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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역사 & 세상 만사

신대륙 발견, 콜럼버스가 라틴어 주석을 메모한 세계 지리책, 이마고 문디(Imago Mundi)의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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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많은 주석을 추가한 피에르 다일리(Pierre d'Ailly)의 이마고 문디(Imago Mundi) 사본

신대륙 발견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규정하는 세 단어가 있다면 무엇일까? 필자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 욕망(탐욕), 종교라 생각한다. 누구나 호기심은 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을 현실화하는 심력과 지력과 실천적 의지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수학, 천체 항법, 조선, 라틴어를 배우고 그 시대의 위대한 기술인 지도 제작을 배우면서 다양한 첨단 기술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콜럼버스와 그의 형제 바르톨로뮤는 리스본에서 차트 제작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사업을 통해 유럽 전역의 정보와 아이디어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는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의 등장으로 책의 출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다. 대략 1500년까지 출판된 초기 인쇄 서적을 인큐나불라 incunabula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시기에 평민 출신 선원인 콜럼버스가 1만 5,000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늘날 그의 보유 장서 가운데 많은 책이 유실되고 현재 2,000권이 남아 세비야 대성당의 ‘콜럼버스 장서Biblioteca Colombina'를 구성하고 있다.

콜럼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이마고 문디Imago Mundi” 였다. 이 책은 캉브레 주교이자 추기경이며 파리에서 활동했던 신학자 피에르 다이이Pierre d’Ailly(1350~1420)가 저술한 세계지리책으로, 1480~1483년 사이에 루벵에서 출판되있다. 이 책은 단순히 세계지리 내용만 기술한 것이 아니라 천문, 점성술, 신학에 관한 내용도 포함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콜럼버스는 이 책에 무려 898개나 되는 라틴어 주석을 달았다. 특히 8장에 집중적으로 주석이 달린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이 콜럼버스의 사고 형성에 결정적인 잉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저자인 피에르 다이이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라 13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이 쓴 책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 또한 9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아랍 천문학자 Abu al Abbas Ahmad ibn Muhammad ibn Kathir al-Farghani 아흐마드 알 페르가니 (일명 Alfraganus 알프라가누스)의 책을 보고 베꼈다. 그러니까 콜럼버스의 지구관의 원류는 실상 아랍 지리학에 가서 닿게 된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중심설에서 태양중심설을 제안한 것이 아랍과학자들의 저작들 영향을 받았음을 설명하고 있는 요르단 박물관 전시물

요르단 암만의 국립고고학 박물관은 아랍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었는 지를 각종 디오라마와 전시물을 통해 보여준다. 물을 다루는 법, 수학, 물리·화학·천문학, 혈액 순환도, 의학 주석서, 약물에 대한 소개, 지도와 지리학 등 이슬람 학문은 대단히 독창적이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학문적 업적을 쌓고 있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콜럼버스는 지적 호기심이 많고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기는 하나 과학자는 아니었다. 과학자들도 늘 상 실수가 많은 데 콜럼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 번째 오류는 1도(적도에서)를 56.67마일로 계산한 것이다. 그는 또 두 번째 오류를 더했다. 그는 알 페르가니가 4,856피트의 로마 마일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했다. 실제로는 알 페르가니는 7,091피트 아랍 마일을 의미했다. 종합해 보면, 두 가지 잘못된 계산으로 인해 지구 행성의 허리 둘레가 실제 21,600 해리에서 16,305해리로 줄어들었으며 이로 25% 오류가 발생했다.

세 번째 오류는 일본의 위치에 대한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티레의 마리누스, 마르코 폴로를 자신의 일부 '수정'과 혼합한 일련의 복잡한 추론을 통해 일본이 서쪽 경도 85°(동쪽 140°가 아님)에 위치하여 8,000도 이상 이동할 것이라 계산했다. 이는 케이프 세인트 빈센트에 더 가깝다.

전체적으로 그는 인도 제도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쪽으로 68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계산된 이동 거리: 3080해리. 테네리페에서 자카르타까지의 실제 거리: 7313해리. 오차 한계는 58%에 달했다.

그는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중국과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며 포르투갈, 잉글랜드,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 제노바 정부 등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한다. 콜럼버스의 계산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과 요구를 살라망카 대학을 포함한 스페인 학자층, 그리고 정부 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스페인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후원 아래 콜럼버스는 신대륙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 투르크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인해 설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고 또한 포르투갈이 항해왕자 엔히크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따라서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내다본 것이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꽤나 많이 요구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는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 이었다.

콜럼버스의 과도한 요구와 항해의 어려움과 금광 등을 발견해야 한다는 욕망 그리고 미숙한 종교적 신념 등이 뒤엉켜 역사적 콜럼버스는 선악이 교차하는 인물로 남아있다. 인디언들의 인권이란 콜럼버스의 야망을 키우기 위해서는 사치스러운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콜럼버스에게서도 인간의 지적호기심뿐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죄성과 탐욕과 미숙한 종교관은 그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인물로 보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선출된 국회의원들도 어련할까~~

© E. S.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