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조직신학

초대교회 삼위일체론 형성 과정(삼위일체론 강좌 3)

728x90

초대교회 교부들의 삼위일체론과 공의회 결의

(삼위일체론 강좌 3, 조덕영)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입니다.

그래서 약 1600여년 동안 40명 내외의 저자들을 택하여

하나님은 성경을 완성하셨습니다.

교리도 성경과 마찬가지의 경로를

거쳤습니다.

본 강좌는

신학의 여명기인 초기 교부들 가운데

삼위일체론 형성에 공헌한

몇몇 교부들을 다룹니다.

사도들과 직접 접촉했던 속사도교부들에게서

특별한 기독교 사상이나 교리적 완성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후 일부 기독교 변증가와 교부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봅니다.

1. 아테나고라스(Athēnagoras, 생몰 미상)

 

1) 기독교 변증가

2) 2세기 중반 그리스의 기독교 철학자. 160년경 기독교로 개종(改宗)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종교 학교에서 배움.

3) 《기독교 변호론(176년경)》

4) 177년경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와 그 아들 콘모도스에게 보낸 『그리스도인을 위한 사절』은 당시 기독교인의 인육(人肉) 먹는 것, 근친상간 등의 오해에 대한 반박

5) 삼위일체론을 논증한 최초의 변증가

(1) '로고스'는 태초의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 계셨고, 그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를 통하여 만물이 그 형상과 질서를 갖게 되었다.

(2) 아버지와 아들의 일체성: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또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음

(3) 성령과 아버지와의 일체성(unity)-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광채?

(4)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fellowship)

(5) 삼위의 분별과 그 일체성

이레네우스의 스승 폴리캅 기념교회 내부

2. 이레네우스(130-200):

1) 이레네우스는 누구인가

(1) 헬라파 신학자, 소아시아 출신으로 서머나 감독 폴리캅 제자, 프랑스 남부로 가 주후 177년 리용의 감독, 2세기 가장 탁월한 신학자

(2) 최초 조직신학자 칭호,

(2) 영지주의 반대<Against Heresies>, <Proof of the Apostolic Preaching>

(3)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

이즈미르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카디페칼레 성문.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은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캅dl 카디페칼레 성채 인근 스타디움에서 처형되었다 전하고있다.

2) 영지주의와의 투쟁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삼위일체론 전개

"교회는 유일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선지자들을 통항 사랑하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강림, 처녀 탄생, 고난 죽음에서 부활을 선포하신 성령을 믿습니다."

최초 조직신학자로 불리는 이레네우스는 자신의 스승 폴리캅이 서머나 12번째 순교자라 전하고있다. 86세의 이 순교자는 감독으로는 최초였다. 그는 기꺼이 화형을 당한다.

 

3) 이레니우스의 삼위일체론적 중재론

(1) 이레니우스는 기독교적 구원 개념을 적절한 창조 신학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름 아래 묶어질 수 있는 그러한 이단들의 형태를 통해 그 자신 직면하게 된 위기 가운데 창조론에 관한 그의 위대한 공헌. 영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는 구원을 성육신의 결과로 보았다.

(2) 콜린 건톤이 본 이레니우스의 관심사 두 가지

첫째, 물질을 포함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다.

두 번째, 이레니우스의 창조 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이레니우스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에 대한 확신.

이레니우스는 무로부터 창조 교리를 가르친 첫 번째 사람은 아니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Theophilus of Antioch)나 다른 사람들이 이레니우스보다 먼저 그런 주장(Gerald May)을 함.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무로부터 창조를 철저하게 주장. “정말이지 사람은 무로부터 어떤 것을 만들 수 없고 단지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부터만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있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시다. 하나님 자신은 창조의 실체를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존재하게 하셨다” (Against the Heresies, 2.10.4).

(3) 콜린 건톤이 본 이레네우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창조론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그 형성에 있어 거의 삼위일체론적이지 않은 창조론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있어왔는데 그 상세한 부분에 있어서 창조론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훼손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측면이 결정적이다.

