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해석/신학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요일 4:8; 아 8:8-12)

728x90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요일 4:8; 아 8:8-12)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 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가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 8-14)

오스트리아 빈 자연사박물관©조덕영

 

1) 구약의 하나님: 노골적으로 약자를 편드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의 약자 사랑!

2) 우연주의 진화론: <예수와 다윈의 동행>(신재식 교수 저)이 불가한 이유! 적자생존, 자연도태의 진화론! 신재식 교수-대부분 내 책에 동의, 오직 조덕영 박사 한 사람만 내 책 비판!

3) 정교한 생명:

(1) 생명 전개 과정의 복잡성과 신묘막측함과 감춰진 지혜(정보): 24시간 잠자지도 쉬지도 않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매초 각 2천 개의 단백질을 만드는 각각의 세포(하루에 만드는 단백질 숫자=2000개×86,400초×100000000000000<100조개의 세포>)!! 밝혀낸 단백질 종류=2억 종류, 아미노산 51개~약 50만 개가 모인 것이 고분자화합물인 단백질). 우리 인간 몸 근육 근섬유단백질 티틴(34,350개의 아미노산)

(2)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체 내의 신묘막측한 모든 생체대사 작용! 본성이 탐욕적인 암세포는 사랑의 생체 세포 시스템이 무너진 것!

(3) 너무나 정교해서 우연 불가!

 

이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하나님이 친히 등장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기 고백서!

아가서의 결론!

사랑의 4가지 요소 소개!

 

1. 첫째 성숙이라는 사랑의 열매(8-9절)

 

사랑하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 아가서는 사랑의 열매로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한다.

 

1) 성숙! 모든 사랑이 사랑은 아니다.

성숙하지 않은 사랑은 가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반드시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숙하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열매 이후에도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래된 연륜의 성숙한 부부들을 보라! 신혼부부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풍긴다. 마치 잘 정돈된 오래된 정원처럼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품격 있는 다른 사랑이 느껴진다. 그렇게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2) 훈련: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훈련되어야 한다.

성숙은 훈련으로 된다. 훈련 없는 사랑은 미숙하거나 본능적인 사랑일 뿐이다. 미숙한 사랑도 당연히 존재한다. 또 그런 사랑도 필요하다.

기술과 예술은 절대 단시간에 숙달되지 않는다. 사랑도 그렇다. 에릭 프롬은 사랑 훈련은 기술과 예술처럼 사람 평생에 있어 필요한 훈련이라 했다. ‘사랑 학교’에 입교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 ‘사랑 훈련’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도 숙련되어 간다.

 

3)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시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있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타락 이후 온전치 못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비로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 시작되기 시작하며(성화 과정) 삶 속의 훈련에 따라 성숙의 길로 나아간다. 성숙한 자는 반드시 이런 열매를 예비한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결혼이라는 성숙 앞에 준비를 하고 있다.

 

2. 둘째 기쁨이라는 사랑의 열매(10-12절)

 

1) 평안에서 오는 기쁨(10절)

사랑은 평안을 선물한다. 화평과 평안이 최고의 기쁨이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만족시킴으로 놀라운 평강을 체험한다. 그리스도를 만족시키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샬롬이다!

 

2) 부요에서 오는 기쁨(11절)

사랑은 영육 간에 부요를 추구한다. 신부 술람미 여인의 부요한 신랑 솔로몬은 최고 신랑감이었다. 술람미 여인은 그 기쁨을 노래한다.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자도 술람미 여인처럼 놀랍고 신비한 부요함을 체험하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부요함을 아는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아직도 그 만족감이 없는가?

 

3) 나눔에서 오는 기쁨(12절)

(1) 여러분 혹시 과수원 집 주인 자녀들을 부러워해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사과의 고장 충주의 과수원 집 아들이었다. 내 고향 예성에는 과수원 집 자녀들이 많았다. 과수원에는 자두, 딸기, 땅콩, 살구, 복숭아, 배, 사과가 그득하였다. 가을이 되면 수확한 과일들이 작은 산처럼 넘쳐났다. 여름날 온 땀을 흘리며 수고한 열매였다. 농사꾼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빨간 사과가 산처럼 쌓인 그득한 과일 풍경을 본 적이 있는가. ‘사과를 따고 나서’라는 아름다운 프로스트의 시를 보면 수 천, 수 만 개의 과일을 만지면서 노력과 노동과 땀의 현실이 꿈속에서 재현되고 휴식은 보상된 꿈으로 다가오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다. 그 시절 수확을 앞둔 가을 어느 날, 과일이 먹고 싶으면 그저 과수원 근처를 지나가며 ‘수고한다’고 덕담 한 마디하면 그만이었다. 모든 과일을 맛보는 것은 공짜였다. 그렇게 고향 충주의 가을은 사과 열매 향기로 넘쳐났다. 지금도 고향 예성(충주의 옛 이름)과 청계천 가로수는 충주의 사과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그 가로수 사과나무 열매들은 가을이 되면 수확하여 나눔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유치환의 시처럼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보다 더 행복’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사랑하는 것은 즐겁지만 사랑을 받는 것은 즐겁지 않다고 했다. 과일 나누어주는 주인이 지나가는 나그네보다 더 행복했다. 땀으로 수고한 열매들을 이웃과 나눌 수 있고 그 열매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과수원을 소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일까? 술람미 여인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포도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이 있으니 그곳에는 사랑으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났다.

