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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역사

성경으로 본 우리 민족 기원(ft. 세계의 민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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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본 우리 민족 기원(ft. 세계의 민족들)- 수정본

 

스키타이와 흉노의 초원 문화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동복과 신라 금관(국립박물관)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스키타이계 유물 출토를 보도한 부산의 국제신문(맨 아래-김해박물관)

동복과 신라 금관은 초원을 달리던

스키타이와 흉노의 유물이다.

최초의 금관이 출토된 곳은

남러시아 초원의 사르마트족 묘에서 출토된 주전 2세기 금관이었다.

금관의 상징은 나무와 사슴의 녹각 그리고 새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 샤머니즘의 상징이었다.

나무는 신(태양)에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계단이었고,

사슴은 생명을 주는 신이었다. 나무에 앉은 새는 신과 인간을 오가는 전령이었다. 신라 서봉총의 금관, 흉노의 금관, 스키타이 황금 인간의 모자에서는 이 새가 빛나고 있다.

또한 동복은 초원을 달리던 흉노의 말 뒷 안장에 달린 곡식을 싣는 장비요 취사 도구였다.

이 동복은 과거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귀중한 유물이다.

동복과 신라 금관은 우리 민족이 문화적으로 한족이 아닌 스키타이와 흉노의 영향을 받았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언어적으로도 우리 민족은 한족과 전혀 다른 우랄 알타이어족인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말대로 우리 민족은 "만주, 몽골, 터키 등과 수천 년 전에는 같은 혈족"이었음이 분명하다.

단재는 조선족과 중국의 한족은 동족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현재 우리 민족 씨족들의 기원이 상당수 중국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 아닌

다문화(한성백제박물관 근초고왕편)국가요

대륙과 해양을 통해 교류한 열린 국가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과 주류는

중앙아시아 대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우리 민족은 어느 경로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을까?

보통 중국 한족은 함족 또는 셈족과 함족의 혼합 계열로 비정한다.

반면, 만주를 통해 들어온 우리 민족은 셈족이나 함족보다 스키타이와 흉노의 계열인 야벳족의 피를 물려 받았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창조신학연구소kict

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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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 성경/신학

키워드: 고조선, 노아, 셈, 함, 야벳

성경과 우리 민족

The Bible and Ancient Korean

조덕영

Duk Young CHO

창조신학연구소

Korea Institute for Creation Theology(KICT)

EMail: dycho21c@hanmail.net WebSite: www.kictnet.net

Where did ancient Korean come from? From one man he made all the nations, that they should inhabit the whole earth; and he marked out their appointed times in history and the boundaries of their lands(Acts 17:26). It fell to Noah’s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and their wives, to repopulate the Earth through the children that were born to them after the Flood. Of Noah’s grandchildren, 16 grandsons are named in Genesis chapter 10. In this paper, We will now examine ancient Korean.

I. 시작하면서

II. 우리 민족의 초기 역사

III. 성경과 우리 민족- 그 가능한 경로들

1. 우리 민족은 함족인가?

2. 우리 민족은 셈족인가?

3. 우리 민족은 야벳의 후손인가?

IV. 한반도와 주변 국가

V. 나가면서

I. 시작하면서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을까? 성경적 관점에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추적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온 인류의 구체적 행로를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작업이 가능할까? 한 가지 실마리는 있다. 성경은 인류의 모든 족속은 한 혈통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행 17:26). 즉 성경은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홍수(창 7-8장) 이후 노아의 후손에서 파생된 족속들을 열거하고 있다. 셈으로부터 26개 족속, 함으로부터 30개 족속, 야벳으로부터 14개 족속, 도합 70개 족속이 이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노아의 아들인 이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족속과 방언(方言)과 지방과 나라가 나뉘어졌으니,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列國) 백성이 나왔다고 했다(창 10: 31-32). 성경은 물론 단순한 역사서는 아니다. 계시와 신앙의 경전이다. 성경 구약 창세기는 유대교와 로마 카톨릭과 희랍 정교 그리고 개신교 세계관의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계시 종교인 이들 종교들의 출발점으로서의 창조 신앙의 근간은 창세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창조 신앙은 역사적으로도 진리라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분산을 성경만으로 설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성경이 계시의 종교요 창조 신앙을 전제하나 성경의 관심은 단순한 인류 역사를 넘어 인류 구속사(救贖史)의 여정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인류의 분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후 더는 구체적인 인류 계보에 대해 추적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인류 계보를 추적하는 데 있어 간혹 성경과 기존 세속 과학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구속사(救贖史)적 관점에서도 족보는 중요하다. 성경은 생명책이라는 구속사적 영적 족보를 제시한다. 즉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육적 족보로 시작하여 영적 족보(계 21: 27)로 끝나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성경적 진실 안에서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은 늘 공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도 이와 같이 성경이 정확무오한 진리라는 복음주의적 전제 아래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주류(主流)는 과연 어디로부터 왔을까? 반도(半島) 국가이니 당연히 바다 아니면 내륙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내륙은 작금의 중국 땅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그리고 만주 지역을 말하고 바다는 동남아 지역과 한반도에 인접한 기타 중국 땅을 말한다. 당연히 이들 지역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이를 크게 남방계와 북방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특별한 경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일부 한반도로 다시 역 이민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묻고 싶은 질문은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다. 고대 우리 민족의 주류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이다. 세속 고고학은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연구 성과들이 성경적 결론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추적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난제들을 만들어낸다. 본고는 그와 같은 난제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성경과 우리 민족을 연결하는 신앙적 다리를 놓는 초석이 되고자 하는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II 우리 민족의 초기 역사

고고학은 달리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 인류를 연구하기 위해 탄생한 학문이다. 덴마크의 톰젠(C. J. Thomsen)은 인류 역사를 사용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m)로 나누었다. 석기시대는 다시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쓰던 구석기시대와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쓰던 신석기시대로 구분한다. 1909년 프랑스 고고학자 모르강(J. D. Morgan, 1857-1924)은 구석기와 신석기 사이에 중석기시대(Mesolithic Period)를 넣기도 했다. 이들 시대 구분이 세계 각 지역의 문화 발전에 어떤 시대에 이루어졌는지는 또 다른 난제이다. 모두 제대로 된 기록문서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의 구분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시대 추적에 있어 이 같은 구분법은 일차적인 시대상을 찾아내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 고고학도 일부 이들 시대 구분법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의 고고학은 우리 한반도에 인류가 들어와 생활한 시기를 보통 구석기시대 - (중석기시대) -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초기 철기시대 -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남북조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등으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역사시대 이전의 구석기고고학 복원에는 19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한 손보기 박사(전 연세대 교수)와 그의 제자로 공주 석장리를 비롯하여 청원 두루봉, 단양 수양개(국가 사적 398호), 중원 구석기 유적 등 수많은 구석기 유적을 발굴한 이융조 박사(전 충북대 교수)의 공헌이 크다. 1974년 개편된 국사교과서에 국내 구석기 유적이 실리게 된 것도 바로 이들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가 조작한 교묘한 식민사관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구석기 유적이 없다는 자학적 판단이 소멸되게 된 것이다. 오히려 구석기유적을 조작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 자신이었다. 일본 제 1의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가 미야기(宮城) 등에서 발굴한 구석기 유적 61점은 모두 조작된 것들이었다.

