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과 제 2 6.10 만세운동 준비사건(독립운동가, 순교자 유재헌 목사 2<피어선의 사람들-안명준 박사>)
6.10 만세운동과 제 2 6.10 만세운동 준비사건
유재헌이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회장을 하고 있었을 때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출상일)을 기하여 순수하게 2만 4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26년이 간지로 병인년이므로 병인만세운동(丙寅萬歲運動)이라고도 부르는데 3.1운동을 잇는 전국적 항일운동이었다. 이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전단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모든 군중이 호응하여 관수교, 황금정 3정목(현 을지로 3가), 훈련원(동대문디자인플라자), 동대문 동묘(東廟), 청량리에 이르는 상여통과 예상 연도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은 그 후 전국으로 전파 확산되어, 고창, 순창, 군산, 원산, 개성, 평양, 정주 홍성, 대구, 공주 등지에서도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많은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일본이 철저하게 군대까지 동원하여 저지당하고 말았다. 6·10 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결과적으로 6·10 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 그래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 이에 2020년 12월 8일 우리민족이 일제의 강제병합과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자주독립 의지를 밝힌 '6‧10만세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제2 6.10독립만세운동이란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참여한 직후인 6월 11일부터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학생회장 유재헌, 김동석, 노응벽, 손병석과 배재고보의 문창모, 협성신학교의 최영식 등 20여명이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학생들이 모두 구속되었던 사건이다. 모의 장소는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지하실이었다. 이들은 재차 만세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모의하여 6월 15일 거사일로 정하였다. 유재헌은 거리에 뿌릴 독립문서를 등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을 급습하여 유인물을 압수하였다. 당시 모든 주모자들 20여 명이 거사전에 체포하였기에 이 항일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그리고 시대일보에 대서특필되어서 기독교 학생들의 독립운동의 의지를 모든 국민들에게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피어선의 유재헌과 김동석을 종로 경찰서에 연행하여 15일간 조사를 받고 검사의 기소유예 판결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6월 30일 석방되었다. 유재헌은 1926년 6월 한국에서 감옥에 처음으로 투옥되었고 후에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41년에 고베 형무소에 두 번째로 투옥되었으며 1942년 한국으로 압송된 후 해방전까지 일본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다.
이런 항일정신은 피어선 출신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피어선 출신인 송창근(1945년 12월 김재준과 함께 한신대학교 공동 설립자)도 항일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남대문교회 장로요 조사이던 함태영이 3.1운동과 연루, 투옥되자 송창근 전도사가 그 자리를 메우며 그에게 있어서의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주로 하는 일로 남대문교회가 뚝섬에 세운 전도소에 나가 활동했는데 이때 교인들에게 '독립운동가'노래를 유포시켰다는 죄목으로 1920년 1월 일경에 잡혀서 첫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6월 18일에 만기출옥하였다. 이런 피어선 출신의 항일정신을 유재헌도 이어갔다.
유재헌과 함께 모의에 동참한 문창모(文昌模, 1907년 4월 23일 ~ 2002년 3월 13일)는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1907년 4월 23일 평안북도 유명한 기독교 마을인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1926년 6·10만세사건에 참여한 뒤 제2의 거사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서울 지역 고등보통학교 대표들과 서대문에 있는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 기숙사에서 모임을 갖고 격문과 선전문 작성 및 인쇄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해방후에 그는 1953년 결핵환자 퇴치를 위해 대한결핵협회를 조직하였으며,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한 인물이다. 제 14대 국회의원을 하였다.
1999년 6월 23일 평택대학교는 제2 6.10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학교 교정에 세웠다. 이것은 이 운동의 장소이었고 이 운동의 리더 역할을 하였던 학생회장 유재헌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의미가 있었던 기념비였다.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평택대학교에서 가진 제2 6.10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제막식에 격려사를 보내, 이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고 관계자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이 만세운동의 기념비를 제막하면서 1999년 6월 23일 이희호 여사가 보낸 격려사는 다음과 같다.([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오늘 제2의 6.10독립만세운동의 기념비를 제막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이처럼 의미있는 자리를 마련하신 평택대학교와 6.10만세기념사업회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 역사의 그늘에 가리어져 있던 제2의 6.10독립만세운동을 재조명해온 여러분의 노력은 매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2의 6.10독립만세운동은 어떠한 불의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우리 젊은 학도들의 끊이지 않는 열정과 용기를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다음날 다시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겨레의 자주독립을 향한 만세운동은 3.1운동과 6.10만세운동에 이어 광주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선열들이 꺼져가는 조국광복의 불씨를 다시 지펴내고, 마침내 어떠한 도전에도 거칠 것이 없는 도도한 민족정신으로 승화시켜온 것입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가르침이 바로 이와 같은 선열들의 불굴의 애국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열들이 모든 것을 바쳐서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자손손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당당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열들이 목숨바쳐 이루고자 했던 한결같은 소망을 우리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제2의 6.10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였던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이념과 정신을 이 곳에 계승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값진 일입니다.
유재헌의 이런 민족정신은 학교의 이름을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앞장선 모습을 보여준 소중한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도 그의 애국사상은 일본 유학시에서도 나타났고 해방 후 순교하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서 기도와 설교에서도 강력하게 드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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