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과 이스라엘(유대인)은 어떤 관계였나요?
1. 알렉산더 대왕은 누구인가?
1)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주전 356-323)의 이름을 모르는 어른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역사 속 유명한 인물입니다.
2) 겨우 30 대 전반에 숨을 거둔 이 젊은이는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짧은 기간 헬라 지역, 페르시아, 가나안, 애굽,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 서부까지 평정하여 대제국을 이룬 인물이지요.
3) 성경에서 그는 이미 스가랴서에 예언되어 있음을 본 블로그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이미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4) 참고로 그는 주전 4세기에 활동한 인물이고 스가랴 선지자는 주전 5-6세기에 활동한 사람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경고
1) 스가랴서 9장 본문은 놀랍게도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의 경고로 한 정복자가 나와 이스라엘 주변국들(특별히 갈릴리 북부 수리아 땅의 성읍들)을 유린하게 되리라는 유명한 계시를 합니다.
2) 이 정복자가 정말 알렉산더 대왕을 말하는 걸까요? 스가랴는 (200년 후?) 가나안 땅에 나타날 한 인물로 인해 이스라엘 주변국들이 유린 당하게 될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나라 마케도니아의 주도였던 데살로니키의 고대 유물(터키식 사우나탕 외부 전경)
3. 알렉산더 대왕과 유대인
1) 지금의 중동 지방 전역을 유린한 알렉산더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 유대 민족은 어떻게 대우하였을까요?
2) 놀랍게도 알렉산더는 유대 땅의 이전 다른 정복자와는 조금 다르게 이스라엘 민족을 다룹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 고유의 율법을 보호하였으며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습니다.
3) 요세푸스는 이런 배경에 대해 알렉산더의 꿈에 나타나 그의 승리를 약속한 하나님의 경고로 인함이라 기록(Antiq. Ⅺ. 314)하고 있으나 역사적 신빙성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4) 알렉산더는 애굽에 알렉산드리아 신도시를 건설할 때에도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장려 정책을 폈습니다. 훗날 70인 역 성경이 애굽 땅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입니다.
5) 이렇게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땅에 자신의 이름을 딴 수많은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이들 "알렉산드리아 신도시"는 무려 70개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유명한 제 2도시 칸다하르의 이름도 사실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아프간 북부 주요 도시 헤라트도 알렉산드리아였으며 인도에도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합니다. 파르티아의 접경지에 있던 박트리아의 북부 도시 메르브도 알렉산드리아였으니 알렉산더가 자신이 점령한 도시들을 얼마나 역사 속에 자랑스럽게 각인을 시키려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6) 알렉산더는 팔레스틴 지방뿐 아니라 애굽에서도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애굽을 자유케 한 해방자로 보였기에 환영을 받았습니다.
7) 지명에 대한 우리 인류의 애착은 각별합니다. 예를 들어 가라(가야, 카라)의 지명이 지금의 터키와 흑해 주변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들어온 것도 지명에 대한 인류의 지극한 애정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일본 열도인들은 과거 쓰시마 섬을 “가라지마”라 했고 한국을 “가라구니”라 했겠는가요. 심지어 일본 고서(古書)는 일본 열도에 벼농사를 보급 시킨 족속도 우리와 독도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 시마네(島根)현 이즈모(出雲)국의 가라야마님(鞍山祗)의 부족이라 했으니 이즈모 국이 한반도 출신들이 만든 국가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뉴잉글랜드, 뉴욕 등의 지명도 모두 인간이 지닌 고향 지명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을 담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4.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였던 알렉산더
1) 그런데 알렉산더가 정복한 것은 땅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복한 북동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 엄청난 헬라 문화를 뿌려놓게 됩니다. 헬라식 웅장한 건물, 체육관, 야외극장들이 건설되었고, 의복과 생활 방식에도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 이에 따라 새로운 상인 계급과 중산층이 등장하였고 무엇보다도 활발한 유형적, 무형적 교류 가운데 언어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지요. 헬라어는 국제어가 되었고 다양한 타 민족 간 소통이 원활하게 되었습니다.
3) 이런 배경 가운데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갈 4:4). 그리고 헬라어는 신약 성경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더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였던 것이지요.
4) 이런 격동기를 거치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대처 하였을까요? 알렉산더 시대는 유대인들에게 도전과 응전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보내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시련과 고난과 유혹이 교차하였습니다. 헬라식 문명과 문화에 대한 압박과 동경은 문화적 동화를 가져왔고 그것은 곧 신앙의 세속화를 가져왔습니다.
5) 반면 이 같은 헬레니즘문화의 영적 위험성을 직감한 일부 유대인들의 헬라 문화에 대한 종교적 저항은 더 깊은 신실한 신앙인들을 배출하게 되었고 그들은 유대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신앙적 안간힘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 기간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 민족에게는 신앙적 연단의 시절이었습니다.
6) 하나님은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유대 민족 신앙을 세계 신앙으로 바꿀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사적 흐름 가운데 이렇게 헬라는 그리스도가 오실 준비를 위한 배경 국가가 되었습니다.
7) 이렇게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신앙적 도전과 연단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야완의 후손 알렉산더 대왕은 바벨론에서 33세에 요절하고 맙니다. 이것도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표범(단 7:6) 같은 인물이요 수염소(단 8:5,21)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외경 마카비 1서(1:1-8)에도 그의 치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 하지만 그의 대제국은 그의 수하 4장군이 분할 통치를 하며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300여년 후 인류의 구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은 또 한 번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짐)를 가져왔고 놀랍게도 이러한 분산은 후에 헬라어에 능통하고 다중 언어에 능했던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9) 마치 일제 치하 36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우리 민족의 유랑이 20세기 후반 들어 일본, 중국, 원동,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의 복음 전파에 강력한 배경이 된 것과 많이 닮아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D.)