구석기 시대 수렵(狩獵)과 농경을 하며 씨족과 부족을 이루어 살던 우리 민족의 원류는 소규모 부족국가(혹은 성읍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천관우(千寬宇)는 이들 부족국가보다 성읍(城邑)국가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성읍국가는 도시국가라는 개념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전개 과정을 씨족사회, 성읍국가, 영역국가, 대제국으로 전개된다고 보는 도식이다. 이것은 미야자키(宮崎市定)가 고대사회 전개과정을 세계사적 보편원리에 따라 중국역사를 씨족사회, 도시국가, 영토국가, 대제국이라는 도식에 적용시킨 데서 기인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한국사의 최초 국가 형태도 성읍국가가 될 것이다. 학문적으로 정통학자들은 성읍국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데 비해 여기서는 일반적 용어인 부족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들 부족국가들은 만주 요동을 중심으로 고조선으로 발전하였고 일부는 한반도 전역에서 부족국가를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조선이 서서히 와해되면서 고조선의 유민들은 수 차례에 걸쳐 한반도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포함된 우리 민족은 삼한을 포함한 한국적 춘추전국시대(이른바 고고학자 김원룡박사가 말한 원삼국시대)를 거쳐 다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연맹 등으로 재편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조직적 민족 고대사 말살 정책에 따라 고조선 역사가 신화로 격하되었으며 심지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초기 역사조차 불신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한국 상고사 말살을 위해 조선반도사를 새로 편찬한다는 구실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 해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제 1차 전국 서적색출을 시도하여 총 51종 20여만 권을 수거하였다. 이를 기화로 시작된 조선사편수를 위한 모임은 사이토(齋藤 實) 총독을 중심으로 일본의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한국의 이병도(李丙燾) 박사가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고대사가 식민사관으로 흐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이 같은 식민주의 사관은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제도권 사학계의 흐름을 이어온 감이 없지 않다.

국내 기독교계가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온 것도 이 같은 선입견이 일부 작용하여 왔다고 본다. 어떤 민족이든 신화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신화는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반영한다. 즉 신화와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대성(大姓)인 김해 김씨, 경주 김씨와 이씨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이씨인 경주 이씨 그리고 신라의 시조요 박씨들의 조상인 박혁거세 등이 모두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 3대 대성인 김·이·박 삼성(三姓)의 주요 씨족들이 모두 시조 탄생 설화를 가지고 시작된 것이다. 비록 탄생 설화는 신화화되었으나 그들은 분명 우리 민족 대성(大姓)들의 뿌리라는 실체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비록 이들의 개국시조들이 모두 신화화되었을지라도 분명한 민족적 실체를 가진 실체적 역사를 반영한다. 신학에서도 불트만의 비신화화(非神話化) 개념이 있으나 초월적 계시인 성경은 비신화화하면 안 되나 인류가 기술한 역사는 반드시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제 탄압의 역사 속에서 말살된 고조선 역사나 삼국의 초기 역사를 복원하는 데는 많은 학자들의 수고가 있었다. 먼저 일제 시대 고대사 복원을 위해 독립운동가요 민족학자인 박은식(朴殷植),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 민족 고조선 역사 부활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1945년 8. 15 광복 이후에는 천관우(千寬宇), 김원룡(金元龍) 박사 등을 중심으로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제도권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식민사관의 뿌리가 깊은 제도권 학계에서 제대로 된 상고사 복원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이 분야에서는 딜레탕트들과 재야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런 가운데 1980년대, 중국 고대사학 전공학자로 고대 중국문헌에 풍부하게 등장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을 시도한 윤내현(尹乃鉉) 교수의 연구는 사학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이밖에도 한국고대사를 법철학자 입장에서 접근한 학술원회원이었던 영미법철학자 최태영(崔泰永)은 송지영(전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윤태림 등과 함께 이병도 박사를 설득하여 이 박사가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임을 사실상 인정하는 논설을 게재하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이밖에도 단군에 대한 문헌고증을 시도한 이상시(李相時) 변호사, 씨성(氏性)으로 한일 민족 기원의 연관성을 밝혔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비문, 일본서기 등을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일본의 응신(應神) 천황이 비류 백제 마지막 임금이었음을 논증하며 비류(沸流) 백제(百濟)의 역사적 부활을 시도한 김성호(金聖昊)가 있다. 그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에 대해서도 임나가 지금의 경남 동부지역의 부산과 울산과 부산 동래에 존재하던 우리나라 왕국이었다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 임나는 비류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국가였다.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임나일본부를 한반도열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분국(分國)으로 보아 그 위치를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비정한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밖에도 일본 만엽집(萬葉集)이 고대 우리 한국어로 쓰여진 노래라는 것을 밝혀 충격을 준 이영희(李寧熙), 한국 상고사의 실체와 일제의 한국사 왜곡·말살 진상을 문화부 기자의 눈으로 파헤친 서희건(徐熙乾), 재야(在野)에서 일본서기 해석과 한일관계사 복원을 시도한 김인배(金仁培)·김문배(金文培) 등은, 비록 이들의 주장이 제도권 학자들로부터 일부 비판받고 있기는 하나 열악한 조건에서도 식민사관의 껍질을 깨고자 치열한 학문적 열정을 쏟은 재야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땀과 노고아래 이제 우리 한민족 역사는 고조선 역사는 모두 신화라거나 삼국 초기의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식민사관을 겨우 벗어나려는 입구에 서있다. 신화와 역사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대 바벨론 지역에서 이미 법전을 반포한 함무라비왕(주전 18C)이나 구 힛타이트 제국(주전 19C-17C), 애굽, 앗수르, 페르시아(주전 539-332) 왕국을 차치하더라도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주전 356-323)는 이미 주전 4세기 애굽과 지금의 서남아시아 전체를 장악하고 인도 서부에까지 이르는 동방 대원정에 나섰다. 구 페르시아 지역에서 장정 1 만명을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 시킬 만큼 대군사를 동원한 원정이었다. 주전 4세기 이미 세계는 이 같은 강력한 대제국이 가능할 만큼 인구와 문명이 만개하였다. 중국 대륙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순(堯舜)의 신화 시대를 지나 중국 역사는 이미 주전 21세기부터 8세기까지 하(夏, 주전 21C-16C), 은(殷 또는 商, 주전 16C-11C), 주(西周, 주전 11C-주전 8C) 시대를 열고 춘추전국시대(주전 8C-3C)를 거쳐 진(秦) 나라가 중국 대륙을 평정한 것이 주전 3 세기(주전 221)였다.

