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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독립운동가, 복음성가의 아버지 유재헌 목사의 삶<피어선의 사람들-안명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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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성가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순교자 유재헌 목사<피어선의 사람들-안명준 박사>

 

유재헌 목사의 생애

유재헌(1905-1950) 목사는 한국 초대교회 역사에서 유명한 장로인 유흥렬의 아들로 태어나 평택대학교(구 피어선성경기념학원, The Pierson Memorial Bible School)에서 공부하였고, 학생회장으로 1926년 제 2 6.10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 준비하였고, 일본유학시 항일운동으로 감옥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였으며, 갑성회를 창립한 교육 계몽가였으며,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수도원인 대한수도원의 설립자였으며, 신한애국청년회를 조직하였고, 6.25전쟁의 순교자이며, 복음성가의 아버지이었다. 찬양사역자 천관웅 목사는 유재헌 목사가 지은 복음성가를 국내 예배사역의 시조시라고 하며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라고 언급한다. 찬송가 750곡을 만든 영국의 아이작 왓쯔(Isaac Watts, 1674년–1748)처럼 유재헌 목사를 한국의 아이작 왓쯔라고 이상규 박사는 말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파한 신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처럼 민족을 사랑하고 복음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드린 아름다운 순교자였다. 그의 차남 유광웅 박사의 말처럼 예수 사랑-민족 사랑에 불타 산화한 순교자로 면류관을 쓰고 최후 승리를 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생애

 

유재헌(劉載獻) 1905 3 21일 제중원 (현재 남대문교회)교회의 장로인 아버지 유흥렬(劉興烈, 1863-1945)과 어머니 김인대 간호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독자인 그는 원래 본명이 유은남(劉恩男)이었으나 잡아 바친다라는 뜻으로 재헌(載獻)으로 개명을 하였다. 아호는 기도의 불제단이라는 의미의 화단(火壇)이다. 유재헌의 부친 유흥렬은 초기 한국교회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한 전도자이자 조사였다. 유흥렬은 1863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삼리에서 태어나 30세에 언더우드(원두우, H.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1894년에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 후에 상투를 자르고 개화운동과 복음전도에 앞장서자 문중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의 믿음은 뜨거웠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학생 시절에 피어선(A. T. Pierson, 1837-1911)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인연으로 후에 자신이 1887 9 27일에 창립한 새문안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바로 앞에 있었던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교장을 1912 9 18일부터 1916 5월까지 역임하였다. 피어선은 1910 12월 아내와 그의 두 딸인 헬렌(Helen M. Pierson, 1861-1937)과 안나(Anna W. Pierson, 1869-1937)와 함께 내한하여 성경을 가르쳤고, 한국 선교 상황을 돌아보았는데 몸이 아파서 이듬해 일본을 거쳐 뉴욕으로 돌아갔다가 그 해 1911 6 3일에 소천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기증하여 한국의 성경학원을 설립하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장남인 델러반 피어선(Delavan T. Pierson, 1867 -1952)의 주도하에 1912년에 세워졌다. 피어선 박사에게 큰 영향을 받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다시 유흥렬 장로에게 세례를 주고 그의 아들 유재헌은 약 30년 후에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재헌의 장남 유종건 목사가 피어선기념성경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이 모든 사역들을 돌아보면 피어선 박사의 선교의 열매가 후대에 풍성하게 나타난 것들이었다.

유흥렬은 언더우드와 동역자가 되어 제중교회(현재 남대문교회)에서 지금의 전도사에 해당되는 조사(助事, helper)로서 사역하면서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등과 함께 용인, 광주, 평택 등 경성지방을 중심으로 속속 세워진 교회들의 순회조사로 시무하였다. 유흥렬은 순회전도를 통해 1902년에는 성경번역자이며 찬송 작사자인 피득 (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선교사와 함께 광주군 고산리교회를, 1903년에는 광주군 송파교회를, 1904년에는 피득 선교사와 손흥집이 함께 전도한 결과로 광주군 소재 심곡교회, 세곡교회, 그리고 둔전교회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는 광주군의 고령교회, 용인군의 금양로에 있는 원촌교회를 순회 시무하기도 했다. 당시 제중병원(지금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김인대와 결혼하였고, 유재헌은 아버지가 순회전도자로 활동하던 때 1905년에 서울에서 출생했다.

