완성의 역사를 향해 하나님이 정해주신 과정을 달려가고 있는 역사이다. 그런데 세속사의 마지막 종착점이 곧 세속사의 완성의 때이며, 그 내용은 종말론에서 언급하는 사건과 징조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성서적 종말사상이다. 일반적 종말론은 이런 시대적의식과 종말사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포함하여 종말신학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런 사건들이 개인 각자에게 뿐만 아니라, 시대와 인간사에까지 직접 관련된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성서적 입장에서 전개된 일반적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외에 부활, 최후의 심판, 천년왕국의 건설, 그리고 성도와 적그리스도의 선별등이 그 중심주제를 구성하고 있다.

  그 반면에 개인적 종말론은 인간 현존의 종말을 강조하므로, 개인의 육체적 죽음, 영혼의 불멸성, 중간시대의 상태 등을 그 중심내용으로 갖고 있다. 실존신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개인적 종말론이다. 그들은 종말은 시각적 본질이며, 시간은 실존성을 포함하는 개체적 의식과 같은 것이므로 종말론 자체를 개인 각자의 실존적 결단과 직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김응조 목사의 종말신학은 대체적으로 일반적 종말론에 초점을 맞추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많은 신학자들에게서 일반적 종말론은 극소 평가를 받고 개인적 종말론은 극대 평가를 받느데 비교하면, 김응조는 그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3-3. 신학의 중심 사상

  이제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을 좀더 세분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3-3-1. 기독론
기독론에 대한 서술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연구 방법론을 “성서로서 이경교경법에 의하여 해명”하는 방법이라고 명시했다. 이경교경 방법론은 성서 해석학적 방법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성서로  성서를 말하게 하는 방법, 다시 말해서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이경교경 방법론은 자신이 강해작업을 통해 체득한 일종의 성서해석학 방법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독론을 그는 탄생론, 부활론, 재림론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탄생론
순육론과 신앙양성론을 성서적 근거에서 제시하면서 후자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2) 부활론
도난설(마28:13), 기절설(막16:11), 환상설(눅 24:31), 조작설(막16:13), 천사설(마16:5), 신비설(막16:13) 등의 이론을 기독교중심교리에 대한 불신의 결과로 단정하며, 성서에 근거하여 예수의 부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후구원설을 비성서적이라고 이단시 한다.

3) 재림론
그는 예수의 재림을 역사적 사실로 확신하며, 성서의 전거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재림론 가운데 항림설(마28:20), 성신강림설(16:28), 예루살렘 멸망설(마24:15), 무재림설(벧후 3:4), 영적해석 등을 비성서적이고 거짓된 재림론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예수의 재림은 성서의 중심(히 10:37)이며, 성도의 산 소망(고전 15:52)일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의 대망(롬8:19)이고, 시대의 요구(벧전 4:7)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의 재림은 하나님의 예정(마24:36)이며, 멸망의 선언(요일 5:8)이고, 심판의 선언 (약5:9)일 뿐만 아니라 승천시 약속(행 1:11)이기 때문에 분명히 실현된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의 공약(계22:20)이며 예수가 제자들과 맺은 굳은 언약(요14:3)이란 점에서 공약된 확실한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성도는 마땅히 깨어야 하겠다”라고 경고하면서 시대성에 파묻혀 사는 인간에 대한 충고로 종말의 대망을 가지라고 역설한다.

3-3-2 종말론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이처럼 제자들의 종말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김응조는 종말론을 시대적 징조와 관련해서 서술하면서, 시대성을 종말의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다음의 9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재난시대
  이것에 대한 해석의 근거를 마태복음 24장 7절에서 제시하면서 , 20세기의 양대 세계대전과 천재지면 및 3차 대전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을,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대립 등을 재난시대의 종말적 징조로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재난의 징조를 점점더 그 빈도와 강도가 더해 간을 볼 수 있다.

2) 반종교운동
  정치적인 기독교 박해와 무신론적인 사상으로 대표되는 유물론, 공산주의, 무신론 등의 시대정신과 사상을 가리켜 종말의 징조를 말한다. 최근의 옴진리교 사건이나 국내에서도 반기독교적인 종교운동은 그 심도가 더해가고 있다.

3) 위선지시대
  마태복음 24장 24절에 근거하여 주장한다. 그는 거짓선지자는 “유사종교의 탈을 쓰고 신비주의와 미신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무서운 거짓 선지자는 교회안에 숨어서 신학자와 교수의 탈을 쓰고 소위 자유신학, 신신학, 현대주의 신학이라는 명칭하에 성경의 이적기사를 부인하고 성경을 과학으로 해석하며 성경유오설과 목적영감설등으로 성경의 권위를 박탈한다”고 위선지시대의 종말 상황을 말하고 있다. 바로 지금 이때야말로 실증주의 신학시대라는 점에서 그는 종말의 징조가 보인다고 강변하고 있다.

4) 불법의 시대
  그가 진술하는 불법의 시대란 인간의 행위가 간악해지고 양심이 마비되어 인간의 탈을 쓰고도 짐승같은 행위를 자행하는 시대를 말한다. 그는 이 시대의 징조를 가리켜 종말의 예표로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종말징조의 하나라고 한다.
  형제가 형제를 자식이 아비를 아비가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패륜 행위가 동방예의 지국이라고 불리던 효(孝)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까지 예사롭게 벌어지고 있음을 볼 때 오늘날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불법의 시대인 것이 분명하다.

5) 복음전파의 만기
  그는 복음전파의 만기를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라는 성서구절에 근거하여 주장한다. 그의 종말론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 전파가 거의 끝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6) 무화과 시대
  예언이 성취된 시대로서 이 세대를 보고 있는 그는 지금이야말로 예수의 재림 때라고 매우 다급하게 역설한다.