유럽과 중동과 중국의 이 같은 역사 아래서 오직 우리 한반도만 주후 3세기가 되도록 오랫동안 미개의 상태로 남아있었다고 보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고조선(古朝鮮)은 우리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만 등장하는 국가가 아니다. 이미 중국 사서(史書)인 <사기(史記)>의 조선열전, <한서(漢書)> 지리지, 가장 오래된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분명한 역사적 국가였다. 이외에도 고조선 관련 내용은 중국의<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수서(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통감> 등 여러 중요 사료에 등장하고 있다. 즉 고조선 역사에 대한 문제가 있다면 고조선의 실체가 정말 있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고조선 역사의 문제는 고조선 초기 역사를 어디까지 상향할 것인가 하는 것과 초기 고조선 신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과 그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삼국과 가야의 초기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식민사관에 천착한 제도권 역사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한반도의 역사는 고조선과 그 고조선의 뒤를 이은 다양한 씨족과 부족들의 정치적 이합집산과 동맹을 거치며 역동적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우리 민족의 주류는 역사적 실체로 엄연히 존재한 고조선과 그 뒤를 공백 기간 없이 이어 받은 다양한 정치 집단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주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 연맹체의 씨족과 언어와 문화와 사회상 속에서 그 주류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집단의 역사와 문화를 성경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의 종교요 역사의 종교인 한국의 기독교는 애석하게도 단군이 신화라는 담론에 천착하여 고조선을 백안시하려는 풍조와 복음적 해석의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게으름 속에서 지난 세기를 흘려보내버렸다. 다만 진보신학측에서 1963년 윤성범이 “단군신화는 삼위일체의 흔적이다”라는 논문을 통해 토착화신학과 단군 신화논쟁을 촉발한 적이 있다. 함석헌은 우리 민족이 기독교신앙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수천 년 동안 민중의 가슴 속에 한님(환인) 곧 ‘하느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보신학의 윤성범, 유동식, 김경재 등은 이 같은 함석헌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2003년 허호익 박사가 단군신화의 문화사적 해석과 천지인 신학을 전개한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단군신화의 전승 초기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가를 추적한 단군신화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전향적인 이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시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기독교와 한반도 관련사에 대한 고찰로는 한글의 히브리어 기원설을 주장한 조철수 박사, 사도 도마의 동아시아 선교를 다룬 정학봉 박사, 삼국시대 전래된 불교와 기독교(경교)의 관계를 다룬 임정의(林政義) 박사, 경북 영주의 분처(分處)바위와 안동 학가산(鶴駕山) 유적을 고대기독교 유적이라 주장한 유우식(兪禹植), 김해 가야를 기독교국가로 이해한 조국현 목사의 <가락국기해설>(대구말씀교회)이 있다.

기독교는 계시와 역사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임을 표방한다. 심지어 육적(창조)·영적(구속) 족보의 종교인 기독교가 역사의 진리 추적을 외면한다는 것은 수세적이고 비겁한 학문적 자세이다. 이제 성경과 우리 민족 역사의 다리를 놓는 작업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진리요 참 역사인 성경적 신앙의 초석을 놓는 작업을 시도할 때라고 본다. 진리에 바탕을 둔 바른 해석만이 복음 전파에 있어 참된 힘과 참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III. 성경과 우리 민족- 그 가능한 경로들

노아의 후손들은 어디로 갔으며 우리 민족의 조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성경은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세 아들의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다. 그리고 그 세 아들은 모두 16명의 아들을 낳았다. 대체로 성경을 살펴보면 노아가 머물던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노아 16 후손들의 진출로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경적 근거는 역사적 증거와 많은 부분에서 유연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좀 더 깊이 추적해보아야 하는 부분들도 많이 있고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영원히 추적 불가능한 부분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궤적을 추적해 보는 것은 인류의 기원과 타락과 구속의 여정을 보여주는 계시일 뿐 아니라 인류 최고 역사서이기도 한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는 강력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어떤 경로를 거쳐 한반도까지 들어온 것일까? 많은 학자들이 역사적, 고고학적, 문화적, 문헌적, 언어적 추적을 해왔다. 하지만 성경적 추적이 아닌 세속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접근했을 뿐이다.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 아닌 일찍부터 많은 이방인들과 선진 문명을 수용한 다문화 국가였다. 여기서는 성경적, 역사적, 고고학적, 문화적, 문헌적, 언어적, 지리적 경로를 추적하여 성경과 우리 민족 주류의 기원을 살펴보려 한다.

1. 우리 민족은 함족인가?

노아의 아들 중 함은 두 번째로 소개된 아들이었다. 함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을 낳았다. 함의 장남 구스의 후손들은 스바(세바, Seba)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십드가였다. 스바는 남서부 아라비아에서 홍해를 건너 지금의 수단 지역으로 들어가 스바족이 되었다(시 72:10; 사 43:3; 사 45:14).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십드가도 모두 아라비아와 관련되어있다. 여기서 하윌라는 셈족 욕단의 아들 하윌라와는 다른 인물이다(창 10:29; 대상 1:23). 삽다는 아라비아 고대 도시 “사바타”의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구스의 이들 네 자녀 가운데 창세기 10장은 라아마의 아들 스바(쉐바, Sheba)와 드단(Dedan)만을 소개하고 있다. 왜 이들만 소개되었는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구스의 후손 가운데, 라아마의 후손들이 창세기에 기록될 만큼 당시 잘 알려진 주목할 만한 가문이 되었음은 틀림없다고 본다. 탁월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후손들의 이름에 채용하는 것은 인류가 남긴 문화적 공통현상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이 소실 그두라를 통해서 낳은 여섯 자녀 가운데 욕산의 아들들 이름을 스바와 드단으로 지은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대상 1:32-33). 성경에 요셉, 야곱, 요한 등의 동명이인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구스가 에디오피아인의 조상이라고 전하고 있다. 칠십인 역(Septuagint)은 구스를 아이디오피아(Αἰθιοπἱα)로 번역하고 있다. 에디오피아(Ethiopia)는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구스인들이 모두 검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구스 후손을 단순히 에디오피아만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구스는 또 다른 한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중동 땅 중심에서 이름을 떨친 유명한 니므롯(Nimrod)이었다. 요한복음 강해에서 어거스틴은 니므롯을 바벨론의 창시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들 역사적 이름과 지명들을 살펴볼 때 구스 후손들의 초기 정착지는 고대 앗수르 지역과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포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스의 후손들은 요세푸스가 말하듯 단순히 지금의 에디오피아만이 아닌 이집트 남부인 수단 지역과 에디오피아 그리고 아라비아 남부와 중동 앗수르 지역에 고루 정착하였으며 그 곳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전역과 아랍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볼 수 있겠다. 애굽이 “함의 땅”(시 105: 23)으로 불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창조과학의 원조 헨리 모리스는 중국, 몽골 등 동양민족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까지 모두 함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 함족은 우리 민족과 그 유연성이 별로 없다고 볼 수 있겠다.

2. 우리 민족은 셈족인가?

우리 민족이 함족과 연관성이 멀다면 혹시 셈족일까? 우리 민족을 셈족으로 비정(比定)하는 주장에는 세 줄기가 있다.