유흥렬은 용인군 대갈리교회에서 시무하기도 했고(1909), 1919년 용인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되었다. 이 교회에 아들인 유재헌 목사가 일본에서 돌아와서 1942년에 목사로 취임을 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 수도원도 원장으로 사역을 하였다. 5년 후 유 목사는 임마누엘 수도원에 집중하기 위하여 1950년 초에 사임을 하였다. 유흥열 장로는 세례받고 기독교인이 된 후 50여년 동안 전도자로 혹은 장로로 봉사하고 1945 8 17 8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905년 출생한 유재헌은 아버지의 신앙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25년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아리실(牙利室)교회의 서정의와 결혼하였다. 서정의 사모는 이 교회의 서광석(徐光錫)과 강복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 11 9-1909 10 8)의 전도로 오인선(吳鄰善, 1854-1912, 오소운 목사 조부)이 예수를 믿은 후에 사저에서 예배장소로 사용하다가 교회가 부흥하였고, 서광석씨의 땅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지었다. 아리실 교회(최초 이름 아곡교회, 牙谷敎會)는 미국 감리회 스크랜턴 선교사가 와서 1895 9 17일 창립된 유서 깊은 교회였다. 1906년 선교지분할정책에 따라서 장로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한평생 찬송가를 연구한 오소운 목사의 부친 오주영 장로, 오건영 장로, 그리고 서흥기 장로(서정의 오빠)의 헌신으로 교회가 부흥하였다. 서정의 사모는 오라버니 서흥기 장로가 경신학교를 다녔고 영어도 능통하여 사교육을 받았다. 성경지식은 물론이고 한국역사, 세계사에 있어서도 많은 지식을 가졌고, 한자와 일본어에도 상당한 수준이 있었다. 차남 유광웅 박사에 의하면 어머니 서정의 사모도 남편이 다녔던 피어선기념성경학교에 잠시 다녔던 것 같다. 1936년 이전에는 남학생 위주의 학교였지만 이 해부터 남녀공학제로 전환되어 피어선성경학원의 여자부 부장으로 하마련(Marion E. Hartness)이 임명되었다. 하마련 선교사는 1918년 서울지부의 여성선교사역을 지도했다.

유재헌 목사는 5명의 자녀를 가졌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던 장남 유종건 목사(수송교회, 과천교회와 임마누엘 수도원 원장, 2012년 소천), 장녀 유인애 (대구 서문교회 이성헌 목사의 사모), 차남 유광웅 박사(스위스 바젤대, ACTS 은퇴교수), 삼남 유종웅(임마누엘 수도원 원감, 소천), 차녀 유정심(대구 아름다운 교회 정영호 목사의 사모)이 태어났다. 그들 모두는 피어선의 자녀들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와 가르치는 사역자로서 아름답게 쓰임을 지금까지 받고 있다.

유재헌은 언더우드가 정동 자택에서 1886년에 설립한 경신학교를 1921년 거쳐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입학하였다. 그가 언제 입학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6 4월에 학생회장을 한 것으로 보아 그 보다 1년 전 1925년에는 입학을 했을 것이다. 추측하건데 그는 2년 정도 수학을 한 것 같다. 그의 동기생들은 1927 11월에 졸업을 하였다. 1924 3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갑성회(甲星會)를 조직하고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디지털용인문화대전>에 따르면 1926 7 24일 갑성회를 모태로 하여 임시총회를 통해 내부 혁신, 사업 쇄신을 목표로 용인청년회(龍仁靑年會)로 개칭하였다. 주로 야학활동과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회원은 박쌍화(朴雙和), 우영희(禹永熙), 임원규(林元圭) 등을 중심으로 50~60명이 있었다. 용인청년회는 용인소년회를 후원하여 용인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축구대회 및 동화회를 개최하였다. 용인청년회는 야학으로 부족한 교육기관을 보충하였다. 이런 면에서 유재헌은 교육의 탁월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근대 한국사에서 귀한 사명을 감당한 교육가였다.

그의 나라 사랑은 젋은 시절부터 강하게 싹트었다. 1926 6.10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제2 6.10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하였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미리 발각되면서 실패하였고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후에도 계몽운동과 민족운동을 하면서 일본경찰의 철저한 감시와 핍박을 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어느날 그는 애국심이 고조되어 일본으로 가기로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는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게 아니라 차라리 적의 진지 한가운데 들어가 활동하는게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우국동지 셋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도착하여 고베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자신이 직접 손수례를 개조하여 다다미를 깔고 아래는 구두수선 도구와 취사도구를 넣어서 자신만의 이동가옥을 만들어 그 안에 거하면서 살았다. 고국을 떠나 힘들었지만 그는 기쁨과 사명으로 일본에서의 삶을 의미있게 보내었다. 또한 구두수선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손수레 위에다가 할렐루야와 파영유가(把靈劉家, 영혼을 잡는 유씨의 집)라는 문구를 써 붙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하였다. 유재헌 목사의 맏 사위인 대구 서문교회 이성헌( 73대 총회장, 아들 이상민 목사) 목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낫또(청국장)와 평양의 밤을 주문하여 아마구리()을 구워 팔았지만 수입이 적어서 주로 구두닦이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국에 남아있던 유재헌 목사의 아내 서정의 사모는 용인교회에서 목회하던 남편의 아버지이신 유흥렬 장로를 모시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시켰다. 남편의 일본 체류 초기에 잠시 방문도 하였다.