첫째, 삼위일체론적인 모체(matrix)가 이레니우스로 하여금 중재의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레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두 손인 성자와 성령을 통해 창조하셨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이레니우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아닌 존재들과 관계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번째 측면은 동일한 실체의 다른 면, 즉 피조된 우주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자유를 드러내준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을 통해 창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그 자신과 세계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의 신들이나 신플라톤주의의 일자와 다르다.

즉 성부와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두 손을 통해 창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존재의 등급(degrees of being)이라고 하는 헬라적인 교리를 극복한 중재의 신학이다. 성자와 성령이 신적인 것과 피조 세계 사이를 중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중간적인 존재가 있을 필요가 없다.

(4)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다른 것, 즉 피조된 질서라고 하는 단지 두 가지 존재의 등급만이 존재한다는 고전적 기독교 존재론이 여기에서 역사 속에 등장한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진실로 실재적이다. 하지만 창조는 계속해서 자신의 ‘두 손으로’ 붙들고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실재적일 수 있을 뿐이다.

고난과 시련이 많았던 초대 서머나교회는 빌라델피아교회와 더불어 책망이 없던 교회였다.

(5) 따라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자유와 모든 만들어진 것들의 선함의 확증이라 하는 이 양자를 함께 주장할 수 있었다. 다음의 본문은 이 두 가지 주제를 함께 보여준다.

(6) "우리를 만드시거나 우리를 형성하신 분은... 천사들이 아니었다.... 주님의 로고스 이외의 그 어떤 누구나 만물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어떤 능력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 자신의 손을 소유하지 않으신 것처럼... 이들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 그들 안에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만물을 만드신 말씀과 지혜, 성자와 성령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4.20.1).

(7) 결국 이레니우스에게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확립할 수 있는 확신과 이유를 부여해준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총괄갱신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는 창조와 구속의 경륜은 모든 피조된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드러내준다.

3. 터툴리안(160-225):

1) 라틴 신학자

2) 삼위일체 교리에 공헌한 세 사람(터툴리안, 어거스틴, 칼빈-벤저민 워필드)

3) "프락세아스 논박"(Adversus Praxean, 213년 경)을 통해 성부수난설(일종의 양태론) 비판하면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전개

4)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김석환 교수>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satisfactio) 등은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Hand me the master!”, 터툴리안을 따른 키프리안).

 

4.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185-254):

1) 삼위일체 교리에 공헌, 하지만 성자종속절(Subordinationism)의 오류.

2) 오리겐이 본 창조주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1)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세상이나 인간이나 물질과 어떻게 다른가? 오리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비육체적 존재임을 세 번이나 강조한다. 육체는 피조물의 특성을 반영하는 단어다.

(2) 오리겐은 하나님을 육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소개한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빛이라 했다고 하나님을 이 세상 태양 빛이라 볼 수는 없다.

(3) 성령을 육체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 시대인 오늘날 성령을 마치 파워풀한 존재로 여기는 만유내재신(萬有內在神)적 성령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주로 과정신학자들이나 신사도운동가,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을 파워 에너지나 불처럼 여겨 안수 행위로 신자들을 쓰러뜨리거나 ‘불 받으라’는 식으로 인격적 하나님이신 성령을 도구화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4) 오리겐 시대만도 못한 미숙한 성경 해석이 여전히 통용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오리겐은 오히려 하나님을 어떤 육체라거나 육체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분은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덧붙일 수 없는 단순한 지성적 본성이시다.

(5) 헬라 철학의 단어를 빌리면 그분은 전적으로 유일성(唯一性, monas), 말하자면 일성(一性, henas)인 분이다. 그렇다고 오리겐이 철학의 하나님을 믿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헬라 철학이 말하는 완전한 통일성과 절대적 불변성을 가진 순수한 정신적 본질로서 우주의 만유 너머에 존재하면서 모든 만물의 영원한 창조주는 이성적인 존재이다.

(6) 이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물질로부터 세계를 형성하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게(Demiurge)를 믿는 헬라 철학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었다. 신은 자신의 뜻대로 우주를 존재하게 하였고 우주의 본성을 작정하고 만든 것이다.