먼저 심정적으로 막연히 셈족으로 보는 경우이다. 아시아인인 이스라엘 민족이 셈족이요 한때 페르시아제국을 이루었던 오늘날 이란의 주(主) 조상인 엘람족이 셈족이요 지금의 이라크 땅 주인이었던 대제국 앗수르의 주인공도 셈족이므로 같은 아시아 민족인 우리 민족도 당연히 셈족일 거라고 여기는 심정적 셈족설이다. 하지만 단지 심정적인 정서적 유대감만으로 셈족으로 여기는 이 같은 주장에는 성경적, 인종학적 결정적 증거는 전혀 없다. 더구나 셈족은 역사 속에서 대부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는 중심에 서지 못한 불행한 민족이다. 탁월한 신앙의 셈족(유대인, 아람인, 앗수르인, 엘람인, 룻족<리디아> 등)을 찾아보기 어렵기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단 지파를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단군”과 “단”지파의 언어적 유사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단 지파의 오랜 무대는 가나안 땅이었다.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요 야곱 아내 라헬의 종 빌하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단이었다. 출애굽 시 성막 제조를 도왔던 아히시막의 아들 오홀리압(출 31: 6)이 단 지파였으며, 사사 삼손도 단 지파였다(참조: 삿 13-16장). 야곱의 축복 예언 가운데 단은 독사로 말의 발굽을 물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창 49:16-17). 이 예언을 통해 단 지파는 싸움에 능하고 싸움에 직면할 처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모세는 단을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강한 사자 새끼’(신 33:22)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예언처럼 단 지파는 요단강 동편에 있는 바산 부근의 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처음 단 지파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사이의 한 지역과 해안 평야 지대를 분배 받았다. 가나안 정착 이후 왕국 시대 이전까지 단 지파는 이렇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있었다(수 19:40-47). 이렇게 야곱과 모세의 예언대로 단 지파는 늘 가나안 땅의 블레셋과 아모리 족속과 충돌하면서 전쟁에 노출된 지파로 살게 되었다. 결국 북단 풍요로운 땅이 지닌 역설이었다. 풍요로운 땅을 지키지 못한 불운의 지파가 단이었다. 이 단지파가 과연 우리 민족 단군의 기원?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면 단 지파의 운명이 그리 긍정적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스라엘의 12 지파 가운데 오직 단 지파만이 하나님의 종들 144,000명의 명단에서 누락된 것을 볼 수 있다(계 7:4-8). 단 지파는 여로보암 왕 시절 우상 숭배에 열심이었던 지파였다(왕상 12:29). 단 지파는 에브라임 중심의 북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우상의 미혹을 뿌리치지 못한 지파가 되었다. 에브라임 중심의 북 10개 지파가 사마리아 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단 지파는 더욱 하나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렇게 단 지파는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와서 12 지파 명단에서도 소멸되어버리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사라진 그들 단 지파가 고조선의 단군이 되었다는 것은 언어적 유사성 이외에는 논리적 근거가 없는 너무 큰 비약일 뿐이다. 설령 단군이 단 지파라 하더라도 그것은 명예는 커녕 비운의 민족이라는 멍에를 덧입을 뿐이다. 일부 일본인들조차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비운의 단 지파 후예들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욕단을 단군과의 언어적 유사성이나 번성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단군에 비정하는 주장이 있다. 에벨의 아들인 욕단의 후손들은 같은 셈족인 아브라함 조상 벨렉보다 번성한 가문이었다. 욕단(Joktan)은 13명의 아들들이 있었다(창세기 10:26~30). 알모닷, 셀렙, 하살마웻,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는 땅은 메사(Mesha)에서 동쪽 산간 지역 스발까지였다. 창세기 주석에서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이들 이름들을 궁극적으로 개인의 이름이 아닌 종족이 된 이름으로 해석한다. 이들 종족이 지금의 어느 민족을 말하고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현재의 어디를 말하는 지 명확히 밝히는 것은 어려우나 성경은 이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별로 흩어져 살았다고 했다(창 10:31). 올브라잇이 언급한 것처럼 아람과 욕단(아라비아 지역)의 후손들이 앗수르와 남 아라비아에서 주전 1천년 이후 발견된 어떤 비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미스터리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들 가운데 어떤 인물도 단군과 연결 시킬만한 종족은 발견되지 않는다. 구체적이지 않은 성경의 이 같은 모호한 표현이 단군을 욕단의 후손으로 해석하려는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금으로 유명한 오빌과 사베안족과 연관된 스바의 지명을 참고할 때 이들은 아마도 오늘날 아라비아 땅에 주로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벨렉의 후손들과 달리 욕단의 후손들 이름을 이렇게 상세하게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족속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본다. 이러한 해석은 헨리 모리스가 동쪽으로 이주한 함족 가나안의 아들 “신”(Sin)의 후손과 극동사람으로 지적된 “시님”(Sinim, 사 49:12)이라는 이름의 유사성과 중국 민족이 항상 “시노”(Sino-)라는 접두어로 불려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극동민족을 주로 함족으로 비정하는 것과 유사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우리 민족을 셈족 욕단의 후손이라는 전제 아래 모든 것을 꿰어 맞추려는 접근 방법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앙적 국수주의자들일수록 우리 민족을 셈족으로 비정하는데 집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데, 셈족 아르박삿 후손도 아닌 곁가지에 불과한 욕단의 후손이라는 황당한 꿰맞추기 주장이 민족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자부심이 될까?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할례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마음의 할례가 참 할례가 된 것이다. 즉 기독교적으로 볼 때 근거가 분분명한 가운데 우리 민족이 셈족이라는 막연한 집착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셈족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인류는 한 족속이요 성경은 참 진리라는 논증이다. 성경과 우리 민족 기원의 추적도 바로 그런 성경 권위를 바르게 논증하기 위한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달신(月神)을 섬기던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심지어 육적 아브라함 후손들은 오늘날 대부분 그리스도 예수를 메시아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굳이 우리 민족을 아브라함 계열도 아닌 욕단의 후손으로 비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을 셈족으로 비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한국 보수 기독교의 생각이기는 하다. 세계 최초의 민족 이동 대탐사를 모토로 내세우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창조사학회도 한민족기원대탐사의 부제로 “셈족의 루트를 찾아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탐사기 어디에도 우리 민족이 어떻게 셈족인지를 구체적으로 논증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라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이 스키타이족(야벳족)과 연결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지리적 탐사 지역도 야벳 후손의 활동 영역인 터키와 슬라브족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과 많이 일치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야벳 후손들의 분산을 살펴보도록 하자.

3. 우리 민족은 야벳의 후손인가?

야벳은 일곱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였다(창 10: 1-2절). 고멜(Gomer)은 노아의 16 손자들 중 맨 처음 언급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악카드어로는 김미라이(Kimmirai)라 부르고, 고대 호머(Homer) 시대 헬라의 자료들에는 흑해 북부의 기메리아(Cimmeria)라고 부르던 사람들과 같은 족속으로 알려져 있다. 고멜의 아들들은 ‘아스그나스(Ashkenaz)와 리밧(Riphath)과 도갈마(Togarmah)’였다 (창10:3). 에스겔서에 보면 고멜의 초기 자손들은 도갈마와 함께 북쪽 지역(극한 북방)에 살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에스겔 38:6). 이곳은 현재 신약 성경에 나오는 터어키(Turkey)의 갈라디아(Galatia)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유태인 역사학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살던 시대인 AD 93년경에는 갈라디아인(Galatians) 또는 고올(Gauls)은 이전에는 고멜릿(Gomerites)으로 불려졌었다. 고멜족 일부는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에 살던 스키티안(Scythians, 일명 스키타이족)에 의해 러시아 남부에서 추방 당했다고 알려진다. 과거 천산 산맥을 넘어 동서양의 실크로드(비단길)를 개척한 민족은 소그드(Sugd)인이었다. 아무나 비단길 상인이 될 수 없었다. 천산산맥 양편의 언어와 지리와 역사와 사회와 문화에 익숙해야 한다. 그리고 용감하고 개척 정신을 가진 상인들이어야 했다. 그들이 바로 비단길의 주인공 수구디아인이었다. 수그디아나 또는 수구디아(Σογδιανῆ)는 현재 이란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기도 하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주를 말하기도 한다. 수구디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의 아랄해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아와 사르다리아 강 사이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후잔트와 케시 등과 타지키스탄의 수그드 주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소그드인과 스키타이족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언어적 유사성으로나 실크로드의 길목을 넘나든 족속이라는 점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유사성 많은 족속이다. 수구디아는 역사적으로 비록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우즈벡 지역을 관통하는 아무다리아 강과 시르다리아 강 사이(고대 폴리티메투스)의 비옥한 계곡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이들 수구디아인이 개척한 비단길에 동서양의 문화적 고속도로를 놓은 것은 놀랍게도 중앙아시아 지역 정벌에 나선 멸망한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수였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었다. 천산과 파미르고원을 넘나든 고선지 장군이 개척한 길들은 전쟁의 루트이기도 하였으나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중국의 한지 등이 전파되면서 동서 문명의 고속도로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야벳의 자녀들 가운데 형들인 고멜과 마곡이 아라랏 산의 서북쪽을 향한 것과 달리 마대(Madai)의 후손들은 티그리스 강 북쪽 카스피해 남쪽의 자그로스(Zagros) 산 동쪽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마대족(族)은 페르시아 서북의 험준한 자연 환경과 마대족의 북쪽에 살며 강력한 제국 스키타이를 세운 마곡족의 영향을 받으며 일찍부터 야만의 거친 민족성을 보인다. 야벳의 아들인 마대의 후손들은 메대의 조상이 되어 셈의 아들인 엘람(Elam) 후손들과 함께 오늘날 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과거 페르시아 지역 즉, 페르시아 만을 중심으로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며 맞서고 있는 지금의 이란 지역이 바로 마대족(族)들이 뿌리를 내린 땅이다.

