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남 목사, 웨신의 행위언약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한다
신앙고백서는 무오하지 않고 성경만이 무오하다
우리는 행위언약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개혁신학자들의 반성 없는 신학 개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위언약이 웨민신앙고백서에서 나온다고 하여, 그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서가 성경처럼 무오하다고 하는 어리석은 교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고백서에 대해 어떤 흠을 찾아 신앙고백서 전체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물려준 위대한 신앙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는 계속 가르쳐져야 하며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아주 소중한 진리체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웨민에 나오는 행위언약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 성경에서 단 한 번도 말씀하지 않는 것이다. 일부 회중파 청교도들(그리고 후에 그 사상에 동조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일부 선조들)의 행위언약 가르침을 제쳐놓고서라도 콕케이우스가 제기한 행위언약은 너무나 비성경적이고 사변적인 주장인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비난 아닌 비난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콕케이우스가 주장하는 행위언약으로 인해 많은 후대 개혁신학자들이 영향을 받았다. 생전에 대신에서 후학들을 가르치셨던 대신의 한 교수님은 자신의 책에서 “콕케이우스가 인간의 타락 이전과 이후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모두 언약의 형식으로 묘사하였다고 제시하고 있다. 콕케이우스에 의하면 에덴동산에서는 순종함으로써 구원 얻는다고 하는 약속인 행위언약이 있었으나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행위언약은 무효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행위언약은 은혜언약으로 대체되었다. 이 언약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합의에서 비롯되었으며, 역사적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실현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 투레틴, 비치시우스, 하지, 헤페, 보스, 바빙크 등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콕케이우스의 견해를 수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 일부 개혁신학자들이 아담의 창조가 임시적, 잠정적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콕케이우스가 말한 대로, 아담이 순종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약속인 행위언약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아담은 순종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는 임시적인 존재로 창조된 것인가? 언약 신학의 이와 같은 출발 때문에 이제 오늘날 의문이 일어나고 있다.
서철원 박사는 콕케이우스가 구원론적 관점으로 이 행위언약에 접근한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철원 박사는 콕케이우스가 영혼의 지식추구를 위해 행위언약을 맺은 것이라는 관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독자들이 서철원 박사의 교의 신학 <인간론> 제4장을 자세하게 읽어보길 권한다. 목사는 신학자이어야 한다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교훈하여 주기 때문에 목사는 계속 신학을 연구해야 함이 마땅하다.
콕케이우스가 아담이 에덴에서 언약에 순종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행위언약을 주장한 것은 결국 아담의 창조가 완전하고도 영생을 가진 피조물이 아니라 불완전한 창조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영생하는 존재가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만약 인간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형벌에 처하였다면, 인간의 영혼도 마땅히 소멸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의 죽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도 말씀하시면서, 영혼은 소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여 주고 있다 (죄를 지어 죽음의 형벌을 당하지만, 영혼은 영원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함).
이 증거만 보더라도 아담은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칼빈도 자신의 창세기 주석에서 아담이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는 영생을 소유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그는 범죄 이후 930년을 살다가 육체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그는 범죄 직후 죽음의 형벌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영혼은 지금도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존재로 있는 것이다.
“아직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 왜 순종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콕케이우스의 주장처럼,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하지도 않았는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콕케이우스의 행위언약 가르침이 잘못된 사상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은혜언약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웨민신앙고백은 성부께서 아들과 은혜언약을 맺은 이유를 행위언약의 파괴로 인해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보스나 콕케이우스, 그리고 후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은혜언약이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 간에 맺어진 언약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대요리 문답 135p. “은혜언약은 언제 맺어졌는가? 그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 즉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어졌다. 엡1:4절을 읽어라. 은혜언약은 행위언약 이전에 수립되었지만, 행위언약이 파괴되어 인류에게 계시 되었다”. 보스, 윌리엄스 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렇다면 성부께서 창조 이전에는 은혜언약을, 창조 이후에는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는 모순을 가지는 분이 아니신가? 창조 이전에 맺은 언약이 은혜언약이면 아담과 맺은 언약도 은혜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철원 박사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신의 백성 삼으시기 위한 약정으로 본다. 또한, 캐나다 개혁교회에서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언약을 반대한 31조파의 언약사상대로 은혜언약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콕케이우스의 주장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은혜언약을 맺고 창조 이후 아담의 타락으로 행위언약이 파괴되어 다시 아들과 맺은 은혜 언약을 나타내신 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스스로 모순되게 하는 어리석은 주장이 분명하다. 개혁신학 가운데 언약 신학의 중요한 가르침은 통일성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의 통일된 언약을 가지고 창조 전과 창조 후에 자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는다.
콕케이우스가 행위언약을 개진하여 은혜언약을 강조하려고 한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오히려 행위언약을 가르침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온전한 순종에 대한 왜곡된 사상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행위언약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말처럼 예수님의 순종을 피동적, 그리고 능동적 순종으로 이분하여 가르치는 아주 해괴한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동적 순종으로 인해 율법의 의를 획득하여 예수님 자신이 먼저 구원을 받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었는가? 최근 일부 젊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이러한 비성경적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수여자이시다. 그런데 그분께서 율법을 지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예수님도 구원받아야 할 피조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마귀적인 가르침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다 지켜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 죄인들에게 요구하는 정죄의 저주를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또한, 로마서 5장에 나타나고 있는 첫 아담과 두 번째 아담에 대한 부분도 행위언약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첫 아담이 죄를 범하여 모든 후손들이 죽음에 이르렀지만 두 번째 아담의 의로운 행위, 즉 십자가의 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는 율법의 조문 하나하나를 지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잉글랜드 회중주의 청교도들에게서 처음 시작되어 다른 청교도들에게도 전파된 능동 순종의 가르침은 이 로마서 말씀을 잘못 적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부 잘못된 신앙고백서의 조항을 반성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성 없는 신학의 자세는 성경을 왜곡시키고 결국 성도들의 신앙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전해준 신앙고백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신앙고백서 전체의 가르침이 일부 조항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무오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기 때문에 일부 조항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성경에 위배되면 그것은 바로 수정되어야 하며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칼빈주의(개혁주의)이다.
임진남 목사는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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