창조에 대한 오리겐의 기독론적 접근

(1) 이 현상 세계를 성부 하나님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성자 로고스(Logos)로 인한 것이다.

(2) 오리겐은 창세기 1장 강해부터 창조의 기독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이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 11:27).

(3) 이 성자 하나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장자로 ‘지혜’와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한 분이시다(ft. 잠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힘이시며 지혜”(고전 1:24)라 했다.

(4) “하나님의 지혜”를 실체가 없는 존재로 여기면 안 된다. 오리겐은 요한복음 주해를 통해 오늘날 이단으로 정죄된 양태론을 부정하고 있다. 성자는 말씀이며 성부의 모상이다. 이 제 2위의 신이 물질세계를 존재하게 한 창조에 관여한 신의 아들이었다(요 1:3). 그 분이 또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다.

성령에 대한 오리겐의 낯선 해석

(1) 오리겐은 성령께서 로고스로 말미암아(through) 지은바 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성령을 아들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

(2) 오리겐이 분명 세 위격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성부가 성자보다 뛰어나고 성자는 성령보다 뛰어나다고 본 것은 삼위일체에 “위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정통 교리와 벗어난 낯선 주장인 것이다.

(3)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나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개념은 정통 교리가 아니다. 일종의 층위를 나눈 삼위일체론은 일종의 ‘종속설(Subordinationism)’ 이 되어버리게 된다. 이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층위를 종속적 관계로 구분한 것은 공교회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4) 오히려 기독론에 있어 아리우스(Arius)의 유사본질(類似本質)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주석』(Commentary on Hwbrew)을 통해 동일본질(homoousios)의 교리를 발전시킨 오리겐이 종속설(surbodination)로 귀착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하지만 오리겐은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 성령은 성화의 은총을 베푸신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즉 거룩한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서 은혜를 받을 가치 있는 자들에게 향한다.

(6)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은혜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한다. 오리겐이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보는 군주신론이나 양태론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한 세 본체(位格, hypostases) 혹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7)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속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오리겐이 신학의 한계를 보여준 인물임은 분명하다.

성경 해석에 있어 여전히 부족한 인간의 한계성

(1)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 하지만 창조 해석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난제와 다양한 해석들이 현실 속에서 충돌하고 있다.

(2)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사는 우리 인간의 생태적 한계 속에서 초대 교회는 당연히 지금의 우리들처럼 성경 속 선지자들이나 특별 계시의 전달자요 성경 저자로서의 사도들과 달리 그 어느 누구도 성경 계시의 해석자로서의 완벽한 인물은 없었다.

(3) 계시는 무오하나 초대 교회의 성경 해석자는 드물었고 그들 학자들은 초대 교회의 역사적 공간 속에서 미숙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4) 오리겐에게서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과는 달리 그런 계시의 해석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확인하게 된다.

(5) 21세기 우리들은 과연 얼마나 바른 성경 해석을 하고 있을까? 과연 교회와 신자들은 성경에 대해 얼마나 바르게 알고 있을까? 첨단 과학 기술 시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창조론의 일치점을 찾기는커녕 일치된 교리보다 충돌하는 영역이 여전히 적지 않음은 무슨 이유일까?

(6)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도 중요하나 인간이 많은 부분에서 보다 더 겸손해질 이유를 묵시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창조론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렇다!

5. 아타나시우스(296년 경-373):

1) 아리우스를 정죄한 알렉산드리아 감독(312년 경), 알렉산드로스의 비서

2) 니케아공의회(325) 참석.

3) 비공의회 니코메디아 회의(327) 아리우스 주장 수용.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복권 반대

4) Tyros 회의(335) 아타나시우스 정죄 면직. Trier로 유배. 아타나시우스의 고난과 시련 시작(46년 주교 생활 가운데 17년 5차례 유배 생활)

5)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아리우스 논박>

호모이우시우스(아리우스)<->호모우시우스(Homoousios, 동일본질, 아타나시우스)

6) 성령의 신성 주장<성령에 관한 서신들>

7)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주신 하나님

8)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항상 피조물의 수준을 넘지 못하지만, 무조건 오류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식 방식에 자신을 적응하셨기 때문!