7) 교통과 지식증진시대
  그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라는 성경의 말씀을 오늘날의 과학문명에 결부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는 철저치 현대성을 종말시대의 징조로 직결하여 해석하고 있다. 오늘날의 과학 시대를 그는 궤뚫고 있다고 볼 수 있다.

8) 노아와 롯의 시대
  오늘의 시대상황을 노아시대의 유물주의와 향략주의에 비추어 보면서 오늘의 인간의 삶을 종말전야로 설명했다. 그리고 롯의 시대는 멸망 직전 음란과 성도덕의 타락으로 상징되는데, 우리는 시대, 20세기의 현실이 노아와 롯의 시대징조와 같다는 점에서 시대정신의 종말을 말하고 있다.

9) 철의 진흙시대
  종말의 징조로서 김응조 목사는 공산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의 융합이 정치이념적 특질 때문에 불가능한 점을 제시하며, 종말은 바로 이러한 징조를 보아도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그 근거로서 “피차에 합하지 못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라”(단 2:43)라는 성서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며, 그의 종말론을 마무리하고 있다. “2500년 전 다니엘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므로 성서예언의 정확성을 믿을 수 있다”는 결론이 그의 신념이다.

3-3-3 천년왕국설
  천년왕국설은 전천년설과 후천년설로 대별되지만, 그는 전천년설을 신봉하고 있다. 그것은 그 스스로 전천년설이 후천년설보다 더 성서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전천년설은  ① 생사자를 심판하려 오심(딤후4:1),  ② 천년간 왕노릇하러 오심(계5:10),  ③ 신부(신자)를 영접하러 오심(계19:7)에 근거한다. “이상 세가지 사실은 천년전에 될 이로서 예수 자신이 아니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성도의 휴거, 공중혼인,  7년간 공중에서 심판, 7년간 지상에서 심판, 적그리스도를 유황불에 던짐, 성도의 부활, 천년동안 주님의 지상통치(계5:10)가 실현된다. 이러한 내용으로 그의 전천년설은 이론화되어 있다.
  그는 철저한 요한 계시록파라 불리워질 수 있을 만큼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사실을 바로 지금 이곳의 인간적 역사와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그리고 나타날 징조로 해석하고 믿었다.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니”(계20:4) 그때를 위하여 참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강론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신학과 사상 전부였다. 이것은 그대로 성결교 신학의 종말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4. 맺는말

  지금까지 우리는 김응조 목사의 신학과 사상을 그의 신학의 특색을 제시하며 살펴보았으며, 종말론, 천년왕국설을 그의 서술에 기초하여 분석하면서 살펴보았다.

  이에 따르면 그의 신학은 철저한 성서주의에 위치하고 있는 보수정통주의 신학이며, 바울의 신학과 베드로의 신학과 요한의 신학을 융합한 종합신학이다. 그는 항상 종말의식에 긴박하게 얽매여 살았으며, 그의 신학의 핵심은 계시록을 중심으로 구조된 종말론이었다.

  다음으로 그의 신학은 주관주의가 강조되는 신학이다.  그는 신학을 이론으로나 이지로 만들어가는 학문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며, 믿음으로 수용하며, 행위로 실천하는 생동적인 원리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신학이 이론화되었을 때 풍기는 학문성자체를 비판하고 오히려 성서의 본래적 논지를 해석하는데 그의 학문하는 태도를 두었다. 이것을 그는 성서로 성서를 배우고 가르치는 방법으로 삼았다. 그가 성서주해에 일생을 헌신한 것도 바로 이런 의지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신학은 이론 정립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불필요한 이론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믿음 안에서 성경의 권위에 입각해서 신앙 지상주의를 외쳤다. 성결교단의 핵심교리인 4중 복음을 기초로 그의 모든 사상과 신학은 종말론에 집중되어 있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철저하다.

  결국 그의 신학은 신앙 실천에 따른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성경적 종말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학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힘이 있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호소력이 강한 그의 말 그대로 순수한 복음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새로운 신학들이 범람하는 다원화 시대에 살면서도 자꾸만 푯대를 잃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성경에 입각한 그의 순수 복음 정신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비록 가끔 범신론이나 만유재신론적 사고나 성결교 교리가 된 전천년설 등의 해석에 있어 신학적 미숙함이 여러 부분 눈에 띠기는 한다. 하지만 그가 학문으로서의 신학 여정은 겨우 2년여에 불과(<나는 기도해서 모든 것을 얻었다> 참조)한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영적 통찰력을 지닌 인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5. 김응조 목사의 주요 저서 목록
<실천신학 목회학>(1937)
<성서 아동 설교집>(1937)
<모범 설교 500제>(1937)
<부인 설교집>(1939)
<다니엘서 강해>(1953)
<말세와 예수재림>(1954)
<사막의 생수>(1954)
<설교예제 5백 문제>(1955)
<기독전>(1956)
<바울전>(1956)
<성서 절기 설교>(1959)
<구약 성서 대강해 제 3권>(1959,1960)
<          //            >(1961,1962)
<하늘의 만나>(1967)
<하나님의 장막>(1968)
<기독교 2천년사>(1968)
<황야의 과객>(1968)
<성서난해구 해석>(1968)
<신구약 성서 답안>(1968)
<성서적 정통 신학>(1969)
<구약 역사 철학>(1970)
<하늘의 매일 메세지>(1971)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1971)-기도 응답에 대한 일종의 간증문
<성서 대강해 12권>(1981-1982)
<은총 90>(1983)-자서전
<사중복음-교리>(1985)
<생수를 주리라>(1988)-설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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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