야완은 헬라 문화를 일군 장본인이었다. 야벳의 넷째 아들 야완(Javan, Ἰωυαν)은 그리스(Greece)의 히브리 단어이다. 그 뜻은 분명치 않으나 어원상으로 이오니아(Ionia)와 일치한다. 따라서 그 이름은 예언서들에서 이오니아 본토(소아시아 서부 연안)와 헬라 마게도냐에 거하는 야완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헬라(Greece, KJV은 Grecia로 표현) 또는 헬라 족속(Grecians)은 구약에 다섯 번 나타나며(단 8:21, 10:20, 11:2, 욜 3:6, 슥 9:13 등), 그 때마다 항상 히브리어로는 야완이라 쓰여졌다. 다니엘은 ‘헬라 왕(다니엘 8:21)’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문자 그대로 ‘야완의 왕’이었다. 그리스와 앗수르, 애굽 문서들이 헬라 사람들과 그들의 거주 지역을 가리킬 때 늘 야완이라 불렀듯이 구약 성경도 정확히 일치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야완을 노예와 놋그릇 무역상으로 묘사한다(겔 27:13). 맞는 말이다. 과거 헬라는 온갖 노예를 사고팔며 해양 무역을 주도하던 민족이었다. 요엘서 3:6에 보면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이 민족에게 노예로 팔려갔었다.

우리 민족도 고조선, 백제, 고구려,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의 시대에 당나라, 원나라, 몽골, 일본, 러시아 등에 너무나 많은 동포들이 팔려나갔다. 오죽하면 저 멀리 태국 북쪽 산악 지대 소수민족들에게서 옛 우리(고구려 등) 언어와 풍습의 원형을 찾아낸 선교사나 학자도 있다. 이들 소수 민족 중 일부는 당나라에 잡혀간 패망한 고구려, 백제의 유민 중 정치적 이유로 남으로 남으로 이동한 무리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야완은 엘리사(Elishah)와 달시스(Tarshish)와 깃딤(Kittim)과 도다님(Dodanim)이라는 4아들이 있었다(창 10:2, 4; 대상 1:5,7). 이들은 모두 헬라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고대 헬라인들의 명칭인 엘리시안(Elysians)은 엘리사(Elishah)로부터 그들의 이름을 물려받았음이 분명하다. 겔 27:7에 보면 두로가 ‘엘리사 섬’과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오니아와 헬라 지역에 분포하며 해양을 지배한 야완의 후손 가운데 엘리사 후손들이 살았던 섬이 분명하다. 달시스(Tarshish) 또는 타르수스(Tarsus)는 실리시아(Cilicia, 현재의 터어키) 근방에 위치했었다. 깃딤(Kittim)은 구브로(키프로스, Cyprus)의 히브리식 명칭인 키티온(Kition)과 연관된다. 또한 키티온은 키프로스섬 남동 해안에 위치한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였다. 헬라 사람들은 쥬피터 도다네우스(Jupiter Dodanaeus)라는 이름으로 쥬피터 신을 숭배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야완의 네 번째 아들인 도다님(Dodanim)에서 파생된 말로 여겨진다. 그 성소(oracle)는 도데나(Dodena)에 있었다. 맛소라 사본은 도다님을 로다님(Rodanim)으로 표기하고 있다(대상 1:7). '로다님'도 에게해 지역에 분포한 섬주민들과 관련된 이름이었다. 결국 이들 야완의 네 후손들은 헬라와 이오니아를 중심으로 부근 에게해 주변 섬 지역에 까지 널리 흩어져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구가 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히 지중해 쪽 섬들로도 진출하였을 것이다.

야벳의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이었던 마곡 (Magog)은 우리 민족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마곡은 ‘곡의 장소’란 뜻이다. 즉 마곡은 문자적으로는 곡(Gog)이 최고 통치자로 다스리던 땅(혹은 백성)을 말하고 있다(겔 38:2; 39:6). 성경 안에서 마곡(Magog, 창 10:2; 대상 1:5)은 성정확한 혈통 계보가 뚜렷하지는 않다. 하지만 에스겔서를 참조할 때 마곡은 분명 곡(Gog)과 연관(겔 39: 6; 계 20:8)되며, 한 통치자(주된 왕, 겔 38: 2, 미국 표준역 ASV) 밑에서 메섹과 두발(지금의 터키 북동쪽 앗수르인의 영토였던 무쉬쿠와 타발)과 연합했다는 사실(겔 27: 13)은 마곡이 북방의 야만 민족이 되었음을 말해준다(에스겔 38:15, 39:2). 전통적으로 마곡족은 수구디아족(일명 스키타이족)이 되었고 일부 후손은 에티오피아족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결국 많은 학자들은 성경의 마곡과 곡을 동일한 민족으로 간주한다. 요세푸스는 북방(겔 38:15, 39:2)에 살던 사람들은 마고자이트(Magogites)라고 불려 졌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들을 수구디아인(Scythians)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한다. 지금의 루마니아(Romania)와 우크라이나(Ukraine)를 포함한 지역의 고대 이름도 수구디아(Scythia)였다.