유재헌 목사는 약 15년 동안을 일본에서 어렵고 힘든 삶을 신앙으로 극복하며 활동하였다. 한국인의 불굴의 의지이며 신앙인의 인내의 승리였다. 1928년 관서(고베, 神戶) 성서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재일 조선인교회인 다하라마찌(田原町)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1930년 학교를 졸업한 후에 동경시 근처 미가와시마(삼하도, 三河島) 조선기독교회에서 1931 5-6월까지 임시 담임을 하였다.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교회의 설립자인 성낙소(1890-1964) 목사가 1930 5월 동경에 도착하여 사역하고 있었는데 조선기독교회 포교책임자로 서울 제1교회에 부임해 가자 1931 11 8일에 횡빈(요코하마)조선기독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야간학교와 일요학교에서 조선인들의 애국사상을 강조했던 것 같다. 1931 12 25일에 삼하도조선기독교회에서 안수받고 목사가 되어 고베, 요코하마, 동경, 아까시 등지에 조선기독교독립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목회와 부흥회를 하면서 재일 동포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며 반일운동을 한 것 때문에 사상범으로 여러 차례 고베 유치장에 피검되었다. 이런 고난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여러편의 복음성가를 지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도 1937 7 7일 중일전쟁의 도발을 전후하여 종교계를 더욱 철저히 통제하여 전쟁 협력에 이용하고, 이에 거슬리는 종교 단체나 개인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탄압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따라서 그 때까지 법령이나 종교계 지도층의 회유를 통한 간접 통제의 방식을 버리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개 종교단체나 개인들에게까지 직접적인 강압과 통제를 하여 각 교파를 교단으로 통폐합하고, 그 교리와 의식(儀式)까지 일본화(日本化=神道化)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10월부터 실시하였다. 특별히 기독교계에 대해서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1938 2)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1940)이라는 구체적인 정책까지 수립하여 신사참배를 지도하고 강화하였다. 지속적인 일본의 강요와 위협에 견디다 못한 장로교총회는 1938 9월 신사참배 국민의례의 형식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가결하였고, 이어 감리교와 다른 교파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 교회는 이미 1936년 기독교학교 대부분의 교육 인퇴(引退)를 가결하여 신사참배에 저항했고, 주기철(朱基徹최봉석(崔鳳奭) 등은 이때 순교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폐쇄되고 2백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고 50여 교역자들이 순교하였다.

일본 내에서는 1939년에 종교단체를 통제하기 위한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였다. 1940년 일제가 모든 신교 교파들을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아래 통합하려 할 때에 모든 교단들이 이에 가입하고 신궁참배를 하였다. 1941년 일본 내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단>이라는 단일 교단으로 통합하여 전시체제에 활용하였다. 유재헌도 바로 이런 일제의 강압조치에 따른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1941년 초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베 유치장에 갇혀 지내다가 그해 말에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한국에 온 유재헌은 4년 정도 공적 활동이 금지되었지만 그는 지혜롭게 복음사역의 역할을 능력있게 감당하였다. 왜경들은 이미 한국에서 영향력있는 유재헌에게 설교를 금지시키고 늘 감시를 하였다. 유재헌 목사는 사회적으로 지적인 교양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 설교, 부흥회, 기도 그리고 찬송까지 큰 은사가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김양교회(현재 용인교회)에서 교회를 담임한 아버지 유흥렬 장로는 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기도하십시오라고 하면, 즉시 아들 유재헌 목사가 기도를 시작하였다. 설교는 아니었지만 그의 간절한 열정적 기도 역시 큰 은혜를 주었다. 보통 40분 정도 나라와 불신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 유 목사의 막내 딸 유정심 사모에 의하면 보통 설교 전에서도 비교적 기도가 길었다고 부친에 대한 책<예수없는 천국 내가 원치않고 예수 있는 지옥도 나 싫지 않도다>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나라와 영혼들을 위한 간절함이 기도를 길게 하였을 것이다. 실재로 그는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라고 한다. 그의 삶의 원동력은 뜨거운 간절한 기도의 힘이었다. 해방후에도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아버지 하나님. 이 자리에 주의 신이 강력히 현현하여 무디어진 심령들에게 강한 힘으로 임하시사 저희들 원전히 부수어 주시옵소서. 성령의 빛이 심중에 임하시사 양심이 바로 잡히고 하나님 명령대로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불초한 종, 도구로 쓰시어 하나님의 영광 나태내시옵기 간절히 바라며 주 예수 이름 의지하여 비옵니다. 아멘.(1949 1 5일 오전 11)

