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적 차원
생명신학은 먼저 종교적 차원에 있어 영성운동과 종교적 다원주의라는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성”(spirituality)은 21세기 범 기독교안의 핵심적인 화두(話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이라는 용어는 정확하게 정의되지를 않는다. “영성”이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영성”이라는 말보다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경건”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영성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은 21세기가 “영성”이라는 용어의 전성시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명신학자”들은 주장한다. 생명신학은 “영성을 소유했느냐 안 했으냐”의 문제보다 “어떤 종류의 영성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개혁신학의 영성은 (1) 인간이 "Imago Dei"로서 영적 존재이며 (2) 영적 존재라는 의미는 전인(全人)을 말하고 (3) 인간은 이 영성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할 수도 있고 무관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고 전제(前提)한다. 이같은 전제 아래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1) 하나님과의 화목 가운데 인격적인 교제 (2) 성령의 인도 (3) 말씀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4) 하나님의 영광으로서의 창조세계의 청지기 역할 자각 (5) 이를 수행할 능력으로서의 기도와 “영적 독서”(Lectio Divina)에서 생명신학의 영성운동을 찾으려 한다.
두 번째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교다원주의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복음의 본질 안에 있는 기독교의 배타적 성격을 인정하되 타종교와의 지혜로운 접근을 표방한다. 타종교가 지니는 그릇된 가르침과 타락 이후 인간이 추구하는 “본성의 빛”을 찾으려는 일반 계시적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고, 타종교와 충돌을 피하며 타종교인들도 전도해야 하며, 다른 종교와 연합하여 사회활동을 할 때에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2) 윤리적 차원
윤리적 차원으로는 성(性)과 가정, 생명윤리 문제를 다룬다. 생명신학은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라 성과 가정을 하나님이 주신 선한 선물이요 가정의 주인은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고 선한 목적으로 주신 성과 가정이 훼손된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함을 인정하고 성경적 토대 위에서 성과 가정을 회복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
생명윤리는 20세기 들어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슈화 된 주제이다. 과학자들은 본능적으로 현상이 어떤 기능을 가지느냐(what it does)에 관심을 가진다. 그 존재의 의미(what it is)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존재의 의미는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생명의 기능적 측면을 관찰하면서 번식(reproduction)과 성장(growth)과 반응(reaction)과 신진 대사(新進 代射; metabolism)로 생명이 기능함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것이 생명의 본질은 될 수 없다. 과학의 발달이 속도를 더하면서 생물학자들은 생물의 존재의 의미까지 파고들 시간적 여유는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생물학자들의 영역의 밖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생명과학자들은 생명의 본질 보다는 생명의 최소 단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유전자의 정체성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체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하나 그 생명 단위의 조작이 가능해졌다. 심지어 인공 수정(Artificial Insemination, AID)과 시험관 수정(In Vitro Firtilization, IVF)까지 가능해지면서 생명 탄생에 대한 정의는 혼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성서 해석의 범위를 넘어 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까지 뛰어넘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생명이란 본질적으로 항성과 행성 사이의 높은 온도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자유 에너지의 흐름을 정교하게 활용하여 높은 동적 에너지를 구현해 나가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럴 경우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의 기준을 넘어 무생물의 영역까지 에너지의 교환만 있다면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불안정한 에너지 구조를 만든 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연이냐 섭리냐의 문제가 대두된다.
학자들이 생명의 본질 문제에 대해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도 생명과학은 눈부시게 앞으로 나아갔다. 유전자 구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축적 되면서 생명 공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술적 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명 공학의 많은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기독교의 창조론적 윤리는 무신론과 우연론에 기초한 진화론적 윤리에 비해 전혀 다른 체계를 갖는다. 생명윤리의 기독교적 가치는 그 기본틀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첫째, 무신론의 진화론적 윤리가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윤리임에 대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윤리적 체계의 시작을 창조주 하나님께 둔다. 그러므로 창조론적 윤리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윤리 체계의 근원으로 본다.
둘째, 무신론의 진화론적 윤리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도덕의 가치도 만들어왔다고 보는데 반해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물질의 창조는 선하다는데서 출발한다(창 1장). 창세기의 기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기록함으로 창조론적 윤리와 가치의 규범의 틀을 제공한다. 특별히 피조물 가운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가장 좋은 것으로 일컬어진다.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선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간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
진화의 투쟁과 적자생존은 아무래도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이란 다분히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권위를 외면하고 컨텍스트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고통에 대해 깊이 연구한 손봉호 박사는 과잉 쾌락은 불필요한 고통을 요구하고 그 고통이 반드시 그 쾌락을 누리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과소비가 환경을 오염 시키게 되면 누군가가 그 때문에 병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절제는 자원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윤리적 행위의 기본이다. 여기서 조그마한 절제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을 조금이나마 정의롭게 바꿀 수 있음을 내다보았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진화 윤리학에서는 과잉 쾌락이 가져다주는 불필요한 이웃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자원해서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절제의 미학은 전혀 있을 수 없다.
셋째, 진화론적 윤리학이 윤리적 가치의 발달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나타난다(시 19:1-6).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라고 하였다. 창조는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낸다. 자연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요 구현(具顯)이다. 진화론자들이나 진화 윤리학자들이 진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한 지평 아래에서 해석을 시도한 경우는 전혀 없다.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게 맡겨진 인류에게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있겠는가!
넷째 진화론적 윤리학이 인간이 역동적으로 필요한 윤리를 채택해왔다고 보는데 비해 창조론적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타락과 범죄로 파괴되어버린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다분히 상황적인데 비하여 창조론적 윤리학은 절대적이다. 그 절대적인 윤리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창조론적 윤리는 그 회복된 양심의 기준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찾는다(요 1:14).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과학과 기술을 지구에서 인간과 환경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성서 전통이 모든 창조물들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에 관심을 갖는 윤리에 크게 공헌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과학 사회학 발전의 초창기(1930-1940년 대) 과학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여 과학사회학의 선구자가 된 로버트 머튼(R. K. Merton)은 과학자 사회의 에토스(ethos)가 보편주의(universalism), 집합주의(communism), 무사무욕(disinterestedness), 조직화 된 회의주의(organized scepticism)의 네 가지 규범(norms)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학자 사회의 에토스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의 그것과 같은 것이므로 과학은 민주 사회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며 과학자 사회의 에토스를 민주주의 사회의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머튼의 규범은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된 연구를 걸러낼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면에서 다분히 윤리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상이 될 수는 있으나 실제 과학자 사회의 규범이라고 볼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생기는 동시에 과학자 사회의 에토스가 반드시 사회적 윤리와 합치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적 산물에 대한 윤리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즉 과학의 성과에 윤리적 충돌의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은 과학 기술의 발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에 대한 논쟁이 거듭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같은 기본틀 아래 생명신학은 생명윤리의 문제들의 해답과 원칙이 오직 성경에 있다고 보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임을 천명한다. 이를 위해 (1)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며 (2) 숨 가쁘게 발전하는 의료기술의 실태에 대해 바른 진단과 파악이 필요하며 (3) 바른 적용을 위한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4) 성경적 생명윤리를 세상 속에 확장하며 (5) 영적 민감성 속에서 안락사, 낙태, 배아복제 등과 같은 당면한 생명윤리 현안들을 성경에 근거를 둔 이론을 제시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생명신학은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들을 파하는 작업을 지속해야 한다.<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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