우리에게는 스키타이족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들 수구디아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이들은 세계 최초 유목 정권을 이룬 민족이다. 이들은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터키 그리고 한반도 남부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하여 세계 최초로 글로벌화 된 민족이었다. 앞에서 고멜족을 다루면서 고멜족을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남쪽(지금의 서남 터어키 방향)으로 밀어낸 민족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것도 이들이요 동유럽 토착민들이 두려움의 대상인 드라큐라 전설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 스키타이 민족 때문이었다. 이들은 서기 370년경 유럽 남동부를 침략한 이후 140여 년 동안 유럽 남동부와 중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이 되었다. 넓게 보면 흉노(匈奴)나 훈족(Hun)도 스키타이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마곡족은 우리의 신라 왕족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문무왕릉비문>에 보면 투후제천지윤(秺侯祭天之胤)이란 구절이 있는 데, ‘투후’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서 한 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 경주지역 신라 김씨 왕가의 김알지 후손들은 자신들을 흉노계인 김일손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래 신라 건국자는 박씨 성을 가진 혁거세(赫居世)였다. 신라 초기 왕호(王號)요 군장, 제사장을 나타내는 거서간(居西干)은 몽골의 게세르(keser) 영웅서사시에 등장하는 ‘게세르 칸’과 언어학적으로 연관된다. 변한 지역에 존재하던 귀틀집의 기원이 한반도가 아니라 바이칼 호와 알타이 지방 및 애니세이 강 유역이라는 것은 역사적 정설이다, 김해 대성동과 양동 고분에서 출토된 솥인 동복(銅鍑)과 철복(鐵鍑) 3 개는 모두 북방 기마민족이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삼국사기는 “박혁거세 즉위년에 (고)조선 유민들이 산곡(山谷)에 나누어 거주하여 6촌을 이루었다”고 하여 신라 기원을 고조선 유민들의 이주에서 찾고 있다. 신라 총 56대 992년(B. C. 57-935) 동안 박씨 성을 가진 왕이 10명, 석씨가 8명, 김씨 성을 가진 왕들이 38명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주로 박씨와 석씨가 왕위에 올랐으며 김씨들이 왕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7대 내물왕과 19대 눌지왕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왕호도 거서간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뀐다(삼국사기는 19대 눌지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 4대, 삼국유사는 17대 내물왕부터 지증왕까지로 봄). 마립간은 임금이 있는 곳 곧 강력한 통지자를 지칭한다. 왕호까지 바뀐 것에서 박씨와 석씨를 능가하는 강력한 북방 세력이 어느 시기 남하하였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분명 스키타이의 피를 받은 무리들이었다.

스키타이족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황금장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무덤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우리들이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보는 무덤 양식이다. 유명한 천마총은 바로 그 대표적 왕릉이다. 스키타이족은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 유효사거리가 멀고 강력한 ‘맥궁’이라는 화살과 몸을 돌려 쏘는 ‘배사법’을 특징으로 하는 스키타이족은 말을 타고 능숙하게 활을 다루었다. 한자 '동이'(東夷)의 '이'(夷)는 오랑캐 '이'가 아니고 '큰 활'를 의미한다. 즉, 동이는 동방의 큰 활 민족을 의미한다. 이들은 중국 진(秦), 한(漢) 시대에는 흉노(匈奴), 수(隨), 당(唐) 시대에는 돌궐(투르크 또는 위그르, 터키), 고대 그리스(폴리스 시대)에서는 스키타이, 로마(제정시대)에서는 훈(후니)족으로 불리게 된다. 따라서 흉노(스카티아)가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퉁구스(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사람들을 지칭하는 칭호로 전통적인 동이족을 말함)계열에 속하고, 19세기 이후 발달한 언어학적인 민족계열로 분류하면 몽골어군에 속한다. 고구려의 서울이었던 집안현(輯安縣)의 국내성(國內城), 환도성(丸都城) 지역 이름이 통구(通溝)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흉노가 중국 땅에서 주목 받은 것은 BC 318년 중국 전국시대 제후국인 한(韓)·위(魏)·조(趙)와 함께 진을 공격했으며, 그 뒤 중국 땅을 빈번히 침입하면서부터 였다. 이에 중국 땅 여러 나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각 성벽을 쌓았는데, 이것이 훗날 만리장성이 되었다. 흉노족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선우(單于)라고 불리는 단일 지도자 밑에서 광범위한 부족연합을 형성한 때부터였다. 그러기에 고대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왕 손권이 고구려를 ‘흉노의 왕’이라는 의미의 ‘흉노의 선우’라고 지칭한 것도 주목된다. 백제는 일부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요 가야도 기마민족의 후손이었다. 가야를 흉조인 김씨의 나라라고 논증한 서동인(徐東仁)이 “이란계인 타지키스탄을 제외하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 우리와 친연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도 같은 흉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대표되는 우리 민족의 모든 주류는 심정적 셈족이나 서구 신학자들과 헨리 모리스(H. M. Morris)가 말하는 함족이 아니요 야벳 계열이 되는 셈이다.

일본이 세계 유일의 독창적 묘제라고 자랑하는 일본천황릉인 전방후원분의 원형도 실은 한반도의 전라도, 충청도, 경남 지역에서 그 원형이 나올 뿐 아니라 스키타이 계열의 가라족 무덤이었다(김성호 박사).

과거 우리 민족은 유난히 우리와 다른 외국인들에게 배타적인 나쁜 습성이 있었다.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그런 습성들이 것은 아주 반가운 현상이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허구적 역사관을 빨리 버려야한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각 지역에서 유민들이 쏟아져 들어온 역동적 다문화국가였다. 북방 스키타이 계열의 흉노 뿐 아니라 남방계, 몽골계, 베트남계, 일본에서 역유입된 왜(倭)계, 심지어는 아라비아계도 있었다. 다만 그 가운데 문화적 주도 세력은 분명 북방계였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혈통을 하나로 만드셨다(행 17:26). 흉노 주민들은 흔히 유목민으로 정착 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성곽을 만들어 농사를 지은 사람도 다수 존재했으며, 특히 그들의 유적에서는 과거 한반도 북동 지역 옥저(沃沮) 사람들이 발명했다고 알려진 온돌(깐)이 발견되기도 했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곡과 마곡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백성들의 대적을 상징(계 20:8)한다. 에스겔 38-39장은 마지막 때(38:8) 마곡의 통치자 곡은 아시아와 아프리카(38:5,6; 계20:8)로부터 군사를 모아 메시야의 나라를 침공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그 동기는 사탄의 유혹에 따른(계 20:8-10) 탐욕(겔 38:12)과 교만(계20: 7)이었다. 결과 마곡에 내란이 일어나고(겔 38:21) 하늘로부터 파멸이 임하게 된다(겔 38: 12). 땅은 갈라지고(겔 39:20; 계20:9-11)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날 것이다(겔 38:16, 23; 39:7). 이 계시의 구체적 해석은 보다 영적이다.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잘 살펴서 진리를 밝히는 작업은 신앙인의 몫이다.