 

어떤 날 예배가 끝나자 일본 형사가 찾아서 각서에 근거하여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보내주었는데 왜 설교를 하느냐고 다구쳤다. 그러나 유 목사는 각서를 할 때 설교를 안한

다고 했지 기도를 안 한다고 각서를 안 썼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의 내용은 언제나 전쟁이 빨리 끝나고, 온 국민이 편히 살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밤이 새워서 기도를 한다고 말하여서 왜경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944 12월에 그는 처가인 아리실(牙利室)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는데, 설교 도중 우렁찬 바리톤으로 자신이 지은 「복음성가」를 불렀는데 당시 참석한 사람들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복음성가를 듣고 매료된 오소운 목사는 장차 유재헌 목사와 같은 찬송가 작가가 되리라 다짐해 오늘에 한국의 유명한 찬송가 연구의 대가가 되었다.

이런 감시체제 속에서도 유재헌 목사는 지혜롭게 전국 교회에 다니며 많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이 기간 중 가나안 농군학교를 창설한 김용기 장로와 교분을 갖게 되었는데 농촌운동에 관심은 많았으나 민족구원을 위한 기도 운동에 역점을 두고 구국기도단원을 모집하였고, 이런 이유로 1945년 말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군탄리에 대한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엘리아의 제단처럼 우상을 불태우는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희구하면서 수도원을 화단(火壇), 곧 불의 재단이라 했고, 이것이 그의 아호가 되었다. 그가 작시한 찬송에는 자신의 이름 대신 火壇이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가 설립한 대한수도원이 한국에서의 기도원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전국 각지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면서 많은 복음성가를 작시하여 복음성가의 아버지가 되었다. 수도원 설립과 함께 작시한 것으로 보이는 <기도를 하자>(1945. 12), 그리고 1946 1월에 쓴, <성신이 오시었네>, <성신이여 오시옵소서>, <도고찬송> 등은 수도원집회 때 부르기 위한 복음성가였다. 그의 대부분의 성가들은 1946-1948년 사이에 씌여졌다. 처음에 철원군에 수도원을 설립했으나 이곳이 이북지역이고 38선이 고정화되어 감에 따라 남한과의 왕래가 어려워지자 1950 5월에는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두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이 개원된지 두달이 채 되기도 전에 1950 6.25사변이 발발하고 만다. 6.25전에 이미 이북에서 수만은 성도들이 월남하여 유재헌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고자 삼각산에 운집해 있었다. 유재헌목사는 그를 찾아온 이 피난민들과 계속 집회를 가지면서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러나 8 15일 정치보위부원들의 급습을 받게 된다. 어린 아이들과 늙은 부인들만 제외되고 유재헌목사를 선두로 모든 성도들이 체포되어 정치보위부가 감옥으로 사용하던 국립도서관의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그후 부녀자들과 대부분의 성도들은 풀려나왔으나 유재헌목사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수사를 받고 고문을 받았다. 그는 1950 9 28일 수복전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어 가던 중 46세에 순교하였다.

남편이 순교한 후 서정의 사모는 모든 자녀를 데리고 1951 1.4 후퇴시 한 달간 걸어서 대구까지 피난을 갔다. 그 후에 거제도로 가서 장승포 순교자가족 집단수용 텐트에 3년간 살다가 1954년 초에 서울로 돌아왔다. 철원 기도원으로 이사하기 전에 집수리하는 동안 그들 다섯 식구가 여러 날 남편의 모교인 충정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 기숙을 하였다. 서정의 사모는 자녀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그리고 피어선 박사의 정신으로 그들을 교육하여 모두 신앙의 인물들로 키웠다.

그곳은 전쟁 당시 전진(田鎭, 1912-1996) 원장이 철원 대한수도원을 맡았고 그 후에도 평생 사역하였는데 삼각산 임마누엘수도원도 함께 돌보았다. 본명이 전전진(田全鎭)인 전진 원장은 원산에 있는 감리교 계열의 여성교육기관인 루씨여학교(樓氏女學校, 설립자 Lucy Armfield Cuninggim, 1838-1908) 교목인 전희균 목사와 한경택 사모의 7남매 중 장녀로서 태어나서 미션스쿨인 공주 영명학교와 서울 배제학당 그리고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한국의 여성 인텔리였다. 후에 유재헌 목사가 1946 3월 원산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중생의 체험을 하고 기도원 운동에 동참하여 후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계속>

<제공: 안명준 박사 외 공저-피어선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