9) 참고: 수도원에 대한 깊은 관심, 수도원주의<안토니의 생애>

5.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

1)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 교리 확립

2) 삼위일체 교리 확립("동일본질" 확인)

=========================

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um)

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

Forma Recepta Ecclesiae Orientalis. A.D. 381

Credimus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factore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우리는 천지의 창조자이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만드신 한분의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Et in unum Dominum Jesum Christum, Filium Dei [unigenitum], natum ex Patre ante omnia saecula, Deum de Deo, [Lumen de Lumine], Deum verum de Deo vero, natum [genitum], non factum, consubstantialem Patri; per quem omni facta sunt; qui propter nos homines et [propter] salutem nostram descendit de coelis 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ine et humanatus [homo factus] est; et crucifixus est pro nobis sub Pontio Pilato [passus] et sepultus est; et resurrexit tertia die [secundum scripturas]; ascendit in coelum [coelos], sedet ad dexteram Patris; iterum venturus, cum gloria, judicare vivos et mortuos; cujus regni non erit finis.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중의 신이며 빛중의 빛이고 참 신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받아 인간이 되었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받았읍니다. 그는 고난을 받고 장사되었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읍니다. 그리고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Et in Spritum Sanctum, Dominum et vivificantem [vivificatorem], ex Patre [Filioque] procedentem, cum Patre et Filio adorandum et conglorificandum, qui locutus est per sanctos prophetas. 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 Confitemur unum baptisma in remissionem peccatorum. Expectamus resurrectionem mortuorum et vitam futuri saeculi. Amen.

우리는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 생명의 부여자와 주님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인 세계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주시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립니다. 아멘.

=======

니케아 신경 또는 니케아 신조(Symbolum Nicaenum)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는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고백한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팔레스타인 기독교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하여 '동질'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가이사랴의 교회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약 265-339)의 신경을 기준으로 공포되었다.

이 신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며, 특히 성자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며, 창조되지 않고 나시었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예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잘못된 교리에 대항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이 신경은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갈라지기 전에 함께 고백하던 신경이지만 로마 가톨릭에서는 나중에 성령이 성부로부터 뿐이 아니라 성자에게서 부터도 나오신다고 고백하게 되는데,(일명 '필리오케'라고도 한다- 본문 라틴어 참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동서교회가 분열하게된 시발로 본다.

동방교회의 입장은 '햇갈리지 않게 애초부터 정한대로 하자'는 것이고, 로마 가톨릭 입장은 교리에 걸맞는 고백을 하자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미사때 니케아 신경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되 사도신경으로 대체할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감사성찬례시 니케아 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며, 사도신경은 만도(저녁기도)에 사용한다.

정통 교회는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 그리고 사도 신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이단과 사이비 문제로 늘 시끄러운 한국 교회는 교회 전통의 성령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 지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고전과 신앙적 전통의 중요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므로 교회의 위기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

@ 참고 사항

성경은 ‘노르마 노만스’(‘norma normans’= 규범 시켜 주는 규범, norma absoluta, norma causativa)이고 교리나 신조는 ‘노르마 노마타’(norma normata= 규범 되어 지는 규범)입니다.

즉 개혁신학에서 성경은 무오하며 교리사는 어느 정도 오류사(誤謬史)로 봅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조도 무오한 말씀에 판단 받아야 합니다.

다만 정통 개신교는 ‘노르마 노마타’를 하나님 말씀의 최종 권위에 의해 규정된 준칙으로 봅니다. 즉 정통 교리와 신조는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작성한, 성경에 일치함으로써 기독교의 보편 진리들을 훌륭히 요약하고, 하나님 말씀과 다른 이질적 교리들을 분별해내며, 교회 교육과 예배에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숙하고 노련하며 성령 충만한 이들 신앙 선배들의 이런 노고(교리와 신조의 전통)가 없었다면 교회는 바른 예배와 교육이 어려웠을 것이고 기독교는 이단 사이비들로 인해 대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