두발(Tubal)은 야벳의 후손 가운데 다섯 번째로 소개되고 있다. 두발도 일반적인 야벳족의 지리적 행로를 따라 정착하였다. 야벳 일족은 셈족과 함족과 달리 바벨탑 분산 사건 이후 다시 인류의 고향 아라랏산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런 점에서 같은 야벳 계열인 고멜(유럽, 독일, 터키, 아르메니아 등)과 마곡(스키타이)과 마대(현 이란의 북부)와 닮았다. 요세푸스는 두발의 땅은 로만 이베리아(Romans Iberia)라고 불려 졌다고 말한다. 현재는 (구소련 연방인) 그루지아 또는 조지아(Georgia)라고 알려진 지역이다. 이베리아는 두발의 땅 말고도 스페인에도 있었다. 어원적으로 남·북카프카스어족과 이베리아 반도의 피레네산맥에서 쓰이고 있는 바스크어는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유럽의 이베리아인이 카프카스 지방으로 이주한 것인지 카프카스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것인지 이들 사이의 친족 관계는 확실하지가 않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오늘날 조지아 공화국의 수도 이름 트빌리시(Tbilisi)는 두발(Tubal)로부터 파생된 이름이다. 그리고 일부 두발족 일행은 이곳으로부터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질러 북동쪽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그들 부족의 이름을 따서 강의 이름도 토볼(Tobol)이라 불렸고, 유명한 토볼스크(Tobolsk)시 이름도 여기에 기인한다. 토볼스크는 1587년 카자흐족이 이 도시를 건설하였을 때 시베리아 제2의 도시였다. 오늘날 토볼강은 카자흐스탄공화국 북부에서 시베리아 서쪽 저지대 남서부를 흐르는 1591Km에 달하는 대단히 큰 강이다. 토볼강 합류지점 부근에 있는 이르티슈강 오른쪽 연안에 있는 토볼스크는 16세기 타타르인이 세웠던 시비르한국(汗國)의 수도 이스켈이 있던 곳으로 <시베리아>라는 명칭은 러시아인이 이곳을 <시비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두발족은 오늘날 조지아공화국의 주요 구성원이요 일부는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 지역에 걸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그루지아(두발)족이 유달리 우리 민족과 많이 닮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첫째 우리나라와 그루지아족은 산지가 많고 세상을 호령하기 보다 주로 외세의 침략에 늘 시달려온 약소국가라는 점이 많이 닮았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모습도 많이 닮아있다. 둘째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고 진하고 매운 향신료와 허브와 마늘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점이다. 이들 말고도 마늘을 유난히 즐기는 유럽국가가 있던가? 범유럽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마늘을 즐기는 민족이 다 있었다니 참 반갑고 왠지 정이 가는 민족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과 무신론 공산주의의 핍박 아래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랫동안 꿋꿋하게 기독교 계열의 조지아 정교를 지켜왔다는 사실은 예사롭지가 않다. 비록 기독교 역사는 짧으나 조선 후기 유교 사회와 6.25를 거치면서 믿음의 선배들의 뜨거운 순교의 피가 흐르는 우리와 많이 닮았다. 카프카스산맥 북쪽 러시아 영역에 거주하는 북(北)오세티아인들은 이슬람교 수니파(派)에 속하고 일부 소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아자르인·아제르바이잔인·쿠르드족 등은 이슬람교를 믿기는 하나 남오세티아인들은 동방정교를 신봉하며 이슬람 9.9%, 카톨릭 0.8%, 일부 불신자, 유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조지아 정교회에 속해있다. 비록 주변의 러시아나 터키에 비하면 작고 협소한 땅에 자리 잡고 있으나 두발족은 조지아 남쪽 고멜 계열의 아르메니아와 더불어 무신론 공산주의와 이슬람 세력을 꿋꿋이 막아선 민족이요 이슬람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와 유럽 틈바구니의 정중앙에 있는 민족으로 마치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기적처럼 꿈틀거리는 우리 민족과 너무나 많이 닮은 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주류는 분명 수천 년 전 두발의 땅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이것은 즐문토기(櫛文土器)의 분포 지역과도 일치한다.

메섹(Meshech)의 이름은 “늘이다”, “키가 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역대상 1장 17절에는 셈의 아들로 묘사 되나 셈의 아들 가운데 메섹은 없었으므로(창 10장) 이는 아마 아람의 아들 마스(Mash)의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있고(창 10:23)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이 모르는 다른 곡절이 있을 거라고 본다. 고대 악카드 문헌에 보면 무쉬키(Mushyki)라는 이름이 나타나고 앗수르 문헌에는 무스키(Mushki)라고 불려지는 북방 족이 등장한다. 이는 메섹 일족을 말함이 분명하다. 헬라는 전통적으로 흑해 남동쪽에 자리 잡은 이 민족을 무스코이(Muschoi, Μοσχοι)라고 불렀다. 즉 야벳의 후손 메섹은 같은 형제 두발과 동행하면서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의 생명의 고향이요 조상의 근원인 아라랏 산 방향으로 되돌아와 북쪽 카프카스(Kavkaz, 영어 명은 코카서스Caucasus) 산맥을 향하였고 중동에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같은 무력의 지배자들이 나타나면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와 지금의 광활한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 오늘날 러시아 땅의 주인이 되었다.

메섹의 성경적, 역사적 출발점이 카프카스 산맥 남쪽 두발 땅이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대단히 흥미롭다. 우리 민족의 주류를 북방에서 찾는 것은 역사학계에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정설이 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가라’(kara)라는 지명이다. 이병도(李丙燾) 박사는 가라라는 지명이 김해의 가라(가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너무 시야가 좁고 순진한 발상이다. 가라(가야)는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는 가장 대중적 지명이다. 놀랍게도 이 고대 지명은 오늘날까지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다. 가라(가락, 가야)를 지명으로 하는 곳은 한반도 전역(평북, 황해, 강원, 경기, 서울, 충남, 충북, 경북, 부산, 전남, 경남)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한반도 고대 변진 12국 중 10국이 모두 ‘가라’라는 이름을 가진 제국이었다. 그리고 이 ‘가라’ 제국들은 모두 신라의 박혁거세 세력과 닿아있는 이름들이다. 변한 지역에 존재했던 귀틀집은 우리 민족 특유의 집이 아니라 그 기원이 바이칼 호수 서부와 알타이 지방 및 에니세이 강 유역이다. 따라서 기원전 북방계 주민이 한반도 변한 지역에 들어왔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그럼 kara라는 이 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말은 사실 ‘검다’는 뜻의 이란어 kara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말은 검다는 뜻의 일본어 ‘흑’(黑, kuro)와도 연결된다. 이란어는 또 있다. 서울 ‘한강물’의 순수 우리말인 ‘아리수’의 아리(Ali, ara)는 이란어로 강(江)을 말한다. 영국 필립사는 <The University Atlas>(1974)에서 세계의 ‘가라’계 지명을 추적한 결과 무려 200여개를 찾아냈다. 그 중 60%는 터키와 카라카스와 이란 북부에 집중 되어 있고 이 지명은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우리 민족과 닿아 있는 스키타이 족의 활동 무대와 모스크바 지역 그리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의 곰 토템을 가진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소수 민족 자치구 이름 가운데 하나인 카라칼팍(Kara-kalpak)에서도 ‘카라’가 남아있다. 이 끈질기고 강렬한 이름은 우리나라와 일본으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는 한강변과 낙동강변의 고대 부족국가 주변에 ‘가라’의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가라’라는 지명은 놀랍게도 넓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지명이다. 일본에서는 한(韓)도 ‘kara’로 읽힌다. 고대 일본인들이 볼 때 자신들의 고향 한국(韓國)은 얼마나 ‘가라’라는 지명이 많은지 ‘가라’(韓)의 ‘구니’(國)였다. 심지어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도 ‘쓰시마’가 아니라 고대에는 ‘kara sima'로 읽혔다. ‘가라’라는 지명은 분명 우리 민족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아주 중요한 지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땅에서 출토되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출자형 금관(出字型 金冠), 황금제 장식(裝飾), 환두대도(環頭大刀), 동물양식 대구(帶鉤) 등도 모두 중국 대륙과는 무관한 북방 스키타이 관련 유물들이다. 스키타이인들은 동복이나 철복을 말안장 뒤에 달고 다니며 그곳에 식량을 담아 저장하거나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놀랍게도 이 청동솥 모형은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도제기마인물상에도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김해의 옛 가야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전형적 돌무지덧널무덤인 경주 천마총의 천마(天馬)를 보면 어깨 위 날개와 몸 전체에 반달형 무늬가 있다. 반달형 무늬는 전형적인 스키타이 기법이다. 이들 모든 자료를 따라 우리 민족의 주류를 역추적 해보면 남방이나 중국 대륙이나 산동 반도가 아닌 한반도->만주(고조선, 부여, 고구려)->내몽골->시베리아->흑해 연안(스키타이, 두발, 메섹 족)->카프카스(코카서스) 산맥->(터키, 아르메니아의) 아라랏 주변(또는 시날땅 바벨론)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 민족은 역사적 굴곡을 따라 한반도로 진입한 크고 작은 부족과 씨족들이 이룬 다문화 국가요 문화적 주류는 북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셈이나 함보다 야벳의 영향력이 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 박사는 낯선 종교(둔군신앙?)를 가졌던 에스토니아, 마자르족(말갈족?)의 헝가리, 불가리아, 부리야트, 스페인의 바스크족, 아발족, 몽골족 등이 모두 고조선 멸망 후 변방 군사와 유민들이 경주까지 남하하듯 내륙 초원 지대로 흩어진 고조선의 후예들이라는 주장을 편다. 대부분 야벳의 터전과 일치한다는 점에서는 살펴볼 여지가 있다.