 

(2) 창조주 하나님도 가진 것을 나누려고 세상을 지으시고 이 땅에 친히 오셨다.

친히 십자가 지러 오셨다. 모든 사람은 이 땅에 와 살려고 발버둥 치나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는 이 땅 고난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죽으러 오셨다. 그렇게 자기 생명을 나누러 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는 세상 과수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천국 포도원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머무르지 않고 사랑의 성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사랑 안에서 참된 사랑의 기쁨을 누일 수 있다! 예화) 김명혁 목사님의 나누어주는 작은 교회를 향한 사랑!

사랑은 정말 강렬하다. 그런데 그 사랑은 강렬하면서도 종말론적이다. 종말처럼 강렬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사랑이 그와 같다. 죽음처럼 강하다(6절). 그 뜨겁고 강렬한 종말적 사랑이 이긴다! 아가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지막 종말론적 사랑의 모습을 신랑과 신부의 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3. 사랑 그 소통

 

1) 사랑은 소통이다-사랑은 듣고 싶어 한다(신랑의 노래)

 

신랑은 신부의 소리, 신부에 대해 영원히 듣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해 늘 듣고 싶어 한다. 친구들도 사랑의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 한다. 지극한 사랑은 이렇게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흥미거리이다. 친구들이 그 사랑의 노래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고 찬양하며 사랑에 관한 한 영원한 팔불출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 영원한 사랑이다. 예화) 스마트폰 문자를 수시로 넣는 외손주(할아버지 이 한자들 좀 알려주세요^^ ”悟空小狹“)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듣고 싶어 하고 하나님께 들려주고 싶어 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 사랑을 듣고 싶어 한다. 기도하라! 부모가 자녀의 소리를 듣고 싶듯 창조주 하나님도 우리들에게서 음성을 듣고 싶어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자녀)의 소리를 듣고 싶고 사랑의 울림을 들려주고 싶어 한다. 기도와 찬송, 예배와 설교가 모두 듣고 들려주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영원히 듣고 싶고, 영원히 들려주고 싶은 그 울림을 따라 종말적 영원으로 나아간다.

 

2) 소통하는 사랑은 늘 만나기를 갈망한다(신부의 노래)

(1) 만남이 부담스러우면 사랑이 아니다.

사람은 늘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를 갈망한다. 부모는 자식을 늘 갈망한다. 외국으로 떠난 딸, 선생님이 되겠다고 지방으로 내려간 딸, 수영도 잘 못하면서 해군을 가 서해 최전방 전투함을 타던 아들, 모두가 보고 싶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실 헤어진 자녀를 다시 만나고 싶은 안타까운 갈망은 부모가 되어 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사랑의 감정은 타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2) 진정한 사랑 알기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을 알고 타인을 사랑하려면 그 갈망이 너무 강하다면 신부처럼, 수녀처럼 살지 말라! 결혼하라! 부모가 되어 보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 사랑도 그렇게 알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어찌하랴!

 

3) 하나님 사랑은 소통을 위한 종말적 영원한 갈망(영원한 짝사랑)이다

 

1) 사랑이 맺어지려면 간단하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짜릿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2) 하지만 이상하다.

세상의 짜릿한 사랑은 마음껏 즐기면서 하나님과는 별거하고픈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누구 때문인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 사단이다! 하지만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 본체가 사랑이다.

 

4. 승리! 사랑이 결국 이긴다!

 

1) 사랑이 이긴다!

창조주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 누가 우리를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호 1장 23-2장 1절/14장 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겠다’ 했다. 그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2) 여기 성경의 결론을 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거져주셨다’(엡 1:4)! 죄와 고통은 인간이 저지르고 예수는 그것을 짊어지신다.

 

3) 사랑의 승리: 죄와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시는 이 역설적 십자가 승리!

죄와 고통까지 녹이는 그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오묘한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 복된 죄악이여’(O! felix culpa!)라고 고백한 어거스틴의 절창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많은 예수의 사람들이 영광의 예루살렘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불 성곽’을 느끼고 바라보며 십자가 성문 밖으로 나아갔다.

이 비밀한 사랑을 알아야 사랑은 완성된다! 성도는 주님과 교회와 천국을 갈망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갈망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자녀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랑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4) 여러분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랑을 보라!

노루가 향기로운 산에서 뛰놀 듯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 나라(향기로운 산)로 영원히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랑을 보라!

 

남녀 사랑 강렬하다. 부모와 자녀의 사랑도 강렬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와 자식, 연인 간 사랑보다 강렬하다. 그 사랑의 본질이 다르다! 하나님이 바로 생명, 부모와 자녀와 남자와 여자, 모든 만물을 만드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여! 모두 모두 그 사랑으로 나아오라! 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보라! 사랑은 모든 것의 결론이요 결국 사랑이 이긴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사랑이기에(끝)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