IV. 한반도와 주변 국가

우리 민족 기원에 대한 성경적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제 우리 민족과 주변 국가들에게로 돌려진다. 지리적, 영토적, 문화적으로 우리 민족과 가장 큰 영향력을 주고받은 것은 당연히 지금의 중국이다. 우리 민족 성씨의 기원이나 많은 씨성들이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인 것도 그것을 증거한다. 하지만 중국과 구별되는 상이한 부분도 못지않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같은 한자 문화권임에도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 그것을 증거한다. 오죽하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우리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명시하였을까.

문제는 일본이다. 일본이 자신들 천황과 국가 기원의 기준으로 삼는 일본서기가 주로 한반도의 삼국과 가야의 역사를 다루면 특별히 백제사가 주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고대 일본의 왕성(王城) 지역이었던 오사카의 역사박물관은 역사관 입구부터 백촌강 전투(白村江の戦い)를 소개하고 있다. 백촌강 전투(白村江の戦い)는 주후 663년 8월, 한반도의 백강(현재의 금강, 만경강, 동진강 중의 하나)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신라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였다. 제명여제를 대신해 천지(天智, 텐지) 천황에 오른 중대형(中大兄) 황자는 2만 7천명으로 이루어진 백제구원군을 파견하였으나 백제·왜 연합군은 이 백촌강 전투에서 전선 400척을 잃고 패배한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백제 부흥군의 지휘부, 그리고 백제 유민의 대부분은 당시 백제의 '우호국'이었던 왜로 망명의 길을 택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 주류성이 함락되었을 때, 야마토왜(大和倭), 즉 나라(奈那)의 ‘난바’(難波, 난파) 사람들은 "주류(州柔)가 함락되었으니 이제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탄식하였다. 지금의 오사카 중심지 ‘난바’는 고대 백제들의 새로운 나루터(難波津)의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일본 <고사기>(古事記 )에 나타난 천황가의 일본황실 조상 귀신(鬼神)인 아마데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손자인 니니기노미고토(瓊瓊杵尊)의 천손(天孫) 강림 신화는 “이곳이 한국을 바로보고 있으니 큰 길지(吉地)”라고 말하여 일본천황의 원적(原籍)이 한국임을 분명히 하면서 길지인 고향 한반도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의 천손강림신화(天孫降臨神話)가 한국 고대 왕조의 시조 신화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한일 양국 학자들이 이미 다양하게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 씨성(氏性)으로 한일 민족 기원의 연관성을 밝혔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비문, 일본서기 등을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일본의 응신(應神) 천황이 곧 비류 백제 마지막 임금이었음을 논증하며 비류(沸流) 백제(百濟)의 역사적 부활을 시도한 김성호(金聖昊) 박사의 논증은 한일학계 모두에 큰 충격을 준 주목할만한 논문이 아닐 수 없다. 왜가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게 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국제적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백제계, 고구려계 난민 등이 몰려들자 왜의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국내 정치에 반영하여 천지 천황 때에 책정된 오오미령(近江令)부터 덴무 천황 때에는 일본 최초의 율령법으로 여겨지는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淨御原令)의 제정이 이루어지면서 율령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이호 율령(701년)의 제정으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어 신국가의 탄생을 완성하였다. 이후 서기 815년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외국에서 건너온 중요한 성씨 328개 가문 가운데 백제계가 158개, 고구려계 42개, 신라계는 9개, 임나(任那) 10개로 분리하여 백제계가 고대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서기> <敏達紀>나 <舒明紀>또는 <新撰姓氏錄>이 일본 천황이나 천황의 아들들을 떳떳하게 백제에서 왔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따라서 일본 학자들도 해석을 잘 못하는 수수께끼같은 책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는 어쩌면 "임나백제부"로 해석하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서기 서문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근원은 "담로"임을 수수께끼 풀듯이 밝히고 있기때문이다. 즉 백제계 도래인이 중심이 되어 고조선, 가야, 백제 역사서를 참고하여 일본 천황의 만세일계를 조작하면서 서술한 일본서기 서론의 키 워드는 "백제의 지방 통치 기구인 "담로"임을 여러 군데서 밝히고 있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조상을 한반도와 관련 짖지 않으려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은 눈물겨울 정도이다. 기마민족이 빠른 속도로 북방에서 한반도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이후 경남 김해 지방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변한(任那)을 지배한 다음 일본으로 입성하였다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의 소위 기마민족설(1948년)도 실은 스키타이족의 남하를 한반도를 배제하고 설명해보려는 눈물겨운 시도인 것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사관에 길들여진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이같은 주장이 큰 충격이었겠으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애처롭게 보인다.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는 성경의 기록과 통섭의 거대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민족과 일본은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피를 나눈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쓰라린 사실이 복음과 선교에 있어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신앙적 고민을 하게 만든다.

V. 나가면서

성경적 관점에서 우리 민족 기원을 탐구하는 문제는 이제 그 출발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창조사학회가 조직되어 1997년 제 1차 탐사를 시작으로 성경 기록의 진실성 탐구를 시작한 것은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그만큼 본격적인 탐구가 없었다. 이 탐구에 있어 일차적 문제는 관련 문헌 부족과 세속고고학을 성경과 연결하는 문제 등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는 기원과 고고학을 탐구하는 모든 학문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어렵더라도 이 작업은 결코 멈출 수는 없다. 다음의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진리의 책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을 도출해내지 못하면 결국 문헌의 가치와 진실성을 상실하게 된다. 세속 학문은 여러 측면에서 성경과 기독교에 영향을 주고 있다. 세속학문이 긍정적 영향도 많으나 부정적 영향도 못지않았다. 왜곡된 “임나일본부” 해석은 일제 침략의 도구가 되었으며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며 우리 민족을 압박하고 있다. 바른 역사를 빼앗기면 민족 정체성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일본의 침략 근성은 한국을 점령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왜곡시켜 놓았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세계 문명을 23개로 분리하면서 중국과 일본 문명은 강조하면서 한국을 그 아류(亞流)로 누락시킨 것은 바로 그런 일본이 저지른 역사왜곡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하나님이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바른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복음을 바르게 알려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둘째 성경의 출발은 성경이 족보의 책이라는 것이었다. 이 육적 족보의 책 성경은 결국 영젹 족보로서의 생명의 책으로 구속 사역을 보여준다. 성경 육적 족보의 역사적 근거가 영적 족보로서의 구속 사역의 진실성을 논증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9-11장)에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절실한 사랑을 보여준 것처럼 성경은 선교 지향의 책이다. 성경은 결코 민족을 무시하지 않는다. 모든 영광은 열방과 열국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겔 39:21). 즉 역사적 진실은 열방을 향한 민족적 역사적 소명을 깨닫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성경과 우리 민족 고대사에 대한 바른 역사적 진실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을